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을 잃었는데 아들까지 잃겠습니까. 그 때의 아픔을 다시는 되풀이 하지 않을겁니다."


[이산] 의 '혜경궁 홍씨' 는 남편을 잃은 슬픔을 되풀이 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이산] 속 혜경궁의 모습은 강인한 어머니이자 자애로운 부인이고, 당파에 남편을 잃고 아들까지 잃을 뻔한 비운의 여인이다. 그러나 역사 속 혜경궁의 모습은 과연 그러할까. 드라마 [이산] 이 벗기지 못한, 아니 어쩌면 벗기지 않은 혜경궁 홍씨의 '참모습'. [한중록] 으로 만들어 진 혜경궁의 가면을 벗겨보자.





남편을 버리다.


영조 20년 1월 9일. 열살의 '세자빈' 을 앞에 두고 장차 임금의 장인이 되는 홍봉한이 입을 열었다. "궁중에 들어가면 3전 섬김을 삼가고 조심해 효성으로 힘쓰고 동궁 섬김을 반드시 옳을 일로 돕고, 말씀을 더욱 삼가해 집과 나라에 복을 닦으소서." 어린 세자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집과 나라에 복을 닦으라." 라는 아버지의 당부를 가슴 깊이 새기고 어린 세자빈은 구중궁궐 속으로 들어갔다. 바로 이 사람이 영조와 정조, 순조의 시대를 관통한 여인, 혜경궁 홍씨였다.


이렇게 '집의 복을 닦으라.' 는 아버지 홍봉한의 말 한마디는 혜경궁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백두의 처지였던 홍봉한이 하루 아침에 세자의 장인이 되고, 숙부인 홍인한이 세도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면서 혜경궁은 자신의 가문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노론 명가로 일어나기 시작한 풍산 홍씨 가문을 위해 혜경궁은 나라와 남편과 자신을 모두 갖다 바쳐야 했다. 그것이 아버지의 성공이자, 숙부의 성공이었고 곧 자신의 성공이기도 했다.


'삼종(효종-현종-숙종)의 혈맥' 을 잇는 단 하나의 혈육, 그리고 장차 왕통을 이어나가야 할 사도세자와 세자빈 홍씨는 겉으로 보기엔 '최고의 결합' 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결합은 조선 최고의 비극을 불러 일으킬 수 밖에 없는 모순된 결합이었다. '소론' 을 지지하는 세자와 '노론' 명가의 세자빈은 섞일래야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 같은 사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남편을 바라보며 혜경궁은 남편을 버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 에서 사도세자와 영조의 사이가 처음부터 좋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사도세자의 정신병이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불편한 몸을 치유하러 나간 온양 행궁에서조차 백성들의 찬사를 받을 정도로 '멀쩡한' 인물이었다. 사도세자가 혜경궁의 말처럼 그저 '미치광이' 에 불과한 정신병자였다면 영조가 10여년 동안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길 생각은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허나 혜경궁은 이상하게도 '일관되게' 사도세자 정신병자설을 고집했다.


혜경궁은 남편의 원대한 꿈을 가장 지척에서 지켜보았다. 사도세자의 꿈은 '노론정권' 을 뒤집어 엎고 새로운 '소론정권' 을 세우는 것이었다. 썩을대로 썩어버린 노론의 뿌리를 뽑아버리고 자신을 지지하는 소론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치 역학구도를 구상하는 사도세자의 꿈은 혜경궁에게 자신과 자신의 가문을 위협하는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결국 그녀는 사도세자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노론의 '스파이' 로 활약하기로 결심했다. 사도세자의 일거수 일투족은 혜경궁의 입을 통해 궐 밖으로 빠져나갔고 노론은 혜경궁의 도움에 힘입어 사도세자 제거라는 무시무시한 음모를 아무렇지도 않게 꾸밀 수 있었다.


사도세자의 가장 큰 비극은 바로 이것이었다. 자신이 가장 믿고 의지해야 할 부인이 자신이 아닌 가문을 택했다는 처참한 상황에 영조의 어린 부인인 정순왕후 김씨가 가세하면서 사도세자의 입지는 더더욱 궁색해졌다. 사도세자는 노론이라는 강적이 밖에서 둘러 싸고 있는 위급한 형국에서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의 아들까지 낳은 부인 혜경궁과 법적인 어머니 정순왕후, 생모인 영빈 이씨 모두 바깥에서 이뤄지는 '사도세자 제거 음모' 에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베겟머리 송사가 송사 중에 으뜸' 이라는 말처럼 그렇게 사도세자는 안에서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바깥과 안에서 함께 이루어지는 공격에 영조와 사도세자는 돌이킬 수 밖에 없는 강을 건넜다. 이것은 혜경궁 역시 마찬가지였다. 운명의 그날, 사도세자는 혜경궁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내 목숨이 그 날 마칠 것도 스스로 염려하여 세손을 경계 부탁하고 왔었는데 동궁(사도세자)께서는 생각과 다르게 나더러 하시는 말씀이 '아무래도 이상하니 자네는 잘 살게 하겠네. 그 뜻들이 무서워." 하시기에 내가 눈물이 드리워 말없이 허황해서 손을 비비고 앉았더니, 이 때 대조(영조)께서 휘령전으로 오셔서 동궁을 부르신다는 전갈이 왔더라.』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혜경궁을 향한 사도세자의 원망어린 발언이다. 지금의 말로 풀자면 "나는 죽는데 이상하게도 너는 살 것 같으니 너의 뜻이 참 무섭다." 는 한탄이었다. 이어서 사도세자는 혜경궁에게 이런 말까지 남긴다. "자네가 참으로 무섭고 흉한 사람일세. 자네는 세손 데리고 오래 살려 하기에 오늘 내가 나가서 죽겠기로 그것을 꺼려 휘향을 내게 안 씌우려는 그 심술을 알겠네."


