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사이트 메갈리안에서 제작한 티셔츠에 적힌 "Girls do not need a prince." 라는 문구는 공감보다는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 티셔츠를 입은 성우의 SNS 인증사진이 논란이 되며 게임업체로부터 계약해지를 당했고, 그에 동조하는 뉘앙스의 멘션을 SNS에 올린 웹툰 작가등도 테러 수준의 비난을 받았다. 

 

 

 



'일간 베스트(일베)'에 쏟아지는 시선만큼이나 부정적인 시선이 메갈리안에도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페미니즘'을 표방하는 사이트지만 페미니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주도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어째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

 

 

 



단순히 성별로 규정된 소모적인 싸움, 그 싸움으로 대체 무엇을 얻었나.

 

 

 


 
메갈리안이 채택한 방식은 이른바 '미러링'이다. 일베등의 사이트에서 보이는 여성혐오와 편협하기 짝이 없는 편가르기등을 그대로 적용하여 자신들의 행동을 돌아보게 하자는 것. 그러나 그 미러링은 단순한 수단이 아닌 메갈리안의 본질이 되었다. 그들은 남성에게 폭언을 퍼붓고 날카롭게 공격하는 것을 정의로 규정한다. 여성들의 승리가 남성을 굴복시키는데서 온다고 믿는 것이다. 일베와의 차이점을 느낄 수 없는 부분이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성별' 자체를 적으로 규정하고 싸우는 경우의 사례를 찾기는 힘들다. 단순히 '여성'이기 때문에, 혹은 '남성'이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잘못된 행동을 저지르는 무리로 분류하는 것은 굉장한 오류다. 동성 집단에서도 얼마든지 크고 작은 사고는 일어난다. 남성이 다른 남성에게 폭언을 퍼부었다고 해서, 남성이 남성을 싫어하는 감정을 정당화하거나 여성이 다른 여성에게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여 동족혐오의 감정을 당연시 하지는 않는다. 그만큼 우스운 일도 없기 때문이다.

 

 

 



남성들의 경우 대부분 직장 상사나 군대내부의 선임들에게 입는 피해는 같은 남성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여성들의 경우 역시 끊임없는 갈등의 화두는 시누이나 시어머니 같은 '시댁 식구들'이다. 그들이 갈등을 일으키는 '불합리함'의 대상은  같은 여성이다. 이런 일부 사례들을 확대시켜 남성은 남성을 혐오해야 하고, 여성은 여성을 혐오해야 한다는 프레임을 씌운다면 동의할 여성이나 남성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 바로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해서 자행되는 황당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나 우습게도 그들의 '여혐' '남혐' 프레임은 서로를 갈망하는데서 온다. 된장녀나 김치녀같은 비하 발언을 들여다보면 그 말의 본질은 여성과의 데이트나, 사귐에 대한 이야기다. 이성간의 관계에서는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그 관계에 대한 호기심이 없었다면 이런 단어가 생길리 없었다. 이에 대항하는 '한남충' 같은 단어들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 메갈이 표방하는 '왕자가 필요하지 않다'는 문구 역시 역설적으로, '왕자라는 로망'을 꿈꾸는데서 나온다. 대부분 그들의 발언들은 서로가 선택한 '연인'이나 '배우자'에 대한 실체없는 편견으로부터 비롯된다.

 

 

 



서로 그렇게 싫다면 독신주의를 고수하고 연애따위는 안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은 서로를 완전히 무시하지 못하고 성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이용'해야 하는 대상으로 폄훼한다. 결국 서로를 완전히 놓아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가 증오스럽다면 안봐야 정상인데, 여전히 남성은 예쁘고 매력적인데 착하기까지한 여성과의 관계를 원하고, 여성들은 자신에게 헌신할 멋진 남성에 대한 판타지를 버리지 못한다. 그런 판타지를 충족시키지 못하니 서로 비난하면서도 끊임없이 서로를 갈구하는 것이다.

