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그리고 영화/TV STORY'에 해당되는 글 683건

  1. 2017.05.26 '여왕'이 되지 못한 최강희...<추리의 여왕>에는 추리가 없다
  2. 2017.05.25 <웃찾사> 종영....웃음을 찾는 사람들이 아닌, 웃음을 구걸하는 사람들
  3. 2017.05.24 <귓속말> 종영...왜 이보영과 이상윤의 존재감은 보이지 않았을까.
  4. 2017.05.23 <섬총사>...김희선은 <삼시세끼>를 뛰어넘을 새로운 뮤즈가 될까. (2)
  5. 2017.05.22 - 또 타임슬립에 반복되는 수사물, 그럼에도 불구하고 <터널>을 볼 수밖에 없었다.
  6. 2017.05.12 - <아버지가 이상해> 왕따와 동거에 대한 황당한 시선....아버지보다 자식들이 더 이상해 (1)
  7. 2017.05.08 이영애, 고소영, 권상우...작품보다 컴백한 톱스타들의 이름값이 우선시될 때 벌어지는 일
  8. 2017.05.01 <은위> 시대를 거스를 예능이 보여주는 실패....은밀하지만 위대하지 않은 몰카의 가학성
  9. 2017.04.29 아이유를 누르고 1위한 라붐....뮤직뱅크가 아니라 조작뱅크? 가요프로의 몰락에는 이유가 있다.
  10. 2017.04.26 주연보다 주목받는 월화극 사이코패스들의 공통점
  11. 2017.04.18 고삐풀린 SNL, 정치풍자 코미디를 통해 본 언론이 정치와 결탁하면 안되는 이유
  12. 2017.04.17 <아버지가 이상해>가 학교폭력 피해자를 다루는 방식, 또다른 폭력은 아닐까.
  13. 2017.04.14 스펙을 극복하지 못하는 '추리의 여왕'?....주인공은 왜 굳이 ‘주부’여야 했을까.
  14. 2017.04.13 <살림남>속 백일섭이 보여주는 우리시대 아버지의 초상

권상우와 최강희가 주연을 맡은 <추리의 여왕>은 추리라는 소재에 여성 탐정을 내세웠다. 보통 추리물이나 수사물에서는 여성의 역할이 크지 않다. 끔직한 범죄의 현장에서 사건을 해결하는 주체는 주로 남성이다. 주로 여성은 이를 보조하거나 주변인으로만 등장한다. <추리의 여왕>은 그러나 타이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추리의 주체가 여성이 되는 드라마다. 단순히 여성을 넘어 '흙수저'에 가까운 캐릭터다. 엘리트나 전문적인 트레이닝을 받은 여성이 아닌, 뛰어난 추리력을 갖고 있으나 아무 ‘스펙’이 없는 아줌마다. 평범한 아줌마가 사건을 해결한다는 지점은 분명 수사물의 전형성을 뒤집는 설정이다. 그러나 과연 <추리의 여왕>은 추리의 과정에서 여주인공을 ‘여왕’으로 만들었을까.

 

 

 



시즌2 염두해 둔 마지막 회...적절했나?

 

 

 

 

 

 

<추리의 여왕>은 마지막회까지 통쾌한 사건의 해결을 보여주지 않는다. 여자 주인공 유설옥(최강희 분)은 부모님의 죽음, 남자 주인공 하완승(권상우)는 여자친구 서현수의 죽음의 진실이라는 해결과제가 있으나 마지막회에서도 그 사건들의 해결은 확실한 종결점을 맞지 않는다. 특히 마지막에 달해서야 신현수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사건은 애매모호한 지점에서 끝이 난다.

 

 

 


이는 열린 결말과는 궤를 달리한다. 열린 결말에서도 마지막 회에서 이야기의 흐름은 마무리가 되어야 한다. 마무리 된 지점에서 주인공의 선택을 애매모호하게 남겨 놓거나 이야기가 앞으로도 계속 진행될 거라는 뉘앙스를 주는 것은 열린 결말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해결하려던 사건이나 던져놓은 상황들이 종결되지 않는 상황에서 끝이 나는 것은 중간에 끊긴 느낌을 줄 뿐이다.  

 

 

 


<추리의 여왕>의 결말은 시즌 2를 장담할 수 없는 한국 드라마 환경에서는 적절한 선택이라고 할 수 없다. 추리의 여왕 cp는 이에대해 “애초에 시즌2를 염두해 두고 제작했다. 여건되면 제작 할 것”이라고 밝혔으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건이 되면’이라는 단어다. 한국에서는 드라마가 잘돼도 성적이 좋지 않아도 시즌 2제작이 쉽지 않다. 성적이 좋으면 드라마로 이름값이 올라간 주연 배우들을 다시 한데 모으는 것이 쉽지 않고, 성적이 나쁘면 제작 자체가 추진되지 않는다. 시즌제는 한국 드라마 환경에서 정착되기 힘든 시스템이다.

