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뜸' 하더니 [바람의 나라][바람의 화원] 등 다시 사극 열풍이 불고 있다. 요즘에야 소재도 많고, 기획력도 좋아져서 여러가지 사극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실정이지만 예전에는 '사극' 하면 몇 몇 소재와 인물들로 정해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 중에서도 조선 숙종조에 바람같이 살다 간 숙종의 총희 '장희빈' 에 관한 이야기는 시청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 중 하나다.


1대 장희빈 윤여정을 시작으로, 이미숙, 전인화, 정선경, 김혜수 등 당대 가장 뛰어난 연기력과 미모를 갖춘 여배우만 출연할 수 있다는 '장희빈' 은 그 자체로 흥행이 보장되어 있는 흥행 보증 수표라고 할 만 했다.


특히 온갖 악행을 저지르다 결국 사약을 받고 처절하게 죽는 마지막 '사약씬' 은 장희빈을 이야기 할 때 절대 빼 놓을 수 없는 명장면으로 손 꼽힌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약' 하면 장희빈을 가장 먼저 떠올릴 정도로 '장희빈이 억지로 사약을 먹고 숙종 앞에서 죽었다.' 는 것을 기정사실화 하고 있는데, 재밌는 것은 정작 실제 장희빈은 사약을 앞에 두고 그렇게 패악을 떨며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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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현왕후 승하 후에 인현왕후를 무고한 죄가 밝혀져 취선당 상궁 나인과 무당 오례, 장희빈의 올케인 숙정이 엄벌을 받은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장희빈의 죽음 역시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죄목과 관계 되었음은 분명한 일이다. 허나 지금껏 드라마에서 나온 것처럼 장희빈이 끝까지 온갖 패악을 떨다가 억지로 사약을 들이키며 죽어간 것은 절대 아니었다.


숙종 앞에서 발악을 하다가 세자(훗날 경종)의 고환을 뜯어 냈다는 이야기 또한 당시 백성들의 입과 입으로 떠돌던 야사의 한 토막일 뿐 정사(正史)는 아니다. 조선 왕조 실록에 쓰여져 있는 장희빈의 죽음은 우리가 누누이 봐 오던 장희빈의 죽음과는 상반 되게 적혀 있다. 숙종이 장희빈을 죽음의 문턱으로 끌고 간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의 생명줄을 직접 끊은 것은 숙종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 자신이었다.


숙종 35년, 9월 25일 밤. 숙종은 조정 대소신료들에게 이런 비망기를 내린다.


"옛날에 한(漢)나라 의 무제가 구익 부인(鉤弋夫人)을 죽였으니, 결단할 것은 결단하였으나 그래도 진선(盡善)하지 못한 바가 있었다. 만약 장씨(張氏)가 제가첩이라는 운명을 알아 그와 같지 아니하였다면 첩을 정실(正室)로 삼지 말라는 《춘추(春秋)》의 대의(大義)를 밝히고 법령(法令)으로 만들어 족히 미리 화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니, 어찌 반드시 구익 부인 에게 한 것과 같이 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이 경우는 그렇지 아니하였다. 죄가 이미 밝게 드러났으므로 만약 선처하지 아니한다면 후일의 염려를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것이니, 실로 국가를 위하고 세자(世子)를 위한 데서 나온 것이다. 장씨로 하여금 자진(自盡)하도록 하라."



한 마디로 장희빈에게 내린 숙종의 첫 번째 "자살 권유" 였다. 이 때 이미 장희빈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던 때였다. 인현왕후를 저주한 사건이 발각 되어 나라가 쑥대밭이 되었고, 숙종의 진노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희빈은 숙종의 첫 번째 자살 권유를 '가볍게' 무시했다. 아직 그 죄가 완전히 밝혀진 것이 아닌데다가 저주에 가담했던 올케 숙정과 무당 오례가 자백을 하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장희빈은 숙정과 오례만 '입' 을 다물어 준다면 아들인 세자를 핑계로 정면 돌파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세상일은 장희빈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철썩 같이 믿었던 취선당 상궁나인들과 올케 숙정, 무당 오례가 "모두 장희빈이 시킨 일이었다." 며 자백을 해 버린 것이다. 장희빈으로서는 청천 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인현왕후 저주사건에 대한 모든 증거를 확보한 숙종은 첫 번째 자살 권유를 한 지 일주일만에 다시 장희빈에게 '두 번째 자살' 을 권유한다.