'나는 죽는데 너는 안 죽으니 이상하다.' '참으로 무섭고 흉하다' '내 아들을 데리고 혼자 오래 사려고 한다' '심술이 가득하다' 는 폭언은 10여년 넘게 자신과 함께 살아 온 부인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서슴없이 혜경궁에게 그런말을 퍼부었다. 운명의 그 날, 사도세자도 혜경궁도 사도세자가 영조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이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편을 제거할 수 밖에 없는 혜경궁과 부인의 가문에 의해 죽임을 당해야만 하는 사도세자, 그들의 만남은 처음부터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는 비극적 결합이었던 것이다.






아들의 즉위를 방해하지 마라.


모두가 알다시피 사도세자는 영조의 명에 의해 뒤주 속에 갇혀 아사했다. 온 몸이 굳고, 손톱이 다 빠질 정도로 뒤주 속에서 고통의 시간을 지냈던 사도세자는 대처분 8일만에 목숨을 잃었다. 그 시간 세자의 장인이었던 홍봉한은 뱃놀이를 떠나 있었고, 혜경궁 홍씨는 그런 아버지에게 사도세자를 도운 인물이 소론 영수 조재호임을 고해바쳤다. 사도세자의 죽음과 상관없이 그렇게 혜경궁은 자신의 가문을 위해 성심을 다했다. 자신의 가문을 위한 충성의 반 만큼만 혜경궁이 사도세자에게 신경을 썼더라면 사도세자는 아마 그런 식으로 비명에 횡사하진 않았을 것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바로 사도세자를 죽인 '뒤주' 가 세자의 장인이자 혜경궁의 아버지인 홍봉한에 의해 역사 속에 등장했다는 것이다. 훗날 뒤주라는 단어를 꺼내기도 힘들어 '일물(一物)' 이라고 불리는 이 뒤주는 홍봉한이 직접 영조에게 귀뜸해 대처분 현장속으로 들여 놓았다. 그러나 혜경궁도, 홍봉한도 이 뒤주의 실체에 관해서는 조금의 말도 꺼내지 않았다. [한중록] 에서 볼 수 있듯 혜경궁은 그 처참한 현장을 지척에서 목격한 듯 구구절절한 변명만을 꺼내 놓을 뿐이다.


그렇게 노론의 '대처분' 은 사도세자를 제거하는 것으로 대단한 성과를 얻었다. 혜경궁은 남편의 죽음으로 인해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혜경궁의 착각이었다. 사도세자를 죽인 마당에 노론이 사도세자의 아들, 세손까지 죽이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연산군의 비극에서 볼 수 있듯 세손이 살아 있는 세상은 노론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다. 결국 노론은 사도세자에 이어 '세손' 까지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이른바 '택군의 정치' 였다.


"남편을 죽였으니 아들도 죽여라." 노론이 혜경궁에게 요구한 것은 바로 이 한가지였다. 허나 혜경궁은 차마 아들까지 버릴 순 없었다. 혜경궁은 노론과 가문의 '세손 제거 결정' 에 누구보다 강력하게 반발했다. 예상 외로 거센 혜경궁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노론은 세손을 제거해야만 했다. 사도세자가 자신들의 손에 의해 죽은 이상 어차피 세손과 노론은 한 하늘을 같이 이고 있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여기서 등장한 것이 바로 혜경궁의 숙부 '홍인한' 이었다. 혜경궁의 남편인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앞장 선 것이 아버지 홍봉한이고, 혜경궁의 아들인 세손을 죽이는데 앞장선 것이 숙부 홍인한이라는 사실은 남편이 아닌 가문을 택한 혜경궁의 모순이었다. 사도세자 제거 음모와 달리 혜경궁은 가문의 일에 조금도 협조하지 않았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 넣었던 것처럼 세손을 살릴 수 있었던 것도 오직 혜경궁과 영조 뿐이었다.


영조 51년, 영조는 백관들을 불러 놓고 "어린 세손이 노론-소론-남인-소북을 알겠는가? 국사와 조사를 알겠는가? 병조 판서와 이조 판서를 누가 할만한지 알겠는가? 나는 어린 세손에게 그것들을 알게 하고 싶으며 또한 그것을 보고 싶다." 며 사실상 양위 의사를 밝혔다. 이는 노론에게 용납될 수 없는 '청천벽력' 과 같은 하명이었다. 영조의 이 질문에 가장 먼저 대답한 사람이 바로 혜경궁의 숙부 홍인한이었는데 그 대답이 그야말로 명언(?)이었다.


"동궁은 노론이나 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조 판서나 병조 판서를 누가 할 만한지 알 필요가 없으며, 더욱이 국사나 조사도 알 필요가 없습니다." 즉, 세손은 나랏일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알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이는 세손이 절대 임금의 자리에 오를 수 없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즉위를 막고야 말겠다는 노론의 강인한 의지가 담긴 한 마디였다.


홍인한의 이 발언은 훗날 홍인한 몰락의 가장 큰 원인이 되는데 현장에서 들은 영조와 세손 역시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영조는 "참으로 흉하다. 어찌 국사를 함께 논하겠는가." 라며 자리를 빠져나갔고 숙부의 기가막힌 발언을 들은 혜경궁은 숙부에게 "세손의 즉위를 방해하지 말라." 라는 경고문을 발송했다. 홍인한이 이 편지를 받고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나와있는 바가 없으나 아마도 콧방귀를 뀌지 않았을까.


