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이순재였다.


'대발이 아버지' 부터 '야동순재' 까지 지난 50여년간 TV 브라운관을 종횡무진했던 노배우의 연륜은 감동과 웃음을 동반한 따스한 것이었다.


[무릎팍 도사] 에 출연한 이순재는 말 그대로 연륜있는 배우의 자존심과 진정성을 그대로 시청자에게 전달해 줬다.


뜨거운 열정을 지닌 늙은 배우의 뜨거운 눈물이 TV를 지켜보는 시청자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까.




배우 이순재를 상징하는 키워드는 "천재" 다. 이순재 스스로는 아니라고 손사래 치지만 그의 연기를 보고 있노라면 절로 탄성이 나온다. "역시 이순재는 천재야!" 라고. 이순재는 연기를 가장 연기답게 하는 연기자다. 꾸밈없고 솔직하게, 진정성이 담긴 채로 거짓이 없다. 슬프면 슬픈만큼, 기쁘면 기쁜만큼 감정의 과잉이나 기복 없이 진솔하고 담백하다. 그래서 이순재의 연기를 보면 꼭 우리네 일상을 보는 듯 친근하고 익숙하다.


이순재는 표정만으로 연기를 하는 예사 배우가 아니다. 그는 눈과 코와 입과 몸짓으로 모두 연기한다. 철저하고 정확하게, 그러나 대단히 자연스럽고 여유롭게. 마치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가 그의 존재 일부인것마냥 이순재의 연기는 조금의 빈틈도, 흐트러짐도 없이 정갈하고 깔끔하며 담백하고 진솔하다. 그래서 이순재는 천재이고, 깊은 내면의 연기자이며, 눈 떨림 하나에도 전율을 줄 수 있는 진짜 배우다.


코믹과 신파에서 가장 자유로운 중견배우인 이순재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허준] 등의 정극 연기와 [거침없이 하이킥] 의 코믹 연기의 중간에서 아슬아슬하지만 신 들린듯한 줄타기를 행복하게 해 나가고 있다. 이순재가 걸어온 배우의 길이 화려하지 않지만 빛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사실 이순재는 '서울대 출신' 이라는 학력으로 탤런트에 데뷔하면서 탤런트에 대한 국민적 의식을 높이는데 일조한 인물이었다. "당시에는 이순재 선생같은 서울대 출신 배우가 탤런트라서 영화배우보다 탤런트 한다고 하면 더 알아줬다." 던 배우 윤여정의 말은 이를 뒷받침 한다. 예나 지금이나 깐깐한 자기관리와 자기 주장은 이순재의 심벌이 됐고, 따박따박 할 말 다 하면서 마치 지금이 아니면 못 할 것 같이 쏟아 붓는 듯한 폭포수 같은 까탈스러움은 이순재의 '운명 공동체' 가 됐다.


이순재에게는 남의 눈치를 보거나 시류에 영합하는 비겁함 대신에 배우로서 간직해야만 하는 충만한 자의식과 자존심이 가득하다. 철저한 엘리트주의,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완전무결함은 세월이 흘러 사람들과 화해하면서 인간미까지 갖추게 되었지만 여전히 사람들이 이순재에게 기대하고 발견하는 것은 시간조차 침범하지 못하는 '이순재스러움' 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배우로나 사람으로나 이순재는 이순재, 그 자체로 아름답고 깔끔하다.


[무릎팍 도사] 에서 "늙은 배우라고 해서 특별한 대우를 바라지 않는다. 나는 현장에서 일개 배우이기 때문이다." 라는 감동적인 말을 했다. 스타 이전에 배우이며, 배우 이전에 전설인 이순재의 롱런 비결이 그대로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사랑이 뭐길래] 에서 김혜자에게 쩌렁쩌렁 소리를 지르며 가부장을 상징했던 그가 [엄마가 뿔났다] 에서 아름다운 황혼의 로맨스를 그릴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자신의 위상과 상관없이 동등한 역할과 캐릭터로 평가 받으려는 특유의 깐깐함과 정갈함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전설적인 배우' 로 남은 이순재의 현실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지금까지도 시청률 보증수표로 통하는 중견배우다. 시청률 '불패' 의 배우답게 이순재는 장르를 불문하고 항상 최선의 노력으로 최고의 결과를 이끌어냈다. 사극이면 사극, 시대극이면 시대극, 트렌디면 트렌디, 멜로면 멜로 이순재에게 불가능한 작품이나 영역은 없었고 작품 자체의 장르적 결함자체도 이순재를 만나게 되면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면서 이순재는 성장했다. 어떤 빈틈도 허용치 않는 완전무결한 청정함을 자랑하면서.


