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찬란한 유산] 열풍이 심상치가 않다.


출연자 전원부터 제작진에 이르기까지 상승 분위기를 타면서 시청률 40%를 왔다갔다하는 저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은성이의 고난이 심화되면 심화될수록, 백여사의 악행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드라마의 인기는 높아지고 있다.


이 중, 개인적으로 동정이 가는 캐릭터가 있다. 어쩔 수 없이 악녀가 되어야하고,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해야 하는 그녀. 바로 문채원이 연기하고 있는 '승미' 다.




극 중 승미는 어린 시절부터 '심리적 고아' 상태로 버려진 존재다.


매번 남자를 바꾸는 엄마, 어쩔 수 없이 친딸을 더 사랑하는 새아버지 밑에서 그녀의 유년은 철저히 유린됐다. 어린 시절 가장 중요한 부모와의 애착관계를 형성하지 못한 그녀에게 있어 환이의 존재는, 그래서 더 각별하고 특별했다. 승미는 아마도 자신과 같은 아픔을 갖고 있는 환이에게서 자신을 투영하고, 자신의 아버지를 갈구했던 것 같다.


어쩔 때보면 지긋지긋할 정도로 환이에 대한 집착증세를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사실상 채워도 채워도 채울 수 없었던 사람과 사랑에 대한 그리움의 반증이었다. 그녀가 환이를 쟁취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환이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를 지켜야 한다는 그녀 스스로의 자기 방어적 측면이 더 크다. 어쩌면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환이가 아니라 그녀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든다.


"왜 너까지 그런 거짓말을 해?" 라는 은성이의 물음에 "내 것을 지키기 위해서" 라는 승미의 변명이 일견 비겁해 보이면서도 징그러울 정도로 진실해 보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준세 곁에는 돈이 있고, 사람이 있지만 승미에게는 돈도, 명예도, 사람도, 사랑도 남아있지 않다. 심지어 유일한 핏줄인 엄마조차 그녀는 증오할 수 밖에 없다. 


한번도 제대로 된 누군가의 헌신적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고, 한 번도 부모의 따뜻한 품속에서 잠들지 못했던 한 소녀의 외로움은 부모에 대한 배신감과 사랑의 실패로 더더욱 깊어지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그녀는 그토록 증오하고 지긋지긋해 하는 엄마의 운명을 그대로 뒤따라 갈 수 밖에 없는 운명에 시달리고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엄마처럼 살지 않기를" 기도했던 그녀가 어쩔 수 없이 엄마의 거짓말에 가담하고, 어쩔 수 없이 엄마의 악행을 눈감으며 그녀 스스로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다.


승미의 엄마인 백여사는 악행을 저지를 때마다 "승미, 너를 위해서야!" 라고 소리치지만 정작 그녀의 악행의 최대 피해자는 다름아닌 자신의 딸 승미인 셈이다. 승미는 엄마의 운명을 뒤 따라간 죄로 사랑하는 사람도, 유일한 핏줄도, 심지어 자신도 잃게 될 것이다. 환이에 대한 사랑을 제외한다면 누구보다 황폐하고 쓸쓸한 감성을 지니고 있는 그녀가 환이마저 잃어 버림으로써 스스로를 허무하고 쓸모없는 존재로 낙인찍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승미가 가장 불쌍하다.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감당할 수 없는 삶의 무게에 지치고 지쳐 한 발자국도 제대로 걸어갈 수 없는 무기력함이 엿보인다. 그 무기력함이 허망해 보여서, 그 지침이 안쓰러워서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나는 그녀의 악행마저 안쓰러운 눈빛으로 쳐다볼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아무리 드라마라지만 어디선가 승미 같은 사람이 존재할 것만 같아서다.


오늘 은성이는 환이에게 "당신은 못나지도, 못되지도 않다." 라는 말을 했다. 허나 이 말이 가장 필요한 사람은 어쩌면 환이가 아니라 승미일지도 모른다. 지금 이 자리에서 승미와 같은 아픔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에게 이 말을 전하고 싶다. 당신은 못난 사람도, 못된 사람도 아니라고.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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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7.12 10: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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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9.07.12 20: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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