그러나 혜경궁 자신조차 용납할 수 없는 이 발언을 30년이 흐른 뒤 혜경궁은 [한중록] 에서 충성심 어린 발언으로 뒤바꿔 조작해 놨다. 세손이 이 세가지를 모두 안다고 대답하면 영조가 "내가 그리 금하는 당론을 세손이 안단 말이냐?" 라며 역정을 낼까 두려워 홍인한이 구구하게 변명했다는 것이다. [한중록] 의 이 구절을 보다보면 끝끝내 자신의 가문을 버릴 수 없었던 혜경궁의 처지가 절절하게 드러나 보여 한스럽기까지 하다.


이처럼 노론의 세손제거 공작은 대담하고 치밀했다. 다만, 다행인 것 한 가지는 노론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세손의 운명을 결정지을 결정권자 '영조' 가 세손을 지켜냈다는 것이었다. 영조는 삼종의 혈맥의 유일한 종손인 세손을 버릴 수 없었다. 아들의 처참한 죽음과 며느리의 간청을 지켜보며 영조는 끝내 세손에게 자신의 왕위를 물려주었고, 세손은 1777년 조선조 제 22대 왕이 된다. 바로 '명군' 정조의 탄생이었다.





자신의 아들이 무너뜨린 자신의 가문.


정조가 무사히 즉위할 수 있었던데에는 영조와 혜경궁 홍씨의 힘이 지대했다. 정순왕후 김씨를 위시한 외척가문의 발호와 풍산 홍씨 집안의 음모는 혜경궁에 의해 일차적으로 차단됐고, 영조에 의해 최종적으로 마무리됐다. 남편은 버려도 아들은 버리지 못했던 한 어머니의 절절한 모성이었다. 훗날 혜경궁은 자신의 가문을 지키기 위해 다시 한 번 온 몸을 내 던지지만 적어도 정조의 즉위에 있어서만큼은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죽음, 정조의 즉위로 이어지는 비극은 끝나지 않는 비극이었다. 사도세자 제거가 새로운 비극을 불러 일으켰던 것처럼 정조의 즉위는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었다. 정조의 즉위 일성은 노론에게도, 혜경궁에게도 가슴 철렁한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아!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이것이 바로 임금이 된 정조의 첫 마디였고 혜경궁은 그 발언과 함께 자신의 가문이 무너지리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 빠르게 직감했다. 혜경궁의 예상처럼 정조의 '복수' 는 처절하게 감행됐다. 자신의 즉위를 방해했던 정순왕후 가문은 풍비박산 났고, 노론의 주요 대신들이 귀양길에 올랐다. 정조의 조용한 '복수' 의 마지막 타겟은 당연히 '세손은 아무것도 알 필요가 없다' 던 혜경궁의 숙부 홍인한이었다. 자신의 아들이 자신의 가문을 무너뜨리는 모습을 보면서 혜경궁이 받은 충격은 더할 나위 없이 컸다.


혜경궁이 정조의 '복수' 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이라곤 '단식투쟁' 밖에 없었다. 정순왕후 김씨가 오라비를 살리기 위해 단식을 감행한 것처럼 혜경궁 역시 아버지와 숙부를 살리기 위해 단식을 감행했다. 혜경궁의 단식 때마다 정조는 "아! 내가 있는 것은 곧 자궁(혜경궁)의 덕이니 어찌 자궁의 뜻을 거스르겠는가!" 라며 탄식했다. 홍봉한과 홍인한을 죽이는 순간 사도세자에게는 효도가, 혜경궁에게는 불효가 되는 것 역시 정조가 처한 딜레마라면 딜레마였다.


정조조에 이르러 풍산 홍씨 가문은 완전히 몰락했다. '망국동에 망정승' 이라고 불리던 홍봉한-홍인한 형제는 위풍당당한 위세에도 불구하고 손자에 의해 귀양길에 올랐고, 끝내 부활하지 못하고 비참한 생을 마감했다. 혜경궁으로서는 가슴을 칠 수 밖에 없는 통탄이었으나 대 놓고 불평할 순 없었다. 이미 혜경궁이 살고 있는 나라 조선은 풍산 홍씨의 나라가 아닌 '정조의 나라' 였기 때문이었다.






아들의 죽음을 바라보며 가문의 부활을 꿈꾸다.


혜경궁은 '가문의 부활' 을 23년 동안 꿈꿔왔다. 그러나 아들이 살아 있는 한 가문은 부활할 수 없었다. 아들이 임금이면서 자신의 가문은 몰락한 이 현실은 혜경궁 스스로 남편이 아닌 가문을 택한 것으로 자초한 일이었다. 혜경궁은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가문의 부활을 곱씹었다. 그렇게 혜경궁이 꿈 꾼 '가문의 부활' 은 예상치 못하게 빨리 다가오고 있었다.


1800년 정조 24년 6월 28일, 종기로 투병 중이던 정조를 둘러싸고 치료상의 난맥이 드러난다. 정조 스스로 의학 지식이 뛰어난 군주였고 궁중 의원들이 즐비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조의 치료는 쉽사리 이뤄지지 못했다. 바로 정조의 최대 정적 중 한명이었던 정순왕후 김씨가 정조의 치료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기 대문이다. 궁중의 한낱 아녀자로서 임금의 치료에까지 간섭하는 것은 불경에 가까운 파격이었으나 노론 대신들은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이른바 '정조 독살설' 의 서막이었다.


