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합의 민족>은 최근 출범한 음악 예능 중 가장 신선하다. 너무 신선하다 보니 다소 낯선 측면도 있을 정도다. 힙합 열풍을 타고 만들어진 이 예능은 할머니와 미국의 랩퍼 에미넴을 합성한 ‘할미넴’을 소재로 삼았다. 젊은층의 문화라고 여겨졌던 힙합을 나이든 여성에게 적용시킨다는 콘셉트는 이질적이지만 그만큼 새롭다.
초반 <힙합의 민족>의 시청 포인트는 웃음일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평소 욕설 연기로 유명한 원로배우들이나 캐릭터가 강한 출연진들의 캐스팅은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이미지를 활용하여 웃음 포인트를 만들어 낼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게 했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힙합의 민족>은 생각보다 진지하고 보기보다 열정적이었다. 웃음이 목적이 아니라 그들이 힙합을 배우며 실력이 진화하는 과정이 주가 된 것이다. 실제 유명 래퍼들과 함께 무대에 오른 할미넴들은 관객들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준비하는 모습을 보이며 힙합을 단순히 예능을 위한 희생양으로 만들지 않는다.
원로배우 김영옥부터 도무지 초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실력을 보여주고 있는 문희경, 김영임까지 무대에 오른 그들은 누가뭐래도 래퍼다. 그들의 나이에 상관없이 자신만의 플로우를 보여주고 리듬을 만들어내는 모습은 그들이 단순히 재미를 위해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 더군다나 직접 쓴 가사로 무대에 오를 때는 오히려 젊은이들이 갖지 못한 연륜과 세월이라는 무기가 더해진다. 그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가슴을 울리는 것이다.
때때로 한국인은 ‘한(恨)’의 민족이라고 한다. 마음속에 억눌린 감정이나 슬픈 이야기들을 가지고 산다는 것인데, 한국인들은 이 한이라는 정서를 그대로 쌓아두지 않고 다양한 방법으로 표출해 왔다. 민요나 판소리, 시에 이르기까지 마음속에 남아있는 감정을 발산하는 방법을 찾아왔던 것이다. 힙합 역시 한의 정서가 있다. 힙합은 빈민가의 흑인들이 자신들의 억눌린 감정을 분출하고 자유를 외치던 문화에서 출발하였다. 그 자체로 저항이나 해방의 감성이 녹아 들어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힙합 역시 시간이 흐르며 정제되고 발전해 나왔지만 자유롭고 즉흥적이었던 그 본질만큼은 잊어서는 안된다.
할머니들이라고 힙합을 할 수 없으리라는 것은 말그대로 편견일 뿐이었다. 힙합은 누구나 즐길 수 있고 향유할 수 있는 문화여야 한다. 나이나 인종, 성별에 차별이 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신나게 즐긴다면 그것이야말로 힙합의 본질이다. 누가 더 랩을 잘하고 디스를 잘하느냐가 힙합 예능의 주된 스토리였다면, <힙합의 민족>은 그 스토리를 확 뒤집어 논란이나 자극없는 할머니들의 자유로운 영혼을 표현하고 있다.
나이는 숫자일 뿐이라고 외치지만 여전히 우리는 나이라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 나이가 들수록 보수적이고 고루할 것이라는 편견은 우리 사회가 허물어야 할 벽 중 하나다. 반대로 젊다고 해서 마냥 철부지인 것도 아니다. 세대마다 공유하는 문화가 있는 것은 사실일지 모르지만 그 문화를 특정층의 특권으로 치부할 때 생기는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언제나 열린마음으로 새로운 계층의 유입을 받아들일 때, 그 문화는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할머니들의 힙합이라고 비웃을 수만은 없게 되었다. 욕설이나 공격만이 부각되었던 힙합 경연예능에서 인생의 단면을 조명하는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비록 <쇼미더머니>나 <언프리티 랩스타>같은 파급력은 없지만 힙합의 문화를 젊은 층만이 할 수 있는 특정계층의 문화가 아닌, 누구나가 향유하고 공유할 수 있는 문화라는 점을 부각시킨 것만으로도 <힙합의 민족>에서 의미를 찾기 충분하다.
누구나 무엇이든 될 수 있고, 하고자 마음을 먹으면 할 수 있다. 무엇을 하기에 너무 젊은 나이도, 늙은 나이도 없다. 이것이 바로 힙합정신이고 힙합이 추구하는 본질적인 가치가 아닐까. 욕설과 디스만이 힙합의 전부가 아니라 바로 이 순간 즐기고 도전하는 그 자세. 그런 힙합의 본질을 <힙합의 민족>의 할미넴들에게서 확인하게 될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의 빛나는 도전 속에서 진정한 힙합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