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의 이미지를 배반하고 실망감을 준 유명인들이 한국사회에서 져야 하는 십자가는 무겁다. 그들의 사생활이라 할지라도 물의를 일으킨 유명인들에 대한 단죄는 평생을 따라다니는 꼬리표가 되기도 한다.

 

 

유승준과 에네스 카야 역시 그들이 배반한 이미지에 대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룬 사례다. 유승준은 바른 청년이미지로 군 입대를 꼭 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으나 미국 국적을 취득하며 한국에 무려 15년 동안 입국 금지를 당했다. 그러나 그는 최근 한국에 돌아오겠다고 수차례 언론에 자신의 처지를 호소했다. 그러나 병무청 측에서 그를 받아들일 기미가 없자 그는 마침내 자신의 입국금지를 철회해 달라는 소송을 내기에 이르렀다.

 

 

 

에네스 카야는 tvn예능 프로그램 <비정상 회담>에 출연해 터키 유생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 이유는 그의 유창한 한국말과 더불어 여자를 사귈 때는 결혼할 마음으로 사귄다거나 바람피우는 남자는 우리나라엔 없다는 등의 발언으로 보수적인 성격을 띤 발언을 다수 했고, 때로는 자유로운 사상을 가진 다른 패널들과 부딪치며 마치 조선시대의 사고방식을 가진 것처럼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그가 불륜을 저질렀다는 의혹에 대한 파장은 그래서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신기하게도 유승준과 에네스 카야는 한국의 복귀를 타진하며 비슷한 어조의 발언을 사용했다. 유승준은 입국금지를 철회해 달라는 소송을 내며 고통받았다.”는 말로 동정심에 호소했고, 에네스 카야는 한국의 한 소속사와 계약을 맺으며 가족을 위해 싸울 것이라는 인터뷰를 했다. 이들의 말은 그들이 피해자일 경우에만 할 수 있는 말이다. 유승준의 국적 포기는 사회적인 파장을 일으킬 만큼 거대한 파급효과를 일으켰고, 에네스 카야의 불륜 논란 역시 충분히 대중의 분노를 자아낼만한 황당한 사건이었다. 그런 그들이 자신들의 고통을 호소하고 누군가와 싸운다는 표현을 쓰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 “사과는 하겠지만 억울하다는 식의 발언으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들의 국적은 모두 한국이 아니다. 유승준은 이미 미국 국적을 선택한 시점에서 한국인으로서의 의무를 져버렸고, 에네스 카야는 애초에 터키인이다. 그들이 한국에 돌아오고 싶어 한다면, 그들이 한국에서 누렸던 인기와 혜택을 누리고 싶기 때문이라고밖에 해석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들이 누렸던 혜택은 대중이 그들에게 우호적이었을 경우에만 유효한 것이었다. 그들에 대한 대중의 기대감이 없고, 오히려 불편함만 남았다면 그들은 오히려 마이너스의 존재일 뿐이다. 그들이 사회적으로 논란만 일으키는 존재라면 굳이 외국인을 국내에 받아들여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책임은 없고 권리만 있는 그들에 대한 대중의 시선이 싸늘한 이유다.

 

 

 

유승준은 군대갈것이냐는 질문에 생각해 보겠다고 답할 수 없었다고 전했고 에네스 카야는 스스로 유생이라 한 적이 없다며 자신의 억울함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변명에 불과하다. ‘군대를 통해 자신의 바른 청년이미지를 강조한 것은 유승준이었고, ‘유생의 이미지를 활용해 인기를 언고 광고와 예능에 출연한 것은 에네스 카야였다. 그들의 문제는 그들이 상당한 이득을 누리고 있을 때는 그런 이미지를 활용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그 이미지를 자신이 의도적으로 만들지 않은 것으로 회피하고 있는 것이다. 의도적이었든 그렇지 않든, 자신들이 누리던 것이 자신들의 이미지에 일정부분 빚을 지고 있다면 그런 이미지가 짐이 되는 것 또한 그들의 몫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의 복귀가 전혀 마음에 와닿지 않는 것 또한 그들에게 동정한 여지가 없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언론을 이용하고 있다. 자신의 입장을 전하기 위해 유명인이라는 자신의 위치를 활용하여 인터뷰를 하고 기사를 낸다. 그러나 대중이 그들을 보는 시선은 앞에서는 대중에게 사과를 하는 척 하지만 뒤에서는 언제든 뒤통수를 칠 준비가 되어있는 이중적인 사람들일 뿐이다. 그 이중성을 회복하기에는 때가 너무 늦었다. 유승준은 국적 포기를 하지 않았어야 했으며, 에네스는 여성들과의 은밀한 문자를 주고받지 말았어야 했다. 잘못을 저지르고 진정으로 용서받고 싶다면 상대방의 감정을 이해하고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나 그들의 억울함은 상대방의 감정을 생각지 않은 일방적인 밀어붙임이다. 그들이 정말로 반성하고 용서받고 싶다면 한국으로 돌아오겠다고 소송을 걸거나 싸우겠다며 전의를 불태워서는 안된다. 단 하나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나라로 돌아가 살아가는 것이다. 한국은 그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어 보인다.