정순왕후는 정조의 병세가 선조 병술년의 증세와 비슷하니 성향정기산이라는 탕약을 올려야 함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더욱 우스운 것은 정순왕후의 하달을 당시 도제조 이시수가 그대로 따랐다는 것이다. 의학 지식이 없는 아녀자의 말 한마디에 임금의 치료가 우왕좌왕 하는 우스운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여기에 더 나아가 정순왕후는 내시를 데리고 정조의 안색을 살피겠다며 직접 대전에 발을 들여 놓기까지 했다. 말할 나위 없이 사태가 급박했다.


사태의 급박함을 먼저 알아차린 것은 누구보다도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이었다. 정조가 죽어야 가문을 살릴 수 있는 처지였음에도 혜경궁은 아들과 가문을 맞바꿀 정도로 비정한 어머니가 아니었다. 정순왕후가 대전에 들어간다는 소식을 듣곤 혜경궁은 그 즉시 "동궁이 방금 소리쳐 울면서 나아가 안부를 묻고 싶어하므로 지금 함께 나아가려 하니 제신은 잠시 물러나 기다리도록 하시오." 라는 전교를 내리고 대전으로 향했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처럼 외간의 대신들은 혜경궁의 얼굴을 직접 대면할 수 없었으므로 잠시 물러났고 정조를 둘러싼 노론 대신들의 방어벽은 혜경궁에 의해 다시금 허물어졌다. 혜경궁은 동궁을 데리고 정조의 안색을 살피기 위해 대전에 들어갔다. 정순왕후 김씨와 혜경궁 홍씨, 정조를 죽여야 하는자와 살리고자 하는 자의 밀고 당기는 기 싸움이었다. 다만,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혜경궁이 대전에 오래 머무르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정조의 안색을 살핀 혜경궁은 자전과 함께 처소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정순왕후를 견제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 안심하기엔 그 시간이 너무 짧았다.


결국 혜경궁이 처소로 돌아간 뒤 정순왕후는 다시 한 번 정조의 치료 전면에 등장했다. "내가 직접 받들어 올려드리고 싶으니 경들은 잠시 물러가시오." 라는 명과 함께 방 안에는 정조와 정순왕후, 단 둘이 자리잡았다. 투병 중인 임금과 그 임금을 죽여야만 사는 대비의 운명은 그렇게 결정지어졌다. 잠시 뒤 방안에서는 정순왕후의 곡소리가 들렸고 정조의 임종을 지켜본 것은 정조를 낳은 혜경궁도, 부인인 효의왕후도 아닌 정조의 최대 정적, 정순왕후였다.





끝내 가문을 버리지 못했던 혜경궁 홍씨.


정조 사후, 어린 순조를 대신해 대왕대비인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했다. 정순왕후는 집권하자마자 자신의 가문을 살리는데 최대한의 노력을 기하는 한편 혜경궁 홍씨의 동생 홍낙임을 사사하는 등 풍산홍씨 가문에는 잔혹한 대처분을 내렸다. 외척은 자신의 집안 하나면 된다는 정순왕후의 철저한 개인주의는 다시금 혜경궁 홍씨를 절망에 빠뜨렸다. 훗날 혜경궁이 "흉하도다, 흉하도다." 라고 탄식한 정순왕후의 인품은 바로 이토록 잔혹했다.


혜경궁이 자신의 가문을 살릴 수 있었던 때는 정순왕후가 죽는 그 순간이었다. 정순왕후의 죽음과 함께 혜경궁은 사도세자의 비극과 정조의 죽음의 가장 생생한 목격자임을 자처하며 [한중록] 을 편찬했다. 그리고 순조에게 "내 아버지와 가문의 신원을 회복 시켜달라." 며 이는 "선왕의 유지" 라고 강변했다. 정조도, 혜경궁도, 정순왕후도 모르는 주장이었지만 혜경궁은 일방적으로 이것을 주장하며 자신의 가문을 일으켜 세웠다.


[한중록] 에서 펼쳐지는 풍산 홍씨 가문에 대한 혜경궁 홍씨의 절절한 변명과 순조에게 펼치는 생떼와 같은 일방적 주장은 어쩌면 사도세자의 비극 조차 외면하려 했던 혜경궁 홍씨의 자기 변명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혜경궁은 한 평생을 가문을 위해 살았다. 자신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 가문의 뜻을 저버린 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70평생 혜경궁을 옥 죈 것은 '가문의 부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녀는 가문을 위해 남편을 버렸고, 가문을 위해 [한중록] 을 지었고, 가문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내던졌다. 그 업보가 사도세자의 죽음을 낳았고, 정조의 비극을 낳았고, 결국은 조선을 소통과 변화의 시대에서 폐쇄와 퇴보의 시대로 만드는 결정적 이유가 됐다.


지금껏 드라마에서의 혜경궁은 남편의 죽음에 눈물 흘리고,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현모양처의 표본으로 그려져왔다. 그러나 실제 혜경궁은 강인한 어머니는 되었을지언정 자애로운 부인이나 현명한 여성은 되지 못했다. 혜경궁이 처한 모순이 정조의 모순이었고, 그 모순이 결국 정조의 개혁을 주춤거리게 할 수 밖에 할 수 없었다. 만약 혜경궁이 그렇게 오래 살지 않았더라면 정조의 개혁은 조금 더 큰 성과를 낼 수 있지 않았을까.


'집의 복을 닦으라' 라는 아비의 말을 평생 가슴에 새기고 살았던 '풍산 홍씨' 의 여인. 그리고 그 운명 때문에 남편을 죽음으로 몰아 넣을 수 밖에 없었던 잔혹한 여인. [한중록] 과는 전혀 다른 실제 역사 속 혜경궁 홍씨의 슬픈 가면은 지금도 사도세자와 정조의 절절한 삶을 정 반대로 대변하는 살아있는 '역사' 로 숨쉬고 있다.


