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빨래].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뮤지컬은 내가 본 뮤지컬 중에 '단연 최고'다.


여러 뮤지컬을 봤지만 이 정도로 잘 만든 작품이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2009년에 한 번, 그리고 어제 한 번 이렇게 두 번을 봤지만 지루함을 느낄 새도 없었다. 그만큼 완성도가 높다는 것이다.


감동과 웃음, 눈물과 해학이 넘쳐흐르는 뮤지컬 [빨래]! 이 뮤지컬의 '힘'은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빨래]의 총 공연시간은 중간 쉬는시간까지 합쳐서 총 150분이다. 2시간 30분이면 웬만한 영화 한편보다 훨씬 긴 시간이다. 편안한 의자에서 거의 눕다시피 한 자세에서 보는 영화도 2시간 30분이면 엉덩이가 저릿저릿하고 힘들 때가 있는데 좁은 대학로 소극장의 불편한 의자에서 보는 뮤지컬은 오죽할까 싶지만 그런 생각은 잠시 접어둬도 좋다. 관객이 '1시간 정도 됐나?' 싶을 때쯤, 벌써 뮤지컬은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만큼 이 뮤지컬은 정신없이 재밌고 흥겹다.


[빨래]의 첫 스토리는 주인공 나영이 서울의 한 옥탑방으로 이사오면서 시작된다. 투박스러운 주인 할머니, 웬지 천박해 보이는 옆집 희정엄마, 공장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 솔롱고와 마이클 등 서울의 '소시민'들이 뒤엉켜 사는 이 동네. 나영이 내 몰린 이 공간은 빨래를 널며 나영이 읊조리는 대사처럼 참 "못된 서울"의 전형을 보여주는 듯 하다.

서울살이 5년/ 여섯번째 이사/ 낡은 책상 삐걱이는 의자/ 보지 않는 소설책 지나간 잡지/ 고물 라디오 기억이 가물가물한 편지/ 그런 것들은 버리고 와요/ 버리고 버려도 늘어나는 건 세간살이 집세 그리고 내 나이/

얻어갈 것이 많아 찾아왔던 여기 / 잃어만 간다는 생각에 잠 못드는 우리 / 당신과 내가 만나고 헤어지는 동안/ 서울살이 늘어갑니다/

(.......)

서울 올 땐 꿈도 많았었는데/ 3~4년 돈벌어 대학도 가고/ 하지만 혼자 사는 엄마한테 편지 한 줄 못쓰는 내 꿈은..../내 꿈은...../

나의 꿈 닳아서 지워진지 오래/ 잃어버린 꿈 어디 어느 방에 두고 왔는지/ 기억이 안 나요


하지만 나영은 이 곳에서 사람과 부딪히고, 사람에게 상처받고, 다시 사람에게 위로받으며 성장한다. 투박해 보이기만 했던 까탈스러운 주인 할매가 사실은 남모를 아픔을 가지고 있는 정 많은 할머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옆방 희정엄마의 잔스러운 정에 감동 받을 때, 옆집 솔롱고와 은근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속삭일 때, 관객은 나영이 살아가는 "못된 서울" 속에도 서로가 서로를 보다듬고 아끼는 인간에의 애정이 살아있음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빨래]의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어느 한 구석이 모자란 듯 보이는 완벽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학벌도 좋지 않고, 돈도 없고, 명예도 없다. 사회가 규정하는 잣대로 보자면 하나같이 실패한 인생을 사는 '루저'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참 착하다. 착한 사람이 살기 힘든 이 세상에서 그들은 눈부시게도 착하다. 눈물을 쏟아내는 이웃의 어깨를 토닥여줄 줄 알고, 이사 가는 이웃에게 빨래세제 하나 선물할 줄 아는 그들의 모습은 보는 이의 가슴 한켠을 찌릿하게 만든다.


그래서일까. 처음 "나의 꿈 닳아서 지워진지 오래/ 잃어버린 꿈 어디 어느 방에 두고 왔는지/ 생각이 안나요" 라던 나영은 그들과 부대끼고 싸우고 화해하고 사랑하면서 마지막에 다시 이렇게 노래부른다.


그대와 나/ 여기 살아 온 시간만큼/ 살아갈 시간들/ 그대 잃어버린 꿈/ 그대 두고 온 꿈 다시 꾸어요/ 다시 꾸어요/ 서울살이 여러해/ 당신의 꿈까지 그대론가/요 나의 꿈 닳라서 지워진지 오래/ 잃어버린 꿈 어디 어느 방에 두고 왔나요/

빨래처럼 흘러가는 우리의 일상이지만/ 당신의 젖은 마음 빨랫줄에 널어요/ 바람이 우릴 날려줄거예요/ 당신의 아픈 마음/ 꾹 짜서 널어요/ 바람이 우릴 날려줄거예요/ 당신의 아픈 마음/ 털털 털어서 널어요/ 우리가 말려줄게요/ 당신의 아픈 마음 우리가 말려줄게요/ 우리가 말려줄게요/


 
뮤지컬에서 음악은 등장인물의 감정과 느낌을 전달하는 대사와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아무리 촘촘하게 잘 짜여진 뮤지컬이라 할 지라도 음악이 '꽝'이면 전체적으로 '꽝'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런데 놀랍게도 완벽한 극본을 자랑하는 [빨래]는 뮤지컬 넘버까지 흠 잡을데 없을 정도로 완벽하다. 특히 가사의 완성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노래도 좋은데 가사까지 좋으니 황홀지경이다. 


<서울살이 몇핸가요>로 시작된 뮤지컬 넘버는 <참 예뻐요><내 이름은 솔롱고입니다><빨래><비오는 날이면><내 딸 둘아>로 이어지다 <슬플 땐 빨래를 해>로 절정을 맞는다. 전체적으로 완급조절이 상당히 잘 되어 있어서 지루한 줄 모를 정도이고, 노래를 듣다보면 어느새 관객도 등장인물과 하나가 되어 같이 웃고 울고 있다. 이것이 바로 잘 만들어 진 뮤지컬 넘버의 힘인 것이다.


(작년 추석 KBS에서 방송된 뮤지컬 다큐멘터리 [서울의 달밤]에서 두 세곡의 [빨래] OST를 들을 수 있기에 동영상을 같이 올려본다. 올린 동영상만 봐도 좋겠지만 관심 있으신 분들은 [서울의 달밤]을 구해서 보시면 더 좋을 듯. 개인적으로 상당히 인상 깊게 본 다큐멘터리였다.)

 





[빨래]는 우리나라 창작 뮤지컬의 힘을 보여주는 작품이자, 가능성과 미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소시민들의 땀과 눈물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이 멋드러진 뮤지컬을 놓치는 건 정말 아쉬운 일이다. 시간이 난다면 지금 당장 대학로 학전으로 달려가 뮤지컬 티켓을 끊기를 권해드리고 싶다. 참 못된 서울을 사는 참 착한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지금 당신의 현재를 발견하고 반성할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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