"희빈(禧嬪) 장씨(張氏) 가 내전(內殿)을 질투하고 원망하여 몰래 모해하려고 도모하여, 신당(神堂)을 궁궐의 안팎에 설치하고 밤낮으로 기축(祈祝)하며 흉악하고 더러운 물건을 두 대궐에다 묻은 것이 낭자할 뿐만 아니라 그 정상이 죄다 드러났으니, 신인(神人)이 함께 분개하는 바이다.
 

이것을 그대로 둔다면, 후일에 뜻을 얻게 되었을 때, 국가의 근심이 실로 형언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전대 역사에 보더라도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으랴? 지금 나는 종사(宗社)를 위하고 세자를 위하여 이처럼 부득이한 일을 하니, 어찌 즐겨 하는 일이겠는가?
장씨
는 전의 비망기(備忘記)에 의하여 하여금 자진(自盡)하게 하라.


아! 세자의 사정을 내가 어찌 생각하지 아니하였겠는가? 만약 최석정(崔錫鼎) 의 차자의 글과 같이 도리에 어긋나고 끌어다가 비유한 것에 윤기(倫紀)가 없는 경우는 진실로 족히 논할 것이 없겠지만, 대신과 여러 신하들의 춘궁을 위하여 애쓰는 정성을 또한 어찌 모르겠는가?


다만 생각에 생각을 더하고 또 다시 충분히 생각한 결과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 처분을 버려두고는 실로 다른 도리가 없다. 이에 나의 뜻을 가지고 좌우의 신하들에게 유시하는 바이다."


숙종의 '최후 통첩' 이었다. 이제 장희빈에게 믿을 거라곤 하나 밖에 없는 혈육인 세자가 전부였다. 세자를 전면에 내세우고 조정 대신들에게 구명 요청을 하는 것 밖에는 딱히 대안이 없었다. 숙종의 '자살 권유' 가 떨어진지 바로 그 날 부교리 권상유 등이 "세자를 보전" 하자는 이유로 장희빈의 구명에 나섰으나 숙종은 "어림 없는 일" 이라며 허락치 않았다. 천길 낭떠러지가 바로 눈 앞에 보이는 것이 장희빈의 운명이었다.


그러나 장희빈은 쉽사리 포기하지 않았다. 30년 가까이 구중 궁궐에 살아 오면서 정치의 요체를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던 그녀였다. 세자라는 '무기' 가 있는 이상 숙종도, 조정 대신들도 감히 그녀를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버틸 수 있을만큼 버텨보고, 정 안 되면 다시 한 번 조정 대신들을 움직여 봐야 한다는 것이 장희빈의 계산이었다.


숙종의 자살 권유에도 꿈쩍 하지 않는 장희빈을 보며 조정 대신들은 다시 한 번 그녀의 구명을 요청할 수 밖에 없었다. 연산군 시절 연산의 어미인 폐비 윤씨를 구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 많은 대신들의 목이 날아간 것을 그들은 잊지 않고 있었다. 훗날 살아 남기 위해서 장희빈을 '구하는 척' 이라도 해야 했다. 권상유의 상소가 불허 된 바로 직후에 판중추부사 서문중 등이 숙종을 청대하여 다시 한 번 장희빈의 구명을 권유했으나 숙종은 또 다시 '불허' 했다.


"잔말 말고 어서 빨리 죽으라." 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숙종의 뜻이 "장희빈의 죽음" 으로 확실히 기운 것을 확인한 조정 대신들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세자의 보복이 두렵기는 했어도 아직까지 조선의 임금은 숙종이었다. 미래의 권력을 위해 현재의 권력에게 등을 돌리는 일 따위를 할 조정 대신들이 아니었다. 숙종의 완강한 뜻과 요지부동인 조정 대신들의 공론을 확인한 장희빈은 더 이상 일을 돌이키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됐다. 여러 방면으로 자신의 구명을 요청했으나 취선당에 갇혀 있는 버려진 후궁 따위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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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낱 역관의 딸로 궁에 들어와 임금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 했던 30년 세월의 허망함을 장희빈은 그 순간 깨닫게 됐다. 숙원, 숙의, 소의의 자리를 거쳐 중전 다음 자리인 '빈(嬪)' 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채 10년이 걸리지 않았고, 인현왕후를 모함하여 결국 만인지상의 짝인 '중전' 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그녀지만 죽음을 앞둔 그녀의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삼척동자도 안다는 장희빈의 위세도 임금의 불호령 앞에서는 별 것 아닌 허명이었던 셈이다.