참고자료 : [이한우 군주열전-정조, 조선의 혼이 지다] [이덕일 역사서-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 [이덕일-사도세자의 고백][신봉승-조선 정쟁사][혜경궁 홍씨-한중록][일성록] 등.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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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음.. 2008.02.24 17: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도세자의 비행문제가 조정에서 시끄러울때 홍봉한은 제대로 간하지 않고 쉬쉬하고 엄폐한다고 오히려 비난받았습니다. 소론인 서명응은 성균관 대사성으로 사도세자의 평양문제를 비판했죠? 이덕일씨 책에서는 서명응을 노론이라고 하더군요. ㅎㅎ. 윤재겸은 홍봉한이 한마디도 그문제에 비판않고 도리어 그런말하는 자들을 욕한다고 상소로 비난했습니다. 그문제로 홍봉한이 인혐하려 하자 그럴필요 없다고 세자는 말했고요. 이 윤재겸의 상소는 이후 박치륭의 상소에서도 언급되는데 이때 사도세자의 평양서행을 은폐하려고 거짓말한 이영휘와 상소문의 서본을 고친 구윤옥마져 홍봉한이 사주했다며 홍봉한이 사도세자사태를 양성한 죄가 크다고 비난했는데 그책에선 이런이야긴 쏙빼고 홍봉한의 죄가 크다는 말만 언급해서 죽음으로 몰아갔다고 주장하더군요 -_-;
    그리고 사도세자가 유독 이런 상서들이 영조에게 알려질까 그런지 듣기 싫어한다며 비판한 상서도 있는걸로 봐서 홍봉한은 사도세자의 뜻을 받들어 영조에게 감추고 있었던 거죠. 홍봉한의 권력의 근원은 사도세자이고 사도세자를 낀 홍봉한의 반대파가 사도세자의 비행이라는 홍봉한의 약점을 잡아 공격했던것도 크겠죠.. 이런 사도세자에 대한 간쟁하는 상서들에 대해 사도세자 사후에 영조가 상까지 내렸고 박치륭의 비난으로 봐서도 홍봉한은 전후 사도세자를 위해 영조를 기만한 죄들로 위태로운 상황으로 떨어질수 있는 상황이고. 어떻게든 영조의 의심을 덜어야 하고 영조의 뜻을 오바해서라도 맞춰줬어야 했겠겠죠.

  3. 이쁜라면 2008.02.24 17: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중록을 읽으면서.. 아무리 권력욕심이랄지라도 핏줄, 남편에게까지 비정한걸보면서
    참 어이없었더라는... 영조의 후궁이었던 영빈이 자기 아들 사도세자의 처분을 촉구한것도
    참 기가 막혔음.. 참 힘든시대.

  4. 음.. 2008.02.24 17: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득록이나 실록등등을 봐도 처음부터 홍인한등이 세손을 반대한게 아닌 서로 세손의 보호자를 자처하다가 세손이 홍인한의 사람됨을 싫어해서 배척하자 세손주위의 인물을 제거 하기위해 투서나 유언비어를 퍼트렸고. 이때문에 정조가 적으로 돌린거라고 했죠. 이사건들은대두분 영조 극 말년의 일들이고요.

  5. 냠냠.. 2008.02.24 18: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고문헌에 있는 책, 모두 제가 읽어본 책 중의 하나네요.
    많은 사람들이 혜경궁홍씨에 대한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있는데 덕분에 잘 알려진것 같습니다.

  6. 정론 2008.02.24 18: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게 정론이다. 바보들아 지맘대로 해석이라고? 책한권이나 제대로 접해봤으며, 국사수업은 들었는지 모르겠다.

