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의 남자]가 마지막 회만을 앞두고 있다.


이시애의 난이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가운데, 주인공들의 갈등 역시 최고조에 오르고 있다.


[공주의 남자] 5일 방송분에서 정희왕후는 관비로 전락해 있는 경혜공주를 찾아가 면천을 시켜줄테니 아이를 위해서라도 다시 서울로 올라오라고 설득한다.


그런데 정말 경혜공주는 공주에서 노비로 전락했었을까? 관비로 생활한 것은 사실이었을까?


경혜공주는 문종의 유일한 딸로 단종조에 이르기까지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문종의 총애는 총애이거니와 단종에게도 무한한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왕실의 유일한 적통 공주로서 경혜공주의 위상은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이는 세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세조가 단종을 핍박하는 와중에도 경혜공주만은 보호하려 했던 것도 왕족으로서 경혜공주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가 상당히 중요한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단종 3년 경혜공주의 남편이었던 영양위 정종이 금성대군과 함께 단종 복위 역모를 획책하였을 때에도 세조는 금성대군만을 처벌하였을 뿐 정종과 경혜공주에게는 큰 벌을 내리지 않았다. 세조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문종의 자식들을 괴롭힌다는 항간의 시선이 달갑지 않았을 뿐더러, 자칫 경혜공주를 건드렸다가 여론의 역풍을 맞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였는지 세조는 정종을 유배하라는 명만 내렸을 뿐 기실 정종과 경혜공주는 한양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실록에 적혀있는 바에 따르면 세조 1년 8월까지 경혜공주는 정종과 함께 서울 모처 자신의 집에서 생활했다. [공주의 남자]에서는 경혜공주가 세조에게 석고대죄를 올려 사형 위기에 몰린 정종을 겨우 구해내는 걸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세조의 배려로 인해 정종과 경혜공주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셈이다. 이 때 경혜공주는 병을 핑계삼아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이 때문에 유배지로도 떠나지 않았다.


허나 경혜공주와 정종이 서울 한복판에 살고 있음을 불길하게 생각한 한명회 등은 "경혜공주의 병이 다 나았으니 정종과 경혜공주를 유배지로 돌려 보내라" 며 세조에게 항의했다. 허나 이 때에도 세조는 즉답을 피한채 "생각해 보겠다"는 답변만을 내놓았다. 정종과 경혜공주를 끝끝내 유배 보내지 않은 것이다. 심지어 그 해 9월에는 사냥에서 잡은 짐승을 경혜공주에게 선물로 줬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하지만 세조 2년 상황이 급변한다. 정종이 사육신 등과 함께 단종 복위 모의를 하였음이 발각되면서 세조의 진노를 사게 된 것이다. 정종과 경혜공주에게 크나큰 배신감을 느낀 세조는 정종을 광주로 유배보내고 경혜공주 역시 정종을 따라가게 만든다. 경혜공주가 본격적으로 정치적 탄압을 받은 것도 바로 이 때부터다. 이 시기 실록에 경혜공주는 '정종의 처'로 기록되어 있다. 공식적으로 작호가 거둬진 것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야사에서처럼 순천 노비로 전락했단 이야기는 남아있지 않다.


게다가 정종을 따라 유배 보내질 때 경혜공주는 걸어가지 않고 교자를 타고 내려갔다. "가마를 사용하는 것을 허한다"는 세조의 특별한 명령에 따라 가마를 타고 광주까지 내려간 것이다. 칭호는 정종의 처로 격하되었으나 왕족으로서 최소한의 대우는 허락한 셈이다. 이 후, 정종이 능지처참 당하고 나자 세조는 다시 경혜공주를 서울로 불러들였다. [공주의 남자]가 그린 것처럼 정희왕후가 경혜공주를 면천하여 데리고 온 것이 아니라 세조 스스로 경혜공주를 다시 데리고 온 것이다.


다만, 실록의 기록에서는 신료들의 반발을 의식한 세조가 정희왕후 윤씨의 간청임을 핑계 삼아 "정종의 처는 문종의 유일한 적녀로서 죄가 없으니 박해하지 말 것이며, 집과 곡식을 내리도록 하라" 라는 명령을 내린 것으로 되어있다. 어찌되었든 세조로선 단종 문제와는 별개로 경혜공주에게는 최선의 노력을 다한 셈이다. 이 시기 실록은 경혜공주를 정종의 처에서 영양위 공주로 기록하다가 1462년부터 다시 '경혜공주'라는 정식 명칭을 사용한다.


이 뿐 아니라 세조는 사위인 정현조에게 경혜공주가 살만한 큰 집을 마련하라고 명령했을 뿐 아니라 속공노비 50명과 녹봉을 지급하라는 명령까지 내린다. 세조가 죽은 뒤에도 경혜공주에 대한 왕실 차원의 후한 대접은 계속되어 정종의 반란으로 빼앗겼던 재물과 백금 등을 돌려 받았고, 그녀의 아들인 정미수의 벼슬길 역시 열리게 된다. 왕실 차원에서 마땅히 서용하라는 예종의 명령에 따라 정미수가 본격적인 관리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세조 실록이 다소 세조를 미화한 측면이 없다곤 할 수 없으나 실질적으로 경혜공주에 대한 세조의 태도는 그리 박한 편이 아니었다. 부인이었던 정희왕후 윤씨나 아들 예종은 물론이거니와 세조 그 스스로도 경혜공주를 문종의 유일한 적녀로서 존중하고 대우했다. 정종의 반란으로 그녀를 유배보낸 적은 있으나 관비로 전락시켰다는 이야기를 찾아볼 수 없단 점에서 공식적으로 그녀가 노비 생활을 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만약 노비생활을 했더라도 그 기간은 매우 짧았을 뿐더러, 형식상의 형벌이라고 보여진다.


혼란의 난세에 태어나 동생과 남편을 모두 세조의 손에 잃으며 회한의 삶을 살았던 경혜공주였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와 그녀의 아들딸의 목숨을 살려낸 것 또한 세조였다. 경혜공주는 1473년 33살의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었으나 그녀의 아들은 훗날 부원군의 자리까지 오르는 등 승승장구했고, 왕실 역시 그녀의 장례 뿐 아니라 자식들에게까지 후한 대접을 아끼지 않았다. 공주로서 최소한의 명예만은 지키게 된 셈이다.


지금 경혜공주의 묘는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에 머물러 있으며, 그녀의 남편 정종 역시 그녀 곁에 안치되어 있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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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license119.com/newki BlogIcon 자격증무료자료받기클릭 2012.05.27 11: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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