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의 제왕에서 앤써니 킴(김명민)은 첫회 때 새끼손가락에 ‘절대 반지’가 끼워진 채 강연장에 서서 이런 말을 한다. “2002 월드컵이나 광우병 파동같은 이변이 있지 않는 한, 나는 실패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드라마의 제왕은 앤써니의 시청률 승률 93.1%라는 설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7%대의 저조한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 물론 시청률과는 별개로 이 드라마가 갖는 장점을 무시할 수는 없다. 긴박한 전개와 흡입력 있는 설정을 통해 매니아층을 끌어들였고 호평을 이끌어 냈다. 결국 드라마의 제왕은 저조한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로는 이례적으로 연장 결정을 하며 시청률이 드라마의 전부가 아님을 증명해 내기도 했다.
그러나 드라마의 제왕이 연장을 결정할 수 있었던 것은 드라마의 제왕이 좋은 드라마서가 아니다. 드라마의 제왕의 광고가 완판되기도 했고 또한 드라마 내부에서도 간접광고의 여지가 많은, 한마디로 ‘돈이 되는’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결국 드라마의 제왕 역시 상업논리에 따른 드라마인 까닭에 시청률의 저조는 결코 플러스가 아니다. 이 드라마는 일정수준의 재미를 보장하는 드라마임에는 틀림없지만 시청자들을 열광케하는 2%를 충족시키지는 못했다.
김명민이 분한 앤써니 킴은 시청률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열혈 제작자다. 그러나 이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하기에 앤써니는 너무나도 비인간적이다. 드라마의 주인공이 꼭 인간적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시청자들이 동화될만한 ‘스토리’는 있어야 한다. 그러나 초반 앤써니는 성공을 위해서라면 무자비하게 남을 짓밟는 극악무도하고 잔인한 제작자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김명민이라는 호감형 배우가 연기한 탓에 그 설정이 다소 상쇄되기는 했지만 앤써니란 인물 자체를 놓고 봤을 때는 그의 성공에 기뻐하고 실패에 탄식할 장치가 현저히 부족했다. 다소 독특한 인물을 내세웠다면 그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설명이 된다거나 아니면 인물이 아주 매력적이었어야 했다. 하지만 배우들 스스로도 ' 앤써니와 악인의 구별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앤써니의 움직임은 공감을 위한 행동반경 안에 있지 않았다. 주인공이 악인일지라도 그 인물에게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킬 포장지를 몇 겹 덧댈 필요가 있었으나 결국 그런 포장이 없던 앤써니에게 시청자들은 열화와 같은 성원을 보낼 필요가 없었다.
김명민이 연기한 [하얀거탑]의 장준혁이 매력적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태도가 불순하기는 했지만 너무나도 우리의 모습과 닮아있었기 때문이었다. 매력적으로 그려지는 악인이란 그런 것이다. 그 인물의 악한 행동조차 내일처럼 느껴지는 것. 그러나 드라마를 위해서라면 가족도 버리라는 앤써니는 지나칠 정도로 성공에 목을 맸다. 저렇게 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나중에야 그의 과거사가 드러나지만 가난한 집과 병든 어머니라는 구태의연한 설정은 드라마의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신파로 흐르며 득보다는 실이 되고 말았다. 그가 애지중지한 절대 반지조차 어머니가 물려준 반지라는 사실 조차 드라마와 하등 관련이 없는 설정으로 앤써니가 매력적으로 보이기보다는 결국 뻔한 과거사의 주인공처럼 묘사되어 버리며 공감보다는 진부함을 불러일으켰다.