결국 숙종의 '두 번째 자살 권유' 를 받아든지 이틀 만에 장희빈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 때 가장 사랑했던 지아비의 협박과 압박에 못 이겨 스스로 자신의 목숨줄을 잘라낼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바로 장희빈이 걸어야 할 운명이었다.
 

장희빈의 '자살'은 숙종실록 숙종 27년 10월 10일 2번째 기사에서 공식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장씨(張氏) 가 이미 자진(自盡)하였으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상장(喪葬)의 제수(祭需)를 참작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라고 적혀있으니 숙종 자신의 입으로 장희빈의 자살을 공식적으로 확인해 준 셈이다. 젊은 날 열렬히 사랑했던 여인을 죽음으로 몰고갈 정도의 비정함은 '당쟁 군주' 숙종에게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모습이다.


비록 장희빈은 드라마에서처럼 숙종 앞에서 사약을 들이키며 죽어가진 않았지만 어떤 면에서 보자면 드라마보다 더욱 쓸쓸하고 처절하게 죽은 듯 하다. 평생을 은혜했던 지아비의 입에서 떨어진 두 번의 "자살 권유" 를 이기지 못하고, 아무도 없는 취선당 골방에서 죽음으로서 죗값을 치뤄야만 했던 장희빈의 생애는 투쟁으로 얼룩진 그녀의 인생만큼이나 파란만장했고 허무했다.


훗날 사관은 장희빈을 두고 "장희빈(嬪). 아명은 옥정, 본관은 인동. 효종 10년인 기해년 9월 19일, 한미한 중인이며 역관인 장형의 딸로 태어났다. 보잘것 없는 신분에서 몸을 일으켜 만민의 어미요, 지존의 짝인 왕비의 자리에까지 올랐었으나 인현왕후가 세상을 떠난 해, 숙종 27년 10월 10일 왕비를 저주한 죄로 자진하여 죽으니 그 때 장희빈의 나이 마흔셋이었다." 라고 적고 있다.


지금 그녀의 시신은 숙종, 인현왕후와 함께 서오릉에 묻혀 있고, 위패는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와 함께 칠궁에 모셔져 있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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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산소맨 2008.09.03 16: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자살로 죽었다??? 자살했다겠지요...^^

  3. ㅂㅂ 2008.09.03 16: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자진의 의미를 오늘날 자살과 같게 보는 것은 너무 단순한 생각이라고 봅니다. 임금이 내린 약을 먹고 죽든 하사한 칼로 죽든 기록은 "자진케 한 것"으로 될것이기 때문입니다. 설령 강제로 사약을 먹여 죽여도 자진하였다고 실록에 기록될 수도 있습니다. 실록또한 주관이 개입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반항을 하며 죽음을 거부하는 것이 사극의 재미를 위해서 결정적이고 이것이 실록에 나와있지 않은 기록이라고 해서 사극과 실록이 완전히 배치된다고 할 수 없을것 같습니다.

  4. 글쎄요... 2008.09.03 16: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원래 사약을 내리는 건 죽인다는 의미가 아니라, 죄인을 존중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의미인 걸로 알고 있는데요...실제 장희빈이 사약을 거부하고 궁인들이 사약을 먹여 죽였다고 하더라도, 임금이 내린 사약을 먹고 죽은 것이므로 실록은 당연히 이를 자진이라고 기록했을 거 같은데요...실록은 공적인 기록이잖아요.

  5. 일언재길 2008.09.03 16: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용 잘 보았습니다. 다만, "평생을 은혜했던"이 걸리네요. 사랑하다의 옛 표현은 "은애"로 알고 있습니다만. 은근하게 사랑(애)하다~

  6. 지나가다... 2008.09.03 17: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나가다 한마디 합니다. 조선실록은,,, 당대 왕은 스스로 자신의 기록을 볼수 없도록 되어 있으며 후대에 수정이 불가능하도록 법으로 규정 되어 있습니다. 조선은 법치국가입니다. 다만 단종실록은 세조대에 수정된 의혹이 있고 일제시대 쓰여진 고종실록은 명백한 날조일 뿐, 대부분의 기록은 진실입니다.