 

 

 



여왕을 만들지 못한 빈약한 추리의 과정

 

 

 

 

 

아쉬운 마무리도 마무리지만, 과연 이 드라마가 <추리의 여왕>이라는 타이틀을 설득시키는 스토리를 선보였는가 하는 지점역시 생각해 볼 문제다. 주인공 유설옥은 뛰어난 추리력을 가지고 사건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지만, 추리의 과정에서 그가 가진 능력에 탄복을 하게 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추리의 흐름이 기승전결을 갖추고 유려하게 전개되지 않기 때문이다. 초반부터 오히려 뛰어난 추리력 보다는 민폐가 되는 상황을 보여주는 여자 주인공은 추리의 ‘여왕’이라기 보다는 ‘시녀’ 쯤으로 묘사된다.

 

 

 


 

각종 어려움을 딛고 뛰어난 추리력을 선보이며 사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를 기대하는 시청자의 기대는 무참히 짓밟히고, 단순한 사실이나 작은 증거들만을 바라보는 유설옥은 추리의 ‘여왕’이라고 부르기엔 한참 모자르다. 제작진은 이를 ‘생활 밀착형 추리’라고 포장하지만, 시청자들은 추리의 과정에 대한 스토리의 빈약함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추리물에 필수적인 사건의 발생과 해결, 그리고 반전이라는 요소는 이 드라마 속에서 그다지 큰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결국 주인공의 활약도 따라서 약해질 수밖에 없다.

 

 

 

 

 

 

마지막에 이르러서까지 범인에게 납치당하거나 총을 맞는 여주인공을 구해주는 것은 결국 남자 주인공이다. 여자 주인공의 주체적인 활약이나 스스로의 능력 발휘는 이 드라마에서 확실한 포인트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마지막까지 결국 ‘여성은 남성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편견을 전혀 극복하지 못한 모양새다.

 

 

 


 

이는 드라마의 흐름이 ‘추리’에 초점을 맞춰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는 드라마에 소위 ‘떡밥’이라고 부르는 수많은 해결과제를 던진다. 그러나 그런 떡밥을 던지고 시청자들을 낚시 하는 스킬은 지나치게 안일하다. 사건의 발생과 흐름, 그리고 해결의 과정에 있어서 시청자들이 예상치 못한 흐름을 전개시키지 못하고, 사건을 확장시키는데도 실패한다. 결국 마지막까지 회수되지 않는 수많은 ‘미끼’들은 드라마의 유기적인 구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는 의도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작가의 역량 부족처럼 느껴진다.

 

 

 


이런 상황속에서 이 드라마는 추리물의 장점을 잃어버린다. 시청자들이 열심히 사건을 분석하고 사건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는 모습은 이 드라마를 통해서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려거든 사건의 해결점이라도 명확해야 하는데, 던져놓은 상황들을 스스로 수습하지도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유설옥이 ‘여왕’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추리의 여왕>은 새로운 한국형 추리물의 탄생을 성공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여성 캐릭터 활용의 한계를 다시한 번 보여주고야 말았다. 남성을 뛰어넘는 뛰어난 능력을 지닌 진정한 수사물의 ‘여왕’의 탄생은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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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의 선택을 받지 못한 엔터테이너의 끝은 비참하다. 연예인을 꿈꾸는 수많은 사람 중 스타가 될 수 있는 사람은 단 1%. 나머지 99%는 대중의 뇌리에서 사라져간다. 스타의 자리는 바늘 구멍을 뚫는 것과도 같이 좁은 문이다. 특히나 요즘처럼 스타를 꿈꾸는 사람이 늘어만 가는 상황 속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같은 맥락으로 대중의 선택을 받지 못한 프로그램의 종영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다. <웃음을 찾는 사람들>(이하 <웃찾사>)의 종영 역시 대중의 선택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결정된 일이다. 그러나 유독 <웃찾사>의 종영을 안타까워 하는 코미디언들의 목소리가 높다. 그 이유는 코미디언이 설 자리가 부족해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SBS는 지난해 16기 공채 개그맨을 뽑은 상태였다. 현재 <웃찾사>에 출연하는 신인 코미디언들은 결국 1년도 채 채우지 못하고 방송에서 '잘릴' 위기에 처했다.

 

 

 


코미디언의 설자리, <웃찾사>가 만들어 주나

 

 

 


코미디언들은 이를 두고 '개그 의지를 꺾는 무자비한 상황'이라고 일컫는다. 방송사의 책임론도 불거졌다. 물론 SBS측이 공채를 뽑고도 제대로 활용을 하지 않는 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웃찾사>가 끊기면 <웃찾사>가 유일한 프로그램인 신인 코미디언들의 수입도 끊긴다. SBS측은 아나운서와는 달리 공채 코미디언에 대한 월급은 지급하지 않고 있다. 방송에 출연해야만 출연료를 받을 수 잇는 것이다. 코미디언들의 절박한 상황은 분명 안타깝다.

