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도전>이 그 오랜 시간 신뢰를 쌓아올린 것은 그만큼의 퀄리티를 보장하기 때문이지만 <무한도전>이라고 해서 항상 대중을 만족시키고 웃음을 창출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번 <무한도전>의 콘셉트였던 ‘웃음 사냥꾼’은 역대 최악의 콘셉트 중 하나로 기록될 만큼 재미를 담보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 번의 실수로 <무한도전>에 대한 신뢰도가 깎이는 것은 아니다. 이번의 아쉬움은 충분히 만회할 만큼 <무한도전>에 대중이 보내는 신뢰는 두텁다.
‘웃음 사냥꾼’의 처참한 실패보다 더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는 박명수의 캐릭터에 있다. 웃음사냥꾼은 철저히 박명수가 중심이 되는 기획으로 박명수 자신이 생각해 낸 콘셉트였다. 그러나 사실상 그의 능력의 밑천을 들어내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 가장 큰 실책이다. 웃음 사냥꾼의 콘셉트는 전국에 재미있는 일반인들에 대한 정보를 SNS로 제공받아 그들을 찾아가 그들의 웃음 포인트를 시청자들에게 전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아무런 세팅이 없는 상황에서 무작정 ‘웃겨보라’는 요구는 도저히 합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프로 코미디언 조차 아무런 맥락이 없는 상황속에서 ‘웃기라’는 요구를 받고 만족할만한 웃음을 창출하기 힘들다. 그게 가능했다면 아무런 콘셉트 없이 단순히 코미디언들이 나와서 대중에게 웃음을 전하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아무리 예능이라고 해도 프레임이라는 것이 있다. 이를테면 <1박 2일>은 여행과 복불복, <진짜 사나이>는 군대라는 프레임이 있는 것이다. <무한도전>역시 어떤 특집을 할 때, 프레임을 짜고 그 안에서 캐릭터를 활용한다. 그러나 웃음 사냥꾼은 어떤 프레임도 없이, 무작정 웃겨보라는 요구를 받은 일반인들의 당황함만이 그대로 노출되고 말았다. 그런 그들의 당황스러움이 웃음을 창출했다면 모르지만, 어색한 분위기만 강조되고야 만 것이다.
웃기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박명수의 반응은 격했다. 웃기지 못하는 그들에게 짜증에 가까운 질책을 하고 그들을 추천한 추천인들에게까지 책임을 추궁한 것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출연료를 받고 일하는 프로들이 아니다. 그들을 활용해 웃겨야 하는 것은 그곳에 있는 무한도전 멤버들의 책임이다. 그런 상황에서 웃음을 창출하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어 낸 것은 바로 프로인 박명수다. 예능계에서 수십년을 버텨낸 박명수조차 그런 맥락없는 상황속에서 웃음을 만들어 내지 못한 것은 똑같다. 그러니 그 상황에서 ‘웃기지 못한다’는 질책은 오히려 박명수가 받아야 한다. 박명수가 짜증을 내는 상황은 ‘책임 전가’에 가까웠던 것이다.
냉정하게 생각해 봤을 때 박명수의 호통을 치는 강한 캐릭터는 <무한도전>에서만 유효하다. 그것은 박명수 역시 <무한도전>의 프레임 안에서 혜택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무한도전>의 수만은 특집 속에서 박명수의 다소 과한 행동과 맥락없는 개그는 캐릭터로서 받아들여지기에 이르렀다. ‘거성’과 ‘하찮은’ 캐릭터를 동시에 내보이면서 무작정 강하지 않고 사실은 망가지는 캐릭터를 획득하게 만든 것은 온전히 <무한도전>의 힘이었다.
<무한도전>이라는 프레임을 벗어나면 박명수는 도를 지나치는 행동과 자신의 캐릭터 사이에서 방황한다. 그것은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 박명수가 출연했을 당시 들었던 혹평만 보아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박명수는 자신의 캐릭터를 분석하여 영민하게 대중에게 어필하는 예능인이라고는 할 수 없다. 때로는 지나친 욕심에, 때로는 부적절한 언동으로 대중과 소통에 실패하고 만다. <무한도전>의 ‘평균 이하’ 콘셉트에 박명수의 캐릭터가 활용도가 높지 않았다면, 박명수의 이미지역시 지금과 같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한도전>에서 만큼은 박명수의 캐릭터가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 <무한도전>에서 박명수가 비호감이 되는 순간, 박명수의 캐릭터 자체에 대한 호감도에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강하지만 사실은 그저 ‘하찮을’뿐인 박명수가 아니라, 실제로 남들을 무시하고 윽박지르는 성격의 인물 자체가 되어 버린다면, 그것은 예능의 캐릭터가 아니라 단순한 벽창호에 불과하다. 박명수를 돋보이게 할만한 프레임을 가지지 못한 웃음 사냥꾼 특집이 박명수에 대한 비난으로 끝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박명수는 자신의 캐릭터를 스스로 감당해 낼만한 그릇이 아닌 것이다. 다만, 그 캐릭터가 콘셉트와 잘 들어 맞을 때, 그의 개성은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다. 박명수가 해야 할 일은 자신만 돋보이는 콘셉트를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장 잘 어울릴 수 있는 프레임을 찾는 일이다. 그것이 개성이 지나치게 강한 박명수가 살아남은 비법이요, 그가 앞으로도 예능인으로서의 수명을 연장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