이순재는 '사랑스러운 배우' 는 아니었으나 '멋진 배우' 였다. 이순재의 등장은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이순재의 말 한마디는 사람들의 귀를 쫑긋 세우게 만든다. 좌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와 한 순간에 폭발시켜 버리는 과잉된 감정의 자의식을 이순재는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로, 배우로서 자신의 가장 큰 장점으로 사람들에게 각인시켰다. 배우 이순재가 세월이 지나도 녹슬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생활과 연기를 통틀어 배우로서 가장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이순재는 나이가 들어 갈수록 더욱 멋스러워지고 있다. 배우로서 이순재가 제시한 것은 작품과 연기력 뿐 아니라 '이순재 스타일' 그 자체였다. 가장 꼿꼿하게, 가장 고고하게, 가장 도도하게, 그렇게 이순재는 젊어지는 대신 멋스럽게 늙어가는 길을 선택했다.


30대부터 줄곧 유지해 온 이순재만의 개성은 가볍고 유쾌하기 보다는 무겁고 진중했다. 젊은 나이에 간직했던 배우로서의 진지함은 70대를 훌쩍 넘어선 지금까지도 중견 배우다운 진중함과 고독으로 발전해 사람들에게 여전히 유효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세월의 흔적 속에서 더더욱 영롱한 영혼을 발견케 하는 아름다움으로 느껴지는 것이 바로 이순재 스타일이다. 76살의 노배우가 결코 가볍게 일을 하지 않고, 결코 쉽게 연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새삼 놀라우면서도 경이롭다.


이렇듯 완전무결함을 자랑하는 그가 오늘 [무릎팍 도사] 에서 "대한민국 화이팅!" 을 외친 뒤, 눈물을 흘렸다. "잘만 해주면 우리나라 사람들 잘 할 수 있다. 가슴 속에 애국심들을 다 가지고 있으니까." 라며 대한민국이라는 네 글자에 눈물을 흘리는 그의 모습은 진정한 '국민배우' 의 진정성과 따뜻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나라를 잃은 설움을 11년간 느껴봤고, 대한민국의 발전상을 TV 속에서 지켜봐야 했던 그의 눈물은 그래서 더욱 값진 것이었다.


53년 동안 TV 브라운관을 지켰던 배우. 53년 동안 국민과 함께 했던 배우. 대발이 아버지부터 야동순재까지 희극과 비극, 정극과 코믹을 넘나들며 연기를 가장 연기답게 했던 배우. 지금도 연기가 끝나면 대사를 맞춰 보는데 열중하고, 철없는 후배들에게 쓴 소리도 마다하지 않는 배우. 이 76의 '늙은 배우' 는, 그러나 누구보다 젊고 청랑한 청춘의 열정으로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천상배우로 남아있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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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youngcash.tistory.com BlogIcon 조권 2009.01.15 07: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즘에 올라오는 연예기사보면 참 기사 같지않은게 많던데...
    이런글좀 올려 주면 좋으련만..
    이제부턴 블로거 자주 들려야 되겟군요.... ㅋㅋㅋㅋ
    리뷰 잘보고 갑니다... 자주 놀러 오겟습니다..

  2. Favicon of https://unlover007.tistory.com BlogIcon Iam정원 2009.01.15 10: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완전 찡! 아름다운 배우 정말 그의 열정 , 노력, 연기 모두 아름다워요.

  3. 애독자 2009.01.15 10: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 눈물 하나에 많은 것을 담아내셨고 보는 이들에겐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한밤의연예가섹션님 글을 읽으며 다시 감동받게 됩니다.
    올해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4. Favicon of https://archwin.net BlogIcon archmond 2009.01.15 23: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순재님 정말 멋진 분이죠..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bbm69 BlogIcon 션대디 2009.01.22 17: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잘 보고 갑니다^^

    항상 노력하시는 모습 보기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