  7. 음.. 2008.02.24 19: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홍봉한이 망국동의 망정승이라 불리게 된건 김귀주가 홍봉한을 제거하려고 한유를 사주해서 올린 상소에서였죠.
    박세채의 종묘배향이나 산림이 당쟁의 근원이라는 등의 영조의 탕평책에 대한 노론의 불만이 당시 영상이던 홍봉한이 반대하지 않고 영조의 뜻만 쫓아 바른말하던 신하를 귀양보내고 핍박한다며 공격했죠...
    이덕일씨 책에서는 정순왕후가 들어올때 양가가 화목하길 바랬다고 쓴 구절만으로 억측해서 두가문이 합쳐서 죽음으로 몰았다고 주장하며.. 이두가문이 찢어진건 순조때라며 호도하지만. 실제로 김귀주는 사도세자 생전에 홍봉한이 사도세자의 평양서행을 간쟁않는다며 영조에게 직접 홍봉한을 비난한 인물이죠. 그런건 책에서 언급도 안하더만.. 김귀주는 영조때부터 한유를 사주해서 홍봉한을 참하라고 상소올렸고. 정후겸과 연합해서 홍봉한을 역적으로 죽이려고도 궁성을 호위까지 했고. 영조48년에도 육촌 김관주와 함께 어약문제와 사도세자를 추승하려 했다는등의 홍봉한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는데요. 이 사도세자 추승썰은 홍봉한이 당시 세손과 사석에서 이야기한것이기에 정조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여 나중에 김귀주가 귀양간 빌미가 되었죠. 정조 즉위초에 홍봉한에 대한 공격도 대부분 김귀주 정파에서 주장한것들이고....
    정조가 죽어야 혜경궁의 가문이 부활한다고요? 홍봉한은 정조가 귀양보낸적이 없고 탄핵상소가 나올때에도 일성록보셨으면 알겠지만 수십차례 홍봉한의 집에 사람을 보내 돈유하고 있는데요. 혜경궁의 단식이 아니라도 애초에 있을수 없는 일인데요..무슨 죄목으로요? 홍인한이야 홍봉한과 멀어져서 대리청정반대한 죄목이 있다지만 홍봉한은 몇년전 김귀주의 공격으로 정계에서 물러난 상태였고 사도세자사건에 간범한 일도 없는데요.. 정조가 시호에 직접 제문까지내리고 홍봉한의 생전의 상소들을 모아 직접 어정까지해서 문집을 편찬중이었는데요. 익정공주고의 그 긴 서문들이 효심의 발로에서 나온거래도 아버지를 죽인 원수에게 적을수 있는 말들인가요. 한중록에 보면 정조가 사도세자 추숭을 준비했는데 그건 정약용의 문집에도 나오죠.. 사도세자로 추숭하면 혜경궁의 아버지는 부원군이 되는데 아들이 죽어야 가문이 산다구요? 아들이 죽자마자 그 모든게 물거품이 되면서 오히려 그 문제로 가문이 몰락했는데요? 홍낙임을 죽일때 죄중의 하나가 흉론을 주장한 소굴이라는거로. 사도세자 추숭과 영남 만인소에 연관된 썰들.. 다 믿을순 없겠지만 채제공과 결탁했다고까지 몰아세우는등 노론벽파의 시각에서는 흉적이었는데요. 정조 이전부터 홍씨가와 김씨가는 정적이었는데 정조의 죽음이 홍씨가문에 유리하다구요?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할텐데요?
    그리고 뒤주썰은 김귀주 정파에서 홍봉한을 공격한 소재였고 어떤 기록으로 남겨져 있거나 목격한 사실이 아닌 소문으로 영조도,순조도,정조도 긍정한적이 없는데요. 그말한 한유는 사형당했고 정이환은 정조에게 김귀주의 똘마니란 소리까지 들었고. 정조는 영조의 말까지 끌어들여 잘못된 사실이라며 부인했어요. 그후 그말은 쏙 들어가고 누구도 언급한적이 없죠. 한중록과 홍낙윤의 상소에서 정조가 그일이 허황된 소문임을 밝혀서 혜경궁집안에 내렸다고 하는데요. 상소문에선 순조께서도 보셨을꺼라 했으니 거짓말이 아니겠죠.

  8. 익명 2008.02.24 19: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9. 음.. 2008.02.24 20: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즉위하자마자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창경궁 제일 높은지대에 자경전을 지어 어머니를 살도록 한게 보고 반성하라는 의미겠어요? 사도세자를 수원으로 천장할때 아버지의 무덤 바로 옆자리를 비워두고 나중에 옆자리에 어머니를 모시도록 마련한게 무덤속에서 반성하라는 의미겠어요? 19년 사도세자의 원행때 혜경궁이 현륭원에 처음올라가 그토록 서럽게 통곡한건 무슨의미겠어요? 정조가 신하들앞에서 어머니가 사도세자를 보호한 공을 외부에선 제대로 모른다고 한게 거짓말일런지?
    혜경궁이 세자사후부터 순조15년까지 권력을 가진적이나 있으며 그럴만한 성격이었을까요. 기록에 언급되는거래봤자 문효세자나옹주가 아플때 잠도 안자고 간호해서 정조가 걱정하는거나 아직까지 자기에 음식과 입을걸 직접 신경써주신다며 자랑하는 정조의 말, 사도세자천장시 정조가 너무 몸을 해칠까 염려하거나 이정도외에 ..정조가 세자빈간택할때 비유하기를 존엄하기로 자전과 같고 자애롭기는 자궁과 같고 장중하기로는 내전과 같다고 한걸로 봐도 성격자체가 대비나 중전에 비해서도 상당히 유한 성격인듯한데요.. 원행만 해도 조선시대에 여자가 그런식으로 먼곳으로 며칠밤을 유숙하며 참여한 전례가 없는데도 전례를 어겨가며 추진한건 정조가 어머니에 설움을 무엇보다 이해했기 때문아닐런지.. 사도세자 사후 50년간 권력을 가진 적이 없는데 무슨 권력을 누리려고 남편을 죽였다는건지....

  10. 아... 2008.02.24 20: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수능공부하면서, 고3때 한중록을 시험 지문에서 봤었는데,
    왜 혜경궁 홍씨가 적극적으로 사도세자의 죽음을 막지 않았을까라는 의문점이 있었는데..
    가문을 위한 것이었군요..
    다만 위에 어떤분이 말씀하신 것처럼, 어쩔 수 없었다고 봅니다..
    문학작품의 힘때문인지...혜경궁 홍씨의 이미지를 바꾸기가 쉽지 않네요 ㅎㅎ;;

  11. .............. 2008.02.24 20: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산에서의 모습이 한중록과 달라서 놀랬습죠 그래서 티비로 보는 사극은 거의 픽션이니 그냥 즐겨봐야합니다 ㅋㅋㅋㅋ 곧이곧대로 믿지말고 더 나아가 역사적 인물에 대해 알아보며 아 드라마와 역사는 이렇게 다르구나를 알기 바랍니다

  12. 와.,,, 2008.02.24 20: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진짜 ...이런내용이 있었다니 긴글이었지만 정말 재밌게 보고갑니다.고등학교때 한중록
    배우면서...아 진짜 불쌍한 여자구나 라고 생각했는데...헐이네요//.. 복사해가요 !!!!!