 

 

 



남성뿐 아니라 여성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진정한 '페미니즘'에 관하여

 

 

 

 


 
영화 <히든 피겨스>는 숨겨진 숫자와 숨겨진 인물이라는 중의적 표현을 가진 제목을 사용했다. 이 영화는 잘 알려졌다시피 '페미니즘'에 관한 영화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단순한 페미니즘이 아니다. 여성과 남성의 차별도 물론 있지만 가장 본질적인 것은 '피부색'에 대한 차별이다. 영화는 1926년, 한 흑인 소녀의 대사로 시작한다. 단순히 숫자를 나열하는 것 같지만 그 소녀는 소수를 찾고 있다. 천재소녀 캐서린 콜먼(타라지 p. 헨슨 분)은 수학과 계산에 있어서 천재적인 지능을 타고난 흑인 여성이다. 시간은 흐르고 1961년이 되어 40대가 된 캐서린은 최첨단을 달리는 '나사'에서 일한다. 당시 흑인여성으로서는 굉장한 특혜다. 그러나 캐서린을 비롯해 그의 친구 두 명, 도로시(옥타비아 스펜서 분)와 메리(자넬 모네 분)는 흑인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질 수 없다. 

 

 

 



같은 여성이라도 백인 여성은 관리직에 있지만, 흑인 여성은 관리직을 맡은 전례는 없다는 영화속 배경은 차별의 지점이 여성보다는 피부에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유는 없다. 단지 그것이 당연한 관례였기 때문이다. 흑인은 백인보다 우월할 수 없다는 인식. 지금 그런 말을 들으면 황당하지만, 그 당시엔 그런 사고방식이 통했던 것이다. 마치 남자와 여성의 편을 가르고 단순한 성별로 규정지어 서로를 물어뜯는 '이성혐오' 세태와도 닮아있다. 물론 영화속 현실은 사회적으로 그런 사고방식이 통용된다는 점에서 그보다 훨씬 더 심각한 수준이다. 

 

 

 

 



흑인 여성이라는 위치에 놓인 그들은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대놓고 그들에게 대들거나 싸울 수 없다. 꼭 그런 극단적인 방법이 아니라도 정당한 이의제기조차 묵살 당한다. 백인들과 식당은 물론 화장실도 나뉘어져 있다는 것은 지금 보면 참으로 이상하지만 그 당시에는 당연한 일이었다. 뛰어난 기하학 실력을 바탕으로 운좋게 백인들의 일터에서 계산하는 임무를 맡게 된 캐서린은 처음부터 동물원의 원숭이 구경하듯 보는 경멸적인 시선을 견뎌야 한다. 그러나 역시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화장실이 어디냐고 묻지만, "미안하지만 너희가 사용하는 화장실이 어딘지는 나도 모른다."는 차가운 대답만 돌아온다. 결국 화장실 한 번을 가기위해 캐서린은 800m 떨어진 건물을 오가야 한다. 하루에 40분이라는 시간을 써 가면서.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하는 커피 주전자 옆에는 'colored(유색인종)'라는 딱지가 붙은 작은 주전자가 새로 생긴다. 캐서린이 그 커피포트를 사용하는 것조차 못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캐서린은 그 모든 차별을 받아 들여야 한다. 스스로 그 구조를 바꾸기엔 그는 너무나도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기 때문이다. 천재적인 능력만으로는 그 편견을 깨뜨릴 수 없는 것이다. 일하는 중에도 그는 데이터의 절반을 펜으로 가린 자료를 받아야 한다. '기밀사항'은 흑인 여자에게 함부로 공개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계산이 불가능한 상황이지만, 캐서린은 그 상황도 받아들인다. 행간을 읽어 자료를 분석하고 결국 계산까지 해낸다. 이 일로 상관인 알 해리슨(케빈 코스트너 분)의 신임을 얻게 된 캐서린은 결국 정당한 자료를 넘겨 받을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첫 번 째 포인트가 있다.

 

 

 


 


캐서린을 비롯한 도로시, 메리는 모두 벽에 가로 막힌다. 도로시는 관리자 역할을 도맡아 하지만, 관리자가 될 수 없고 메리는 엔지니어 트레이닝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들이 일을 해결하는 방식은 부당한 현실에 대한 분노나 절망이 아니다. 그들은 그 현실 속에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낸다.

