SBS 인기드라마 [뿌리깊은 나무]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25.4%라는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며 유종의 미를 거운 [뿌리깊은 나무]는 한글창제를 둘러싼 살인과 음모를 긴장감 있게 그려내 시청자들의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


특히 마지막 방송에선 지금껏 '한가놈'이라 불리던 인물, 한명회의 정체가 밝혀지며 마지막까지 소름끼치는 반전을 선사하기도 했다.


시청자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 모은 한명회. 그는 과연 누구인가. 또한 드라마처럼 한명회와 성삼문은 정말 악연이었을까.


[뿌리깊은 나무] 마지막 회에서 밀본 4대 본원자리에 오른 심종수는 지금껏 '한가놈'이라 불린 한명회에게 "반드시 수양대군의 마음을 사로잡아라. 나는 밀본 수장으로서 역사의 뒤편을 걸을 것이다. 자네는 역사의 전면에서 재상총재제의 길을 가야한다"고 당부했다. 이 이야기를 듣고 길거리에 나선 한명회는 성삼문-박팽년과 어깨를 부딪힌 뒤 "집현전을 박살내겠다"고 다짐한다. 성삼문 역시 한명회를 보고나선 이유를 알 수 없는 좋지 않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이처럼 팩트와 픽션을 교묘하게 섞어 놓으며 시청자들의 흥미를 자극한 [뿌리깊은 나무]의 마지막 방송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그렇다면 실제 역사 속에서 한명회와 성삼문은 어떤 길을 걸었을까. 드라마에서 채 표현되진 않았지만 한명회와 성삼문의 '악연'은 실상 조선 왕조의 역사를 바꿔놨다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심각한 측면이 있었다.


심종수의 당부처럼 실제 한명회는 수양대군의 마음을 사로잡고 기습 쿠데타인 '계유정난'을 주도한 핵심 인물이었다. 수양대군이 "나의 자방"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모사에 능했던 그는 당대의 권신이었던 김종서를 제거하고, 단종을 폐위시키는 등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훗날 세조가 된 수양대군이 "한명회가 없었으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세조가 부당한 방법으로 왕위를 차지하게 되자 성삼문-박팽년을 위시한 집현적 학사들은 단종의 복위를 획책하게 된다. 성삼문이 보기에 세조의 왕위 찬탈은 명분 없는 쿠데타에 불과했으며, 왕실의 정통을 이어나가기 위해선 단종이 왕위에 있는 것이 맞다고 판단한 것이다. 또한 그는 세종이 살아있을 당시 "단종을 잘 부탁한다"는 유훈을 받은 몇 안되는 인물이기도 했다. 성삼문에게 '단종복위'는 세종의 유훈을 지키는 것이요, 왕실의 정통을 계승하는 작업이었던 셈이다.


세조의 밑에서 단종 복위 계획을 세우던 성삼문과 박팽년 등은 1456년 2월, 세조가 중국의 사신을 맞아 창덕궁 연회장에서 잔치를 벌이는 때를 틈타 세조 부자와 한명회를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연회를 하게 되면 임금의 뒤에는 '보디가드' 격인 운검이 서게 되는데, 이 운검은 연회장에서 유일하게 칼을 소지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절묘하게도 당시 운검에 성삼문의 아비인 성승과 단종복위파인 유응부가 지목된 것이다.


성삼문은 성승과 유응부를 시켜 연회가 시작되자마자 세조와 의경세자를 살해하라고 명령하고, 나머지 암살조에게는 차례로 한명회와 신숙주 등을 제거하라는 주문을 한다. 마치 하늘이 도운 것처럼 성삼문의 단종 복위 계획은 한치의 오류도 없이 착착 맞아떨어졌다. 이대로라면 한명회는 물론이요, 세조의 목숨마저 위태롭게 된 것이다.


그런데 연회 전날 예상치 못한 '변수'가 터져 나왔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세자는 연회에 참석하지 않고 궁을 지키는 한편, 연회 장소 역시 보다 드넓은 곳으로 변경된 것이다. 성삼문의 계획에 일정부분 차질이 생긴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일까. 이 사태의 중심에는 바로 한명회가 존재하고 있었다.