  13. 음.. 2008.02.24 21: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도세자의 고백에선 잘한건 무조건 소론이고 나쁜건 죄다 노론, 소론계가 사도세자를 비판하면 이름만 언급하거나 아예 당색을 바꿔버리기도하고 노론계가 사도세자를 위하는 말은 대부분 언급안하지만 어떤건 슬그머니 그사람을 소론이라고말하고. 초판본엔 그랬는데 이후 나온책에선 고쳤는지는 모르겠네요. 홍봉한을 철저히 가해자로 몰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이러저러 사건에서 홍봉한이 조금이라도 사도세자에게 호의적으로 보일수 있는말은 철저히 생략하더군요. 상소문을 인용할때는 그부분만 빼고 인용하기도... 한번은 한중록에서 세자를 능행에 데려가지 않았다는걸 거짓말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태묘에 간걸 태묘가 태조릉이라며 한중록이 거짓말이라고 몰아가던데.. 태묘는 궁궐 근처에 있던 종묘인데도 그걸 과연 이덕일씨는 몰라서 태묘를 태조릉이라고 주장했을까요?. 실록에 한중록에서 밝힌 영조32년 능행이 세자의 첫 능행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이덕일씨는 실록은 안읽은것일지. 알고도 감춘것일지... 이건 작년 사도세자의 편지에서도 증명된 사실이죠. 사도세자가 직접 능행을 못가서 서럽다는 편지를 남겼으니 ㅎㅎ..

  14. 음.. 2008.02.24 22: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재호와 사도세자의 죽음이 상관이 있을까요. 영조가 폐세자 시키고 결단내린후 사도세자가 뒤주에 갖히고도 한참후에 벌어진 사태인데. 이미 어찌할수 없는 상황에서 자기에게 쏟아질지도 모르는 비난을 그쪽으로 돌리기 위한 반전용아니었을까요.. 홍봉한과 조재호가 이전부터 교류가 있었고 이창임을 매개로 해서 홍봉한이 조재호를 불러올렸다는 썰도 있더군요(임오화변의 발생과 정조대 사도세의 재평가). 홍봉한은 조재호외에 옥사의 확대를 막았고 조재호에게 사람보내라고 말한 이창임을 끝까지 보호했죠. 옥사가 한창중일때도 친한사람을 보내 조재호를 몰래 만난적도 있었고, 홍봉한은 소론인 정휘량과도 잘 지냈고 정휘량의 주인이 조재호. 한중록에는 홍봉한이 사도세자를 편들다 파직당한후에(윤5-2일) 조재호를 불러올렸다고 적혀있는데요.. 시기적으로 그럴듯도 하지 않나요
    그리고 사도세자의 평양행은 워낙 시끄럽게 떠나서 백성들이 사도세자를 알아볼 정도였는데 홍봉한의 반대파는 모두 손빨고 있고 혜경궁이 나서서 일러바쳤다 한들 홍봉한이 이걸 영조에게 고하지 않았고 도리어 고하지 않는다고 욕을 먹었는데 혜경궁 관련썰이란게 도대체어디에서 근거하는것인지, 한중록의 몇명 구절을 곡해해 해석한외에 도데체 어디있는거죠? 한중록의 몇몇 구절이 저런식으로 해석될지 혜경궁이 한중록 쓰면서도 생각이나 했을까요. 그렇게 교활한 여자라면 그런식으로 기록했을런지 ㅎㅎ. 사도세자만 죽으면 자기랑 아들이 무사하다고 혜경궁이 생각했다면 바보아닌지. 최대한 영조의 의심을 걷고 처분에 불만이 없음을 영조에게 확신시켜줘야 할정도로 위태로운 상황이고 혹 세손이 영조의 총애를 잃어 세자와 같은길을 밟을까 자기의 품에서 억지로 떼어내서 영조에게 보낼수 밖에 없었는데 왕비자리까지 포기하고 그럴상황을 자청했을까요? 혜경궁에게 힘이 있고 권력지향적이었다면 영조에게 보내는게 아닌 세손을 끼고 앉아서 확실히 자기편으로 만들었어야죠.
    사도세자가 소론편을 들어서 노론이 모함했다는것도 하나의 학설일뿐이고.. 설사 소론편이라해도 같은 노론에게 노론우위의 의리를 방기하고 영조에게 아첨만 한다는 홍봉한이 세자의 장인이라는 기득권을 다 포기하고 그걸 주도했다니요.게다가 영빈의 생모는 당파도 없는 한미한 가문인데 뭐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죽여라고 말했을까요. 세자를 잡고있다가 다같이 죽느냐. 세손이라도 보존하느냐의 선택상황이 아니라면요... 사도세자가 소론의 나라를 꿈꿨는데 왜 그 아들인 정조는 영조때의 처분에 한술더떠 신임옥사가 노론의 영조에 대한 충에서 벌어진 사건이라고 확정짓고 경종실록을 다시 개수하기까지 했죠. 감히 아버지를 경종을 독살했다며 군대를 일으킨 이들을 아들인 사도세자가 동정했다면 그건 조선사회에서 용납받을수 있는 사태일까요.. 사도세자의뜻이 온건소론과의 탕평이라면 더더욱 바로 홍봉한이 그당으로 분류되어 반탕평파로부터 공격받았는데 반대할리가 없지요.. 영조초 노론세상에 잇따른 소론계의 반역이 벌어져도 선의왕후나 그 부원군은 멀쩡히 살아남았는데 소론세상을 만든다고 부인이나 장인을 제거할까요? 홍봉한은 노론중에도 온건한 소론과의 탕평을 인정한 노론 온건탕평파인데요...
    그리고 정말 사도세자가 "멀쩡한" 인물일까요. 실제 수시로 사람살해했고(영조34년3월기록참조) 본인이 자기의정신병을 언급하고(편지,37년실록도) 영조가 언급하고 아들인 정조가 간접적으로 언급하고(즉위년 5-13일) 소론인 서명선이 언급한걸(5년 2-10)요. 사도세자는 결함이 많은인물로 그렇게 초래한 영조의 과한 성격은 한중록 말고도 실록에서도 충분히 읽혀져요.영조가 사람을 심하게 편애한것도 사실이고. 한중록에서도 정신병이 발동했을때가 아닌 평소엔 멀쩡하고 훌륭했다고 말했고 아버지와 궁궐을 벗어난 온양행궁에서의 몇몇 정사로 사도세자의 정신병을 부인할 근거는 못되죠..