 

 

 



캐서린은 완벽한 계산으로 신뢰를 쌓고, 도로시는 시대의 변화를 감지하여 새로운 IBM전산기기의 사용법을 익힌다. 메리는 자신이 엔지니어가 되기 위해 필요한 수업을 듣기 위해 재판을 신청한다. 비가 오는 날, 화장실에 다녀오다 쫄딱 젖은 캐서린이 "어디갔다오냐"는 상관의 말에 "여기는 내가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이 없다."며 절규하는 장면은 그가 얼마나 훌륭하게 자신의 역할을 해냈는지를 알기 때문에 가슴에 와닿을 수 있다. 화장실의 '유색인종' 간판을 때려 부수는 알 해리슨은, 캐서린이 어떻게 그들을 감화시켰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페미니즘은 단순히 '여성'의 인권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히든 피겨스>는 여성이나 남성이라는 존재가 아닌 '피부색'을 주제로 페미니즘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성별이나 피부색, 어떤 기준으로든 서로를 구분짓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동등하고 가치있는 존재로서 인간을 대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바로 진정한 '페미니즘'에 대한 고찰인 것이다.

 

 

 



"내 피부색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판사님은 최초가 되실 수 있습니다."

 

 

 

 



 
밖에서는 여전히 흑인들에 대한 차별 철폐 시위가 이뤄지고 있지만 <히든 피겨스>의 주인공들은 백인들을 적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주어진 상황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간다. 엔지니어가 되기 위해 백인 남자만 듣는 수업을 들어야 하는 메리는 '안된다'는 세상의 편견에 지지않는다. 그러나 폭력적으로 맞서는 것이 아니다. 법정에서 메리는 말한다.

 

 

 



"나사의 엔지니어가 되기 위해서는 백인들의 학교에 가야합니다. 저는 제 피부색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건 제가 선택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그러나 판사님이 도와주신다면 할 수 있습니다. 이곳서 오늘 벌어지는 모든 심리중에 어떤 것이 100년 후 가장 중요하게 평가 받을까요. 어떤 것이 판사님을 최초의 판사로 기억되게 할까요."

 

 

 



판사 앞에서의 메리의 연설은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전례는 없다. 그러나 최초가 되겠다. 혼자서는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당신이 힘을 보태준다면 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신도 최초가 될 수 있다.

 

 

 



그는 판사에게 지금 닥친 현실의 부당함과 분노를 쏟아내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할 일. 그리고 그것에 필요한 판사의 도움과 그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 했을 뿐이다.  결코 그 현실에 굴복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또는 다른 사람을 상처 입히지 않고도 그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현실을 극복해 냈다.

 

 

 



우리는 부당한 일을 겪으면 벌어진 일들에 대해 분노한다. 분노해야 할 상황에서 분노는 당연한 것일 수 있지만, 그 이후의 태도를 어떻게 갖느냐는 우리의 선택일 수 있다. 그러나 가끔은 너무나도 쉽게 나와 다른 상대방을 적으로 규정하고 부당한 상황을 만든 사회를 원망하고 분노를 위한 분노로서 감정을 남겨두진 않는지 않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물론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벌어진 일을 과장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성숙한 태도다. 그러나 그 안에서 절망하느냐, 한 걸음 더 나아가느냐는 우리의 선택이다.

 

 

 



여성에 대한 차별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남성을 적으로 규정할 필요는 없다. 같은 맥락으로 유리천장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사회를 적으로 규정해서도 안 된다. 이 모든 편견과 역경에 맞서 싸우는 것은 누군가를 꼭 상처 입혀야만 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 상황 속에서도 할 수 있는 것을 찾고, 결코 포기하지 않으면 적어도 나를 둘러싼 세상은 바뀔 수 있다. 여성에 흑인이었던 그들이 나사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비난하는 것은 너무 쉽다. 현실에 굴복하는 것에 대한 좋은 핑계가 되기 때문이다. 남혐, 여혐에 대한 설전이 오가는 것 역시, 다른 이들을 규정하고 판단할 근거 뒤에 숨으면 자신의 책임은 없어지니 얼마나 편리한가. 진정으로 성숙한 사람이라면 이 시대의 현실을 부정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 현실에 대한 비난 뒤에 숨은 자신을 정당화 하지도 않는 법이다. <히든 피겨스>의 숨겨진 사람들이 포기하지 않는 것처럼, 포기하지 않고 똑바로 현실과 마주선채, 자신의 길을 간다면 그들의 세상이 바뀌고 결국에는 그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비난을 멈추고 자신이 가진 고유의 아름다움을 인정할 때 나오는 엄청난 힘은 이 험난한 세상도 설득시킬 수 있는 강력한 것인지도 모른다.
Posted by 한밤의연예가섹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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