당시 임금의 비서관 격인 우승지로서 국정 전반을 관장하고 있었던 한명회는 연회장소가 너무 좁고, 운검과 세조의 거리가 가까운 것을 매우 꺼림칙해 했다. 꺼림칙한 기분을 감추지 못한 그는 연회 당일 운검의 명단을 파악하곤 소스라치게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세조에게 적대적이라 알려진 성삼문의 아비 성승과 유응부가 운검 명단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한명회는 밤늦게 세조를 찾아가 연회장소를 변경하고, 세자는 궁궐에 남길 것을 요청했다. 갑작스런 요청에 세조는 "이 무슨 예의없는 망발인가" 라며 한명회를 꾸짖었지만, 한명회는 부득불 계획 변경을 요구해 이를 관철시켰다. 허나 이 때에 한명회는 차마 운검마저 들이지 말라는 요쳥까진 할 수 없었다. 중국 사신을 모시는 자리에 '보디가드'가 없다는 것은 국제적 결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계획이 다소 틀어지긴 했으나 이 소식을 들은 성삼문은 "운검이 들어갈 수 있다면 된다"고 위안 삼았다. 운검만 들여보낼 수 있다면 세조의 목을 따는 건 시간문제라 봤기 때문이다. 허나 이건 너무 순진한 생각이었다. 연회 당일 운검의 자격으로서 연회장에 들어가려던 성승과 유응부 앞을 한명회가 가로막은 것이다. 성승과 유응부로선 한명회의 돌발행동에 크게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한명회는 "연회장소가 비좁고 더우니 운검은 들어가지 않는게 좋겠소" 라고 말했고, 성승이 "난 그런 어명을 받은 적이 없소이다. 들어가게 해주시오."라고 쏘아 붙이자 한명회는 "나중에 명령이 있을 것이오. 당장 물러가시오." 라며 그들을 연회장에서 쫓아냈다. 이는 세조의 명령과 관계없이 순전히 한명회 개인의 자의적인 판단으로 행해진 행동이었다. 성삼문으로선 한명회 때문에 야심차게 진행한 세조 제거 계획이 허무하게 무산된 것이다.


당시 유응부는 "이렇게 된 이상 바로 쳐들어가서 세조를 죽이자"고 주장했지만, 성삼문은 "경거망동하지 말고 다음 기회를 노리는 것이 좋겠다"며 작전상 후퇴를 명령했다. 이 말을 듣고 유응부는 "하늘이 주신 기회를 버리는구나! 이래서 학문만 하던 선비들과는 일을 꾸미지 말아야한다!"고 탄식했다. 실제로 유응부의 말처럼 성삼문을 비롯한 단종 복위파는 연회 다음날 한명회에 의해 모두 체포되고 만다. 집현전 학사로서 평생 학문만을 연구해 온 성삼문에게 권모술수에 능하고 상황판단이 재빠른 한명회는 감당하기 힘든 상대였던 것이다.


집현전 학사들이 무더기로 체포되면서 세조는 "성삼문 등이 나를 임금으로 인정해준다면 살려주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했다. 허나 한명회는 세조의 이런 생각을 원천적으로 반대했다. 한명회는 성삼문, 박팽년 등의 주살을 끈질기게 주장하는 한편 조정 대소신료들을 움직여 단종 복위파를 모조리 제거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결국 세조는 한명회의 주장을 받아들여 성삼문, 박팽년 등을 살해하기에 이른다.


또한 한명회는 "집현전이 이제 학문의 기관이 아닌 정치를 논하는 기관이 됐으니 그 뜻이 요망합니다. 당장 혁파하소서." 라고 간청하여 집현전을 혁파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뿌리깊은 나무] 속 한명회의 대사처럼 실제 한명회 역시 집현전을 '박살'냈던 것이다. 성삼문, 박팽년 등을 모조리 제거하고 집현전마저 혁파했던 한명회는 세조를 위시한 집권세력의 위치를 더욱 공고히하고 권력을 독점하는 등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막강한 '공신세력'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역사 속 한명회와 성삼문은 서로의 목숨을 걸고 싸운 최대의 정적이었다. 결국 한명회는 성삼문의 목숨을 앗아갔을 뿐 아니라 그의 정치 근간이었던 집현전마저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하는 것을 통해 성삼문과의 질긴 악연을 끝낼 수 있었다. 역사에서 가정이란 것은 부질 없는 일이지만 만약 성삼문이 이 대결에서 승리했다면 조선 왕조의 역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됐을 것이다.


다만, 실제 한명회와 드라마 속 한명회의 차이가 있다면 실제 역사 속 한명회는 '재상총재제'가 아니라 '왕권강화'에 더 치중한 인물이었단 것이다. 네 번의 공신책봉, 두 번의 영의정 재임, 원상제를 통한 국정운영 등 한명회의 권력은 왕권을 능가한다 할만큼 강력한 것이었으나 그는 단 한번도 왕권에 도전한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오히려 자신의 딸을 왕실에 바치는 등 왕실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말년에는 전재산을 왕실에 기부하는 등 철저한 왕권 신봉주의자로서 제 소임을 다했다. "재상총재제의 길을 가라"던 드라마 속 심종수의 당부는 실상 한명회에겐 어울리지 않는 성질의 것이다.


어찌되었든 [뿌리깊은 나무]는 '한명회'라는 실제 인물을 교묘히 가공하여 반전의 묘를 살리는 한편, 시청자들의 흥미를 자극함으로써 올 한해 가장 재미있었던 드라마로 대중의 머리 속에 남았다. 치밀한 각본과 뛰어난 연기를 통해 시청자들을 즐겁게 했던 [뿌리깊은 나무] 제작진 모두의 노고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박수를 보낸다. 그들로 인해 지난 몇 달간 시청자들은 지루하지 않았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