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작가 김수현이 쪽대본 환경에 일침을 가했다.


그녀는 트위터에서 "보통 그 주 방송분 포함 6회분이 앞서나가 있으면 진행에 무리 없습니다. 지금은 이동 시간도 많이 걸리고 야외 촬영분도 많고 연기자 스케줄 얻기도 만만찮아 대본 여유없이 작업하는 건 글쎄요. 그냥 나는 함께 일하는 팀에 폐가 돼서는 안 된다 주의입니다." 라며 간접적으로 작금의 쪽대본 현실을 비판했다.


차기작인 [천일의 약속]의 방송이 두 달이나 남은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그야말로 엄청난 작업속도인 셈이다.


그러나 그녀가 쪽대본을 쓰지 않는 이유는 따로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드라마 작가 김수현. 그녀는 이 시대가 낳은 가장 뛰어난 드라마 작가다. 호불호가 확실히 갈리고, 그만큼 비판세력도 존재하지만 한국 드라마 50년 역사 속에서 김수현 드라마는 무려 40년을 함께했다. 그녀는 희극과 비극 모두에서 능통하다. 캐릭터는 살아 숨쉬고, 대사는 폐부를 찌른다. 박철 PD와 강부자가 나눴다는 이야기처럼 김수현은 "백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천재 작가임이 분명하다. 


글자 하나하나에 혼을 실은 듯 튀어나오는 촌철살인의 대사와 마치 옆에 서 있는 듯 펄떡펄떡 살아 숨쉬는 캐릭터들은 그대로 한국 드라마의 전형이 됐고, 한국 드라마의 상징이 됐다. 그 누구도 상상하지도, 만들지도 못했던 캐릭터들이 김수현의 손에서 나오는 순간 폭발적인 생명력을 얻게 되는 것을 우리는 이순재와 심은하와 윤여정을 통해 40년간 지켜봤다.


천재적인 필력과 재능은 김수현 드라마를 한 두번 왔다갔다 하는 시청률 표만으로 평가하기 어렵게 했고 이는 김수현의 드라마가 일정 수준의 '클래스' 를 가졌다는 의미를 지녔다. 드라마 작가 중 클래스란 단어가 가장 어울리는 사람은 문화 평론가 조지영의 말처럼 "오직 김수현" 뿐이다.


이런 천재성은 김수현의 작가 생활에서 언제나 든든한 밑천이 됐다. 드라마를 고민하고 쥐어짜면서 쓰지 않는다는 김수현이다. 캐릭터를 만들고 그 캐릭터가 머릿 속에서 뛰어 노는 그대로를 글로 옮기는 것이 드라마 작법의 전부라는 그녀에게 쪽대본 쓰는 작가들은 이해 불가능한 대상일 것이다. "아니, 오늘 안 써진 글이 내일은 써지나?" 가 쪽대본 작가들에게 김수현 던지는 냉소적인 한 마디다.


그러나 김수현이 쪽대본을 쓰지 않는 이유를 그저 '천재성'에만 국한시킬 순 없다. 천재성만으로 설명하기엔 작금의 쪽대본 환경이 너무 복잡하기 때문이다. 쪽대본을 쓰는 작가들이 가장 크게 토로하는 고민은 바로 드라마 환경의 즉흥성이다. 대본을 다 써서 내보내도 PD와 방송사가 끼어들이 시청자 기호에 따라 대본 수정을 요구하는 등 즉흥적으로 터지는 사건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시청률이 잘 나오면 잘 나오는대로, 시청률이 안 나오면 안 나오는대로 작가는 시청자의 반응에 따라 대본을 다시 쓸 것을 요구받는다. 연출 PD가 웬만큼 힘이 있는 경우엔 PD가 직접 대본 작업에 참여해 이것 저것을 요구하기도 하고, 때로는 방송사 윗선에서 직접 장면 하나하나에 태클을 걸기도 한다. 드라마 작가가 온전히 자신의 작품을 쓰기에는 드라마 환경 자체가 그리 녹록치 않다는 것이다.


이런 작가들과 달리 김수현은 '급'이 다르다. 김수현의 대본은 그 누구도 못 건드린다. 심지어 방송사 사장도 뜯어 못고치는 대본이다. 토씨 하나, 장면 하나 건들 수 없을 정도로 김수현의 대본은 신성 불가침의 영역이다. 시청률이 잘 나오든 잘 나오지 않든 김수현에게 대본 수정을 요구하는 건 그 세계에서 '자살'과도 같은 짓이다. 매장 당할 각오를 하지 않고선 김수현의 대본에 감히 반기를 들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린 아이가 어른이 되고, 아줌마가 할머니가 되는 시간, 대통령이 여덟 번 바뀌는 세월 속에서도 김수현은 그대로 김수현이었다. 방송사 사장을 만나고 싶으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작가, 시놉시스 하나 없이 이름값만으로 방송 편성을 받을 수 있고, PD 선택권과 배우 추천권을 모두 부여받는 작가 역시 김수현이 유일하다. 드라마의 여제, 언어의 마술사, 시청률 보증수표라는 타이틀조차 초라해질 만큼 김수현의 브랜드는 말 그대로 일종의 문화권력인 것이다.


그녀가 쪽대본을 쓰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김 작가는 다른 작가들과 달리 드라마 작업 환경에 크게 구애 받지 않는 탑 클래스 작가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이상 대본을 수정할 일도 없고, 시청률 때문에 크게 압박을 받는 것도 아니다. PD와 배우들 역시 김 작가의 요구에 충실하게 뒤 따르고, 방송사의 지원도 탄탄하니 김 작가는 쪽대본을 쓸 일이 없다.


허나 김 작가와 달리 다른 작가들의 상황은 열악하기 그지 없다. 심지어 이름 좀 있다는 김은숙, 홍자매, 임성한, 문영남, 김정수 등의 A급 작가들도 방송사 요구와 시청자 기호에 따라 대본을 바꾸는 일이 부지기수다. 현재 방송가에서 김수현을 제외하고 '대본 수정'에 자유로운 작가는 아무도 없다. 김 작가 역시 이런 상황을 모르는 바 아닐터다.


이러한 현실에서 지금 김수현 작가가 해야 할 일은 쪽대본 작가들을 다그치는 일이 아니라 드라마 제작 환경에 대한 변화와 반성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물론 김수현은 40년 동의 작가 생활동안 드라마 작가의 사회적 위치를 많이 끌어올린 인물이다. 작가들의 기본적인 경제적 수입 보장 뿐 아니라 저작권료와 같은 작가적 자존심에 관한 일까지 광범위한 범위에서 작가들의 입장을 대변해 왔다.


그런 그녀가 '쪽대본' 환경의 근본적인 문제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 "나는 쪽대본 안 씁니다" 가 아니라 왜 쪽대본이 발생할 수 밖에 없는지, 쪽대본이 나오지 않기 위해서 환경이 어떻게 개선되어야 하는지 적극적으로 문제제기를 해주는게 더 김수현 답다. 김수현의 '말 한 마디'는 방송계에서 그 누구의 말보다 묵직한 의미로 크나큰 파장을 던지는 파괴력이 있질 않던가.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김 작가가 드라마 작가들의 자존 독립적 공간을 마련해 주고, 자신 뿐 아니라 수많은 작가들이 그러한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도와주길 기대한다. 그것이 바로 '원로' '장인' '전설'로 불리는 김수현에게 주어진 마지막 과업일테니까.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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