Posted by 한밤의연예가섹션
,

 

 


<슈퍼스타K 시즌7(이하<슈스케7>)>가 그 어느때 보다 초라한 막을 내렸다. 최초의 여성 우승자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관심몰이가 이어졌고  케빈오의 반전 우승으로 끝났지만 여기에 쏟아지는 관심은 미미한 수준인 것이다. 오히려 <슈스케7> 방영 내내 가장 화제가 된 것은 신예영과 방송사측의 진실공방이었다. 신예영 측은 왜곡된 편집과 계약 강요를 주장했고 방송사인 Mnet측은 사실 무근을 주장하면서도 물의를 일으킨데 대한 사과를 했다. 그러나 이 진실공방에 숨겨진 진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진실공방으로 인해 대중이 <슈스케>에 갖는 이미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는 것이었다.

 

 

 

이미 대중의 시선에서 <슈스케>는 비호의 대상이 아니다. 시즌 초반 뛰어난 참가자들이 대거 출연할 것이라는 티저로 기대감을 증폭시키는 듯 해 보였으나, 결국 참가자들에 대한 실망으로 시즌이 마무리 되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심각한 것은 오디션 자체에 대한 불신이다. 그 불신은 오디션에 대한 애정의 결여로 인해 나타난다. 우승자가 누구든, 과정이 어떻든 시청자들에게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오디션에 내려진 사형선고와도 다름없다.

 

 

 

 

<슈스케>는 일곱 번의 시즌이 방영되는 동안 논란이 유독 심했던 오디션 프로그램이었다. 논란 자체는 프로그램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단지, 논란이 프로그램의 인기에 상응하여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프로그램을 잠식하는 형태라면 문제는 심각하다.

 

 

 

그러나 사실 <슈스케>의 몰락은 예견된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바로 전 시즌인 <슈스케 6>는 악평보단 호평을 들었던 시즌임에도 불구하고 우승자에 대한 관심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초라했다. 우승자 곽진언이나 준우승자 김필의 이름은 여전히 대중적이지 못하다. 호평을 받은 시즌조차 이런데 역대 최악의 시즌으로 불리는 <슈스케 5>는 말할 것도 없다. 이제 <슈스케>는 그 생명력을 다했다.

 

 

 

 

비단 <슈스케>의 문제만은 아니다. 이미 오디션 프로그램은 대세에서 멀어진지 오래다. 그나마 살아남은 프로그램이라 하면 <K팝스타>정도를 들 수 있는데, <K팝스타>조차 대형 기획사의 오디션이라는 특장이 없었다면 시즌이 거듭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사실 <K팝스타>역시 이하이나 악동뮤지션을 배출하던 시절과는 관심의 농도가 다르다. 벌써 시즌3와 시즌4의 우승자인 버나드박이나 케이티김의 이름조차 가물가물한 지경에 이르렀다. 단순히 시간이 흘렀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은 우승할 당시에도 예전과 같은 파급력을 몰고 오지는 못했다. 그들이 추후에 성공을 거둔다 하여도 그것은 오디션의 힘이라기보다는 기획사의 기획력이라 볼 수 있다.

 

 

 

신선하고 특별하며, 음악성까지 갖춘 괴물같은 참가자라도 발견되지 않는 한, 오디션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유형의 인물들은 이미 시청자에게도, 심사위원에게도 낯설지 않다. 심사위원들은 매시즌 주구장창 ‘대단하다’ ‘천재다’ ‘감동이다’ 같은 단어들을 남발하지만 그것들이 시청자들의 감정과 동화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어떤 재능을 ‘포장’하는 기술이 아니라 실질적인 천재를 만나는 일은 이미 익숙해져버린 오디션의 방식 속에서 점점 어려운 일이 되고 있다.

 

 

 

 

 

이 와중에도 성공한 기획이라면 <쇼미더머니>나 <언프리티 랩스타> 등, 힙합 장르 오디션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힙합 장르의 오디션은 프로들의 장에 가깝다. 그들은 대중에게 익숙하지 않다 하더라도 대부분 참가자들은 대형 기획사의 연습생이고 이미 뛰어난 실력으로 유명한 래퍼들이다. 게다가 힙합 오디션의 성공은 힙합이라는 컨텐츠의 승리라고 보아야 한다. 서로의 약점을 공격하는 ‘디스 배틀’이라든가 이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한 ‘랩’이라는 장르에 대한 환호지 오디션 자체에 대한 열광은 아니다.

 

 

 

 

이미 오디션은 한 물 간 것으로 여겨진다. 노래를 다루는 방식은 좀 더 재밌어지고 교묘해져야 한다. 이를테면 복면을 쓰고 노래를 한다거나, 실제 가수와 똑같은 목소리로 노래한다거나 해야 하는 것이다. 이미 트렌드는 노래에서도 반전을 가미한 쪽으로 틀어졌다. 단순히 누가 누가 더 잘하는가 하는 식의 레파토리는 이제 너무나도 식상하다. 그 식상함을 날리기 위해서는 더 뛰어나고 더 훌륭한 참가자가 필요한데, 그 참가자들을 확보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말하자면 <슈스케>류의 오디션 프로그램은 컨텐츠 싸움에서 밀린 셈이다. 장르에 대한 구심점도, 노래를 가르는 방식에 대한 특별함도 오디션 프로그램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잘하기는 하지만 ‘극찬할 수준’인가 싶은 참가자들을 놓고 심사위원들끼리 하는 감탄과 경외는 오히려 오디션을 더 촌스럽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야 만다. 오디션의 꺼져가는 불씨를 살리는 것은 과연 가능한 일일까. 공개적인 오디션으로 더 이상 ‘스타 탄생’이 어려운 이 시점에서, 기획사의 비공개 오디션이 아닌 공개 오디션 프로그램들은 굳이 싫다는 사람을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착각만은 아닌 것 같다.     

Posted by 한밤의연예가섹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