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알고 지냈던 지인이 커밍아웃을 했다. 그는 특별히 남자답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딱히 여성스럽지도 않았기에 그 사실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그는 여자친구도 사귀었고 심지어 크리스천이었다. 의심받지 않을 모든 요건을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그는 그런 삶을 살며 힘들었음을 담담히 이야기했다. 겉으로는 평온을 가장했지만 내내 가슴은 왠지 모르게 두근거렸다. 알아서는 안되는 판도라의 상자를 연 느낌이었다.

 

 

얼마간의 충격의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 보니 그에게 미안해졌다. 나조차 그런 사람은 내 주변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동성애자들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구나. 그냥 내 옆의 누군가일 수도 있겠구나, 하고 말이다. 나도 그들을 오해하고 있었다.

 

 

김조광수의 동성결혼이 치러졌다. 그리고 역시나 반응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못했다. 분명 일반인이 보기에는 뭔가 이상했다. 남자와 여자의 결합에 익숙한 결혼식에 남자와 남자가 등장했다. 남자이면서도 서로 여자 웨딩드레스를 입은 웨딩화보도 공개했다. 남자끼리의 스킨십과 키스도 아름답기보다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결국 결혼식장에는 오물을 투척하는 종교인까지 등장했다. 그런 행동에는 지나치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결혼식을 지켜 본 사람들이 갖는 반응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못했다. 어쩌면 오물을 투척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의 마음도 그만큼의 불편함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그들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인정하겠지만 그런 모습을 굳이 볼 필요까지는 없다는 의견이 주를 이뤘다.

 

 

굳이 나서서 그들의 이미지를 좋지 않게 만든다는 의견도 많았다. 오히려 동성애에 대한 편견만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동성애를 인정하면 근친혼이나 동물과의 성교 역시 인정해야 하냐는 다소 과격한 목소리마저 들린다. 분명, 그만큼 이성애자들에게 있어서 동성애자의 결혼식은 낯설었다. 19살이라는 그들의 나이차 역시 부정적인 이미지에 일조했다. 결국 그들은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모습이 많은 사람들에게 불편하게 다가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은 그들을 외면하지 못했다. 포털사이트에서 그들의 기사는 조회 수와 댓글 수 상위를 기록했고 엄청난 관심을 불러 모았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부정적인 반응이었지만 그래도 그들의 결혼식은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인 만큼 화제성과 의외성이 있었고 대중에게도 호기심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물론 익숙치않은 광경에 뭔가 이질감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의 모습을 비난하는 것에는 동조할 수 없다. 차라리 그들이 ‘싫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솔직하다. 동성애를 인정한다면서도 동성애를 바라보는 것 자체가 불편하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인정한다는 것은 그들의 존재 자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당연한 것이라면 동성애를 이해하지 못해도 그들의 모습을 보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지는 말아야 한다. 결국 인정한다는 말은 거짓이다. 인정하지 못하니 불편하고 불편하니 좋지 않은 소리가 나온다. 물론 인정하더라도 그 장면을 두 눈으로 목격하는 것은 익숙치 않아 불편할 수 있다. 그러나 불편하다는 것은 결국 어느새 ‘정상’과 ‘비정상’의 범주에 그들을 분류하기 때문이다.

 

 

이성애는 정상이고 동성애는 비정상이라는 기준은 누가 정한 걸까. 동성애는 과거에도 존재했고 현재에도 존재하며 아마 미래에도 있을 것이다. 그들의 존재는 사라진 적이 없지만 밖으로 나왔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그러나 여기에도 모순이 있다. 사람들은 동성애의 어두운 이미지를 싫어하면서도 동성애가 밝은 곳으로 나왔을 때 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시아 여성과 백인의 결혼이 불법인 시절도 있었다. 흑인은 투표를 할 수 없었던 시절도 있었다. 기득권층은 언제나 약자들을 괴롭혔다. 그리고 그것을 잘못이라 깨닫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언제나 ‘비정상’과 ‘정상’의 기준을 나누는 것은 인간의 편협한 시각이다.