  15. 착한여고생 2008.02.24 23: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밌게 잘읽고 갑니다. 좋은 하루되세요~

  16. . 2008.02.24 23: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블로그의 원래 글보다 "음.." 님의 덧글에 더 신뢰가 가는군요. "음.." 님은 사학을 전공하셨나요? 영/정조대의 실록을 직접 인용하실 정도면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전 '이산' 의 혜경궁 홍씨가 아니라 이 블로그 글에서 묘사한 혜경궁을 알고 있었는데 "음.." 님의 글을 읽고나니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혹 "음.."님께서 블로그를 가지고 계시다면 관련 내용을 잘 정리해서 독립된 포스트로 올려도 괜찮겠다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아예 책을 하나 쓰셔도 되지 않을지요. 요새 나온 책들은 이 블로그와 같은 의견이 주를 이루는 것 같은데, 반대되는 책이 하나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요.

  17. 다이아 2008.02.24 23: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리 국사선생님이 혜경궁 홍씨를 보면서 아주 쌍욕을 했죠. 그년때매 이렇게 된거라고,,,,저위의 내용들을

    얘기해주면서.....그래도 잘한게 딱하나 있다면 정조를 살린거라 하더군요.

    예전이나.....지금이나.....정치란.......진실을 가리는 법인가 봐요...

    • 지나가다 2008.02.25 05:27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 국사선생님은 모름지기 역사학자로서의 자격이 없군요. 편견에 가득차면 진실이 보이지 않는 것이고 함부로 단정지을 수 없는 게 역사라는 걸알고 있어야 하는데...여러면에서 객관적인 시각을 전달하지 못하고 그런 식이라면 선생으로서의 자질이 아주 심히 의심되네요. 우리나라의 주입식 국사교육은 정말 바뀌어야 합니다.

  18. 절헌.. 2008.02.25 00: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얼핏 알기에 사도세자의 미친 행동들은 혜경궁이 왜곡되게 썼다고 들었었죠. 그래서 이산 보면서 얼레..이랬어요. 음. 뭐 조선사회의 모순이 한두가지가 아니었겠지만 암튼 정순왕후 김씨부터 슬슬 조선이 돌이 킬수 없는 길로 향한 것 같습니다. 안동 김씨....전통있는 가문일지는 모르겠지만 쩝. .

  19. 집안에잘못들어온건 정순왕후뿐만아니라 2008.02.25 00: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홍씨도포함이되는군요.
    우연찮게 본 글 정말 인상깊게 잘봤습니다.
    저는 혜경궁홍씨를 남편이 죽고 그로인해 찔릴바늘가시속에서 아들을 임금으로 앉힌
    참으로 강인하고 현명한 어머니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이산에서도 혜경궁홍씨역에 유약하지않는이미지의 견미리씨를 앉혔다고생각했습니다.
    근데 이 글을 읽어보니 꼭 그런것만은 아닌것같네요
    평소드라마에서 악역을 주로맡으신 견미리씨의 이미지로 혜경궁홍씨에대해 침묵적인 인물묘사를보인건아닐지
    뭐 제생각이 제작진이 의도한바와는 맞을지아닐지는 모르겠지만 전 그런생각이듭니다.
    드라마 '이산' 은 사도세자일을 처음부터 보인게아니라 이미 일이 벌어지고난뒤부터 시작되기때문에
    혜경궁홍씨에대해 그닥 구체적인 묘사는없었잖아요 이글을읽어보니 드라마로도 보고싶다는생각이드는군요

    아마 영조가 며느리를 선택할때 잘선택했다면 이런결과를 낳았을까요
    집안에 여자가 잘못들어와 조선말의 역사가 처참해지네요
    영조는 자기아들인 사도세자가 소론을지지하고 며느리인 혜경궁홍씨는 노론가문인걸 몰랐을까요?
    그게 참 의문입니다.
    하긴 열살난 아들이 어디파를 지지하고있는지 알수있었을까요
    영조는 당파를싫어했지만 당파에대해서 확실하게알았더라면 이런일은 또 없었을거란생각이드네요
    싫어한만큼 그것에대해 자세히만알았었더라면말이죠 -_-

    결론적으로 영조는 여자보는 눈이 참 없었던듯
    그리고 위에글에서 좀 놀란게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이씨도 사도세자의죽음에가담했나요?
    아무튼 늘 드라마를보면서 실록의 기록들이 참 궁금했었는데
    사도세자가 혜경궁홍씨에게 하는말도 새로웠고 나름 조선왕조에는 자신있다고생각했었는데
    새로운사실들을 많이알고가네요 정말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20. 알 수 없는 사용자 2008.02.25 10: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흥미로운 글 잘 읽고 갑니다:) 저도 이산을 볼 때마다 한중록을 읽고 제가 상상한 혜경궁과 이미지가
    너무 달라 가끔 당황해요..

  21. 이더길 2008.02.25 11: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덕일의 거짓에 낚이는 자들이 뭐 이렇게들 많아??

    더 황당한 것은 그의 거짓이 요즘 유행하는 팩션들을 통해 역사를 모르는 일반 대중에게 주입되고, 그것이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글의 작가도 예외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