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에서 김유신과 계백이 본격적으로 '전쟁' 을 치루고 있다.
[선덕여왕]은 김유신을 주인공으로 하여 그를 대단히 뛰어난 장군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과연 실제 역사 속에서도 그랬을까.
계백과 김유신, 둘 중 누가 더 뛰어난 전략가였을까.
김유신과 계백, 몇 번 싸워 몇 번 이겼을까
김유신과 계백이 몇 번 싸웠는지 정확히 알 길은 없다. 큰 전투 뿐 아니라 국지전까지 따지자면 대단히 많았을 것이라 사료되었기 떄문이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큰 전투로만 따지자면 김유신과 계백이 '제대로' 맞짱을 뜬 건 딱 두 번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선덕여왕] 의 시대적 배경이 되고 있는 642년 가잠성 전투와 660년에 있었던 그 유명한 황산벌 전투가 그것이다. 결과적으로 김유신과 계백의 전적은 각각 2전 1승 1패다.
그러나 실상을 들여다 보면 계백과 김유신이 '붙은' 전투에서 김유신은 항상 계백에 열세를 보여왔다. 김유신이 신라에서 내로라 하는 전략가이자 장군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계백의 재능은 김유신의 그것을 뛰어넘는 수준에 있었다. 매번 불리한 입장에서도 '최선의' 결과를 냈던 것이 바로 계백 장군이기 때문이다.
642년 가잠성 전투 역시 계백의 지략이 상당히 빛났던 전투가 분명했다. 드라마 [선덕여왕] 과 달리 가잠성 전투는 백제에서 신라를 공격한 것이 아니라 거꾸로 신라에서 백제를 공격한 것이었다. 당시 김유신은 3만여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정예군을 이끌고 백제의 요충지였던 한 곳인 가잠성, 지금의 경기도 안성을 공격하며 위세를 떨쳤다. 가잠성을 지키고 있던 계백에게 있어 김유신의 맹공은 대단히 불리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김유신의 3만 정예군을 상대로 계백은 4개월 동안이나 가잠성을 지켜내며 김유신 군대의 기를 꺾어 놨다. 천혜의 요충지였던 가잠성에서 계백은 탁월한 방어전략을 펼쳐 공성전과 야전에서 모두 '쏠쏠한' 승리를 거둬냈다. 전세적으로 열세에 놓여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계백이 주도권을 잡은 것이다. 이는 보통 재능과 전술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계백은 김유신이 가잠성에 눈이 팔려 있다는 것을 역이용하여 윤충 장군에게 신라의 요충지인 하나인 대야성을 치게 하여 일거에 신라 국경을 무너뜨리고 만다. 당시 대야성을 지키고 있었던 것은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이었는데 그는 이 전투에서 격렬하게 저항하다 즉사한다. 김춘추가 백제에 대한 노골적인 반감을 갖고 무리한 삼국통일을 이끌어 내려 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개인적인 원한관계에 기인한 바 컸다.
어쨌든 계백의 전술에 뒷통수만 독하게 맞은 김유신은 아무런 성과 없이 대야성만을 빼앗긴 채 신라로 귀환할 수 밖에 없었고, 자존심을 단단히 구기게 된다. 이런 그가 김춘추와 손을 잡고 삼국통일을 꿈꾸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으며, 삼국통일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백제를 대표하는 장군 계백과 다시 한 번 '맞짱' 을 뜨는 것은 필수 불가결한 일이었던 셈이다.
그로부터 18년 뒤인 660년, 김유신과 계백은 역사적인 장소에서 만나게 되는데 그곳이 바로 '황산벌' 이었다. 우리에게 황산벌 전투라고 잘 알려져 있는 이 전투는 신라가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는데 큰 일조를 했던 역사적 사건이었을 뿐 아니라 김유신의 대표적인 승리전이기도 하다. 허나 내부적으로 살펴봤을 때 김유신이 이뤄낸 '황산벌의 대승' 은 실질적으로 계백의 승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황산벌 전투는 5만여명의 김유신 군대와 5천여명 계백의 군대가 붙은 전투였다. 10배 차이나 나는 전력을 가지고 붙는데 김유신 군대가 진다고 한다면 이상하다고 할만큼 김유신 군대의 위세는 대단하고 놀라울 정도였다. 게다가 계백의 군대는 무너져가는 백제가 겨우 편성해 내보냈던 별동대와 다름 없었다. 정예군과 별동대가 붙었을 때, 정예군이 승리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5번의 싸움으로 이루어진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이 처음 4번을 내리 승리했다는 것이다. 계백은 철저한 수비 전략과 신라 군대의 사기를 꺾어 놓는 기술을 사용하여 김유신 군대에 매번 승리를 거두었고,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주도권을 잡고 분위기를 리드할 수 있었다. 반굴, 관창 등 신라의 내로라하는 화랑들이 계백의 손에 붙잡혀 죽임을 당하는 치욕을 겪은 것 역시 김유신이 얼마나 무모하게 계백에게 달려들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안타깝게도 황산벌의 마지막 5번째 전투에서 관창의 죽음에 분노한 신라 군대가 무차별적으로 총 공세를 가하는 바람에 계백의 5천 별동대는 중과부적으로 무릎을 꿇을 수 밖에는 없었지만 이 또한 김유신의 '승리' 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지경이었다. 오히려 이 전투에서 칭찬 받아야 하는 것은 장수다운 위엄과 자존심을 잃지 않으면서도 뛰어난 전략과 전술을 보여줬던 계백의 재능이었다. 아마 백제에 계백과 같은 장수가 한 명만이라도 더 있었더라도 백제가 그리 허망하게 멸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김유신과 계백의 전적은 실질적인 계백의 일방적 승리였다. 비록 김유신이 상승무드를 타고 있던 신라의 기세를 얻어 마지막에 승리를 거두기는 하였으나 계백만큼 '아까운' 장수도 드물었다. 만약 의자왕이 실정을 하지 않고 대야성 전투 때만큼의 현명함만 제대로 갖추고 있었더라도 계백이 지금처럼 김유신의 '제물' 처럼 비춰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역사는 승리자의 것이다. 그러나 패배자 역시 제대로 평가 받을 필요가 있다. 지금의 계백이야말로 정말 제대로 평가받아야 할 인물이 아닐까. 판세를 읽는 정확함, 전략을 구사하는 치밀함, 임금에게 바치는 무조건적인 충성까지 김유신보다 뛰어나면 뛰어났지 못할 것 없는 계백이야말로 이 시대 진정한 '승리자의 모습' 인 듯 하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