  7. 지나던이 2008.09.03 17: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쓴이는 야사를 역사가 아니라고 생각하나본데.. 야사가 있어야 실록을 해석하는거다. 글쓴이의 논리라면 현재 국사편찬위원회가 아닌 곳에서 기술한 역사는 모두 역사가 아닌 것이다.
    경종이 후궁도 후사도 없었고 장희빈 사사 당일 약방에서 경종에게 약을 수차례 지어올린 기록이 승정원일기에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잡아 '뜯은건' 아니다.
    영조 때의 화재로 인조~경종대의 승정원일기가 불에 타 많은 부분이 소실됐다. 실록에 없다고 역사가 아닐 수는 없는 것이다.
    장희빈을 죽이지 말아달라는 상소는 수도 없이 많다. 숙종은 사사를 강행했다. 자기 아들이 나중에 어떻게 되던말던 자신의 정치적 성향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장희빈을 죽이고 남인을 제거하면 자기 아들 목숨은 파리목숨이 되는건 자명한 일이었지만 숙종은 서인 편이었기에 자신이 죽고나면 남인이 아닌 서인이 정권을 잡아주길 바랬다.(정책성향으로 보면 '남인'이 서인보다 훨씬 나라에 도움되는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장희빈을 죽인 것이다.
    자진을 명한 것을 '자살권유'로 엉뚱하게 해석하면 곤란하다. 왕족과 양반을 사약으로 죽이는 것은 오늘날 미국에서 약물주사로 사형을 집행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왕이 고상하게 '자진'이라고 표현하더라도 실제는 사사다. 왕이 스스로 '내가 사약을 직접 먹인'이라고 굳이 거론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경종실록 등 다른 기록엔 모두 '사사'로 적혀있다.
    그리고 세자의 보복이 두려워 사사를 반대한게 아니고 남인들이 반대한 것이다. 후에 그들은 숙종에 의해 처단됐다.

    • 지나가다... 2008.09.03 17: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도대체 어느 나라에서 야사를 정사로 인용하나요? ㅎㅎ

    • 지나던이 2008.09.03 18:35  댓글주소  수정/삭제

      글 해석이 잘 안되시나 본데.. '사관'이 아닌 '역사학자'들이 쓴 기록도 야사이자 역사입니다. 사관들의 기록만 해도 승정원일기와 조선왕조실록 외에도 많은 기록이 있습니다. 학계에서 야史를 야史라고 하는건 역사성을 어느정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한단고기 같은건 위서이므로 위서라고 합니다. 구분을 잘 하셔야겠죠.

  8. 어이구 2008.09.03 17: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숙종이 사약과 함께 장희빈에게 서신을 내렸는데 서신을 펴보니 거기에 "원샷"이라고 적혀있었다고 하는데 ... 이것도 진정 거짓말 ? 역시 한국인들은 역사왜곡에 천재네요

    • 그렇치 2008.09.03 19: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바로 그부분입니다
      그 당시 숙종이 한글이 아닌 영어로 원샷을 적었습니다
      (장씨는 배움이 적어계속 이해를 못하고 사약을 거부했지요 매우 안타까운 사실이지요
      당시 숙종이 좀더 어진 임금이고 장씨를 배려하였다면
      살작 사약을 커피잔에 담아 원샷이라 한글로 적어 주었다면 ... 흠..
      또다른 야사에는 원샷을 한글로 적어 사약과 같이 내려보냈는데
      사약이 너무 뜨거워 원샷을 할수가 없었다는 썰도 있다 하는데 ... 사약은 차게 마셔야 넘기기가 좋을텐데 쯧쯧

      쯧쯧쯧

  9. 참내 2008.09.03 17: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황당해서 글 올립니다. 경종 성기를 잡아당겼다는 이야기, 그로 인해 불임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는 백성들 사이에 떠돌던 야사의 한토막?이 아니고 유생 이문정이 쓴 <수문록>에 기록된 역사입니다. 수문록은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10. 신보옹승 2008.09.03 18: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수문록은 노론의 입장에서 서술한 당쟁사입니다. 장희빈이 경종의 고환을 잡아당겼다는 이야기는 신빙성이 없는 아주 고약한 자들에 의하여 지어진 얘기임이 틀림없습니다. 장희빈이 죽음을 맞이할 때 숙종은 세자(경종)과의 접촉을 엄금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한을 풀어줄 유일한 한 점 혈육이 세자인데 그걸 모를만큼 장희빈은 어리석지 않았습니다.

    • 행인 2008.09.03 20:09  댓글주소  수정/삭제

      장희빈이 죽으면 어차피 경종도 죽은 목숨이었죠. 장희빈이 그걸 몰랐을리가 없고, 어떻게든 죽지않고 살아서 아들을 보호하려고 했던거죠. 잡아당겨서 불임이 된건지 단지 아이가 잘 안생겼던 것 뿐인지 잡아당긴것과 상관없이 불임이 된건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부인이 불임이었을 수도 있구요. 수문록에서도 단지 혹시 장희빈 사사 사건 때 있었던 불미스런 일로 인해서 불임이 된 것은 아닐까하고 추측할 뿐이지요. 수문록의 저자는 숙종~영조 때의 사람이고 수문록은 영조 초년에 쓰여진 기록입니다. 장희빈의 사사 사건을 직접 겪었던 사람이므로 '고약한 사람'으로 단정짓기엔 무리가 있지요.