한마디로 이 드라마는 이율배반적이게도 캐릭터에 집착한 나머지 캐릭터를 잃어버렸다. 앤써니라는 독특한 인물을 등장시켰다면 캐릭터 구성에 좀 더 힘을 기울였어야 했는데 결국 앤써니가 독특하기만 할 뿐,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지 못했다. 이 드라마는 캐릭터 보다는 끊임없이 사건을 만들고 해결하는 과정에 집중하며 인물이 아닌 드라마 전반의 갈등에 그 힘을 쏟았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인물들의 매력이 나타났어야 했지만 인물들은 너무 커져버린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 하며 자신들의 매력을 어필할 기회를 잃었다. 이 과정에서 이고은(정려원)작가의 캐릭터마저 희석되기 시작했다. 정려원의 연기는 주목할만하지만 드라마 안에서 이 인물 자체가 스스로 하는 행동은 대본을 쓰는 것 말고는 거의 제로라고 할 수 있다. 수십억에서 백억을 넘나드는 제작비 문제서 부터 라이벌인 제국 프로덕션 사람들의 방해, 표절시비 까지. 하나의 드라마 안에서 수십편의 드라마 안에서 끌어 모은 문제점이 모두 표출되는 것처럼 보이는 일련의 사건들이 인물보다 훨씬 부각되면서 시청자들은 감정선을 놓치게 되고야 말았다. 그래서 앤써니가 갑자기 화마에 빠진 단역배우를 구하러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설정은 감동적이기 보다는 덤덤했다. 시청자들이 앤써니에게 충분히 빠져들지 못했다는 증거다.
실제 상황을 묘사한 다큐멘터리라면 몰라도 드라마 안에서라면 이런 감정선을 놓친 것은 크나큰 손해다. 물론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의 장점과 매력이 있다. 하지만 소수의 시청자가 아닌 다수의 시청자들은 드라마 제작 환경에 대해 심층적인 관심이 없다는 것을 염두 해 두었어야 했다. 드라마가 제작되며 생기는 문제점이 어떤 시청자들에게는 조금 낯설고 생소할 수 있다는 점, 그래서 그 문제에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을 이 드라마는 간과했다. 한 문제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다른 사건이 터지는 구조로 말미암아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전에 지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결국 작가도 너무 큰 사건을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 듯 혈연관계나 우연을 통한 사건의 해결을 만들어 내고 있다. 주인공이 뛰어 다니지 않는 사건의 종착역은 드라마의 매력이라기 보다는 그저 사건을 위한 사건에 불과하다. 결국 사건만 커지고 주인공은 작아지는 결과가 나타났다.
방송을 다룬 드라마가 모두 실패한다고 볼 수는 없다. ‘온에어’만 해도 20%중반을 훌쩍 넘기는 성적을 냈다. 그러나 사실 온에어는 방송을 소재로 삼았을 뿐, 인물간의 갈등과 러브라인에 초점을 두었던 로맨틱 코미디에 가까웠다. 드라마의 제왕이 온에어 같을 순 없고 그럴 필요도 없지만 인물들에게 설득력을 불어넣는 과정에서 실패했기 때문에 온에어의 김하늘이 연기한 ‘오승아’같은 캐릭터가 없었다는 것은 생각해 봐야 할 부분이다. 드라마에서 캐릭터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감정선을 놓치게 된 것, 이것이 드라마의 제왕의 가장 큰 실책이다.
앤써니는 이고은작가가 쓰는 ‘경성의 아침’이 느와르로 가면 시청률이 떨어질 것을 염려해 멜로를 처음부터 넣으라며 대본을 고칠 것을 요구했다. 멜로로 시청자들이 캐릭터를 발견할 수 있게 만들고 나서야 다소의 무리한 설정도 참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 안에서 이고은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고도 시청률 1위라는 성공을 거머쥘 수 있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결국 공감이 부재된 드라마의 제왕 속의 캐릭터들의 움직임 속에서 시청자는 다른 채널을 찾게 되고 말았던 것이다. 사건 사고도 드라마 안에서는 아주 중요한 장치이지만 그 사건을 이끌어 가는 캐릭터가 시청자들의 마음을 훔칠 때에야 비로소 시청률을 올릴 수 있다는 앤써니의 지론은 여기서도 통한다. 이런 종류의 신선한 드라마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쩌면 드라마의 제왕에는 앤써니 킴같은 제작자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