 

 

근친이나 동물 성교등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역사와 문화의 범주에서 보면 일본이나 일부 부족국가에서 근친혼이 성행한 사례도 있다. 그런 사례를 도덕적으로 매도하고 반인륜적이라 평가할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은 문화와 환경에 따라 그렇게 변화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맥락과 상황을 생각해야 한다. 게다가 근친이라는 관계는 당사자들의 선택의 문제다. 그들은 굳이 친족이 아니라도 다른 사람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려있다. 그러나 동성애자가 되느냐 마느냐 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만약 선택할 수 있다면 그 누가 불편하고 험난한 동성애를 선택하겠는가. 동물과의 성교는 서로간의 합의가 전제될 수 없다는 점에서 동성애와 비교 자체가 불가하다. 아동 성폭력과 같은 범죄도 마찬가지다. 이 경우, 합의가 있어도 아동의 판단능력이 문제가 된다. 다른 문제들을 놓고 동성애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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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 결혼식을 본 우리 아이에게 무엇이라 설명해 줘야 하냐”며 비교육적이라는 의견 역시 황당하다. 오히려 교육적일 수 있다. 아이에게 “세상에는 여러 사람이 있다”고 설명해 주면 된다. “남자와 남자가 좋아하는 사람, 여자와 여자가 좋아하는 사람, 그리고 여자와 남자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이 불편하다는 것은 이미 그 관계에 대한 선악의 판단을 내렸다는 뜻이다. 결코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닌 문제에 말이다. 그러나 생각해 봐야 할 것은, 바로 그 아이가 동성애자일 수 있다.

 

 

인정한다고 동성애자들이 늘어나지 않는다. 억압받고 핍박받는다고 동성애자들이 말살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성적 취향은 강요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이성애자들이 동성에 끌리지 않는 것처럼, 그들도 이성에 끌리지 않을 뿐이다. 그건 자연스러운 감정의 문제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성애를 인정함으로써 그들이 늘어날 것이라는 의견은 성적 기호를 선택의 문제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일어난다. 만약 그 말이 맞다면 그들 역시 동성애를 선택할 수 있는 셈이 된다. 물론 환경과 강요에 의해 취향이 결정되기도 하고 선택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인정은 강요가 아니다. 그들의 모습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오히려 폭압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들을 억압하고 음지에 내몰면서 그들이 일반적인 남녀간의 결혼을 했을 때 생기는 그들의 가족등의 제 2, 제 3의 피해자들을 생각해 봐야 한다. 불편하니 조용히 있으라는 식의 태도는 절대 건강한 사고방식이 아니다.

 

 

정말 동성애가 당연시 되고 인정되는 사회라면 그들이 결혼을 하든, 손을 잡고 다니든 기사화 될 일도 없고 이상할 일도 없다. 그들이 포털사이트 메인에 뜨지 않기를 바란다면 역설적으로 그들을 인정함으로써 그들의 존재 자체를 화제성 있게 만들지 않으면 된다. 그럼 그들을 사이트 메인 화면에서 볼일도 없다.

 

 

동성애자는 존재한다. 그들도 누군가의 아이들일 것이고 누군가의 친구일 것이며 사회의 한 구성원일 것이다. 만약 절친한 친구가 동성애자라면, 우리 아이가 동성애자라면 어떡할 것인가. 그 때도 그 친구와 아이에게 더럽다고 욕하고 내 눈 앞에서 당장 사라지라고 말할 것인가. 아무에게도 피해 주지 않은 개인의 취향 문제로 한 인간에게 그렇게 상처 줄 권리가 과연 누구에게 있을까. 그들이 당신에게 고백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일 것이다. 결코 동성애자들은 특별하지 않다. 그들은 어쩌면 아주 슬픈 눈으로 당신 옆에서 동성애에 대하여 불편해 하고 폭언을 일삼는 당신을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Posted by 한밤의연예가섹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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