  11. 잘봤습니다! 2008.09.03 18: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봤습니다. 재밌는 이야기네요.
    저도 언젠가 장희빈이 자진해서 죽었다는 이야기를 선생님께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아요. 이렇게 다시 읽게 되니 더욱 재밌군요.

  12. --;;; 2008.09.03 18: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자진의 의미를 모르시는 듯....칼 던져주고 죽어라, 사약내리고 죽어라...그게 자진입니다.
    그런데 장희빈은 자진을 거부해서 억지로 먹였습니다. 당근 숙종이 직접 먹인건 아니구요--;;;
    밑에 애들 시켜야죠~

  13. 쩝쩝 2008.09.03 18: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서인쪽에서 기록을 대부분 했으니 장희빈에 관해 좋을리가 없죠. 그리고 잡아뜯었다는건 난 솔직히 안믿음. 그만큼 어리석은 여자가 아닐거 같네요. -_-; 오히려 이복형제인 영조가 어케 했다는 소문도 있지요. 어차피 죽고없어진 장희빈탓으로 경종이 후사도 없이 일찍 죽었다라고 씌운건 아닐까 뭐 그런 생각도 들던데..? 어디까진 인현왕후편에 있던 사람이고 실제 기록에도 그쪽 사람들이 참여헀으니... 뭐 사실 그 시대로 안가보고선 모를일이지만... 적어도 그자리까지 올라갔던 여자라면 끝에 권력에 눈먼 여자라 해도 자기 유일한 후사인 경종을 그케 끊었을리가 없지싶네요.

  14. 글쎄a 2008.09.03 20: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장희빈과 인현왕후에 관한 거에 관심이 많은 1인으로써, 자진이라는 ..님의 글은 이해하기 어렵네요..실록이나 인현왕후전을 자주 본 저인데..자진이란건 제가 여태 못본거같은데 말이죠..

  15. 청산 2008.09.03 20: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자살해 죽든 사약마셔 죽든 뭐가 그리 중하냐 죽은게 중요하지.
    조선=이조다 이씨조선 개판인 나라에 이조 창시자인 이성계 조상이 중국인라고 하던디 뭐가 좋다고 울나라는 경상도 신라와 이조가 망해 먹었다 이들이후 떼국놈치하, 쪽바리 식민지로 됐잤나

  16. 장희빈 영혼 2008.09.03 20: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는 그들과 같이 누워 있고 싶지 않아... 제발 이장해줘... 그럴것같다. 세분 다 서로서로.

  17. 재밌긴한데.. 2008.09.03 21: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지막에 어떻게 (은장도인지..사약인지. 목을 매었는지) 자살했다는 이야기가 없네요.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죠. 사약이라면 자살은 아닌듯..은장도라면 모를까...역시 낚인글인듯...

  18. 김전일 2008.09.03 22: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임금이 자진케 하라 명하였는데..., 반항하며 패악을 부리다 억지로 사약을 들이켜 죽은 후, 전해올리기를 "이미 자진하였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이미 임금이 내린 사약을 먹구 죽은 것을 자살이라고 하지는 않음... 여튼...잘 보았습니다.

  19. 자살이라뇨? 2008.09.04 10: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왕이 죽으라고 약 내린 것을 자기손으로 마시면 자살인가요? -_-;;; 일단 사형선고는 내려졌고, 집행의 최종단계만 직접 한 것일 뿐인데, 이게 자살인가요? 그럼 조선시대 왕이 내린 사약받고 자기 손으로 마셔서 죽은 사람들은 다 '자살'인가요? 그런 걸 자살이라고 하진 않습니다.

  20. 또 띄엄띄엄보고 소설쓴다.. 2008.09.08 17: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미 자진하라고 명을 내린 자체가 사형선고죠.. 그걸가지고 자살이라고 하면 억지밖에 안되죠.. 또 실록상에는 사약을 내린 후 신하들이 그를 반대하였으나, 끝까지 사약을 내리는 것으로 밀어붙였었는데.. 뭔놈의 자살??

  21. Favicon of http://www.unny.com BlogIcon montreal florist 2010.04.22 04: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죄명이 저주라는건 좀 지금보면 죽기까지 할 죄정도는 아닌 듯 싶네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