 

 

 


그러나 안타까움과는 <웃찾사>의 존속은 별개다. 신인 코미디언들을 뽑고도 활용하지 못하는 방송사의 안일한 행동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웃찾사>의 존속으로 해결할 문제는 아니다.

 

 

 


<웃찾사>는 2003년 공개 방청 코미디의 열풍을 타고 시작되었다. 2017년에 이르기까지 <웃찾사>는 무려 14년에 걸쳐 방영되었다. 초반에는 어느정도의 관심을 얻는데 성공했지만, 근 10년 동안 <웃찾사>를 대표하는 코너는 단 하나도 탄생하지 않았다. 시청자들의 관심은 멀어졌고, 시청률은 2%대로 떨어졌다.  TVN의 <코미디 빅리그>(이하<코빅>)와 비슷한 수준이거나 더 낮다. 채널의 이점을 생각하면 더블 스코어 정도는 시청률의 차이가 나는 셈이다. 시청률이 곤두박질 친 상황 속에서 화제성을 잡는데도 실패했다. 방송사 입장에서는 마이너스 프로그램이다. 14년동안 <웃찾사>가 지속될 수 있었던 것 역시 '코미디언들의 설자리'라는 명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으면 14년간 지속될 수 있을지조차 의문인 성적이었다.

 

 

 


이미 공개 방청코미디는 트렌드가 아니다. 한때 시청률 30%를 넘기고, 꾸준히 두자리수 시청률을 유지해 왔던 <개그 콘서트>조차 시청률은 한자릿 수로 곤두박질 쳤다. 공개 방청 코미디가 대세였던 시대는 이미 한참 지났다. 슬프지만, 트렌드는 변한다. 그 트렌드를 따라잡지 못하면 도태되는 것은 당연하다. <웃찾사>는 포맷부터 트렌드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은 포맷을 변화시키거나 트렌드를 다시 찾아 오는 일이다. 그러나 <웃찾사>의 개그를 보자. 10년 전의 코미디에 비해 전해 발전하지 못했다. 분장이나 유치한 말장난, 외모 비하, 성대모사 등 이미 수차례 목격한 코미디만이 반복되고 있을 뿐이다. <웃찾사>는 이에 <코빅>의 대결 구도를 빌려와 '레전드 매치'라는 이름을 사용해 토너먼트를 진행했다. <웃찾사>만의 아이디어로 한계를 돌파해 보려 하는 것이 아닌, 타 프로그램의 아이디어를 도용한 셈이다. 그 안에서도 나름의 재미를 주는 코너를 개발한다면 모르지만, 포맷을 변경하고도 <웃찾사>는 이전의 매너리즘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했다.

 

 

 


매너리즘에 빠진 코미디, 냉정하게 말하자면 코미디언들의 직무유기다.

 

 


'콩닥콩닥 민기쌤'같은 코너를 예를 들어보자. 실제 커플이 등장하는 것으로 신선함을 만들어 보려 했지만, 그 안에서 보여주는 코미디는 전혀 신선하지 않다. 웃음 포인트는 이상한 포즈를 짓거나 우스운 표정이나 굴욕적인 소품을 착용하는 몸개그에 지나지 않는다. 의표를 찌르는 재미는 처음부터 찾을 수가 없다. '콩닥콩닥 민기쌤'을 예로 들었으나, <웃찾사>의 모든 코너가 이런 식이다. 단순히 행동을 과장하고 개인기를 펼쳐보인다고 하여 웃음이 창출되지는 않는다. 시청자들이 공감을 할 수 있는 이야기나 스토리, 그 안에 반전 요소가 적절하게 버무려진 아이디어가 있어야 하지만 그런 기지는 <웃찾사>에서 찾아 볼 수 없다.

 

 

 


대놓고 말하자면 이는 코미디언들의 직무유기다. 대중에게 웃음을 제공할 수 없는 코미디언은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다. 물론 정형돈이나 김영철 처럼 '안웃기는 캐릭터'를 설득시키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그러려면 공개 코미디로는 불가능 하다. 리얼 버라이어티처럼 사람 자체의 캐릭터를 공감가게 만들고, 호감형으로 전환 시키는 캐릭터 쇼가 아닌 공개 코미디에서는 방청객을 무조건 웃겨야한다. 문제는 <웃찾사>는 채널을 고정할만큼 우습지 않다는 것이다. 우습지 않으니 화제성이 없다. 화제성이 일때는 '흑인 비하'같은 부끄러운 논란이 일 때 뿐이다. 

 

 

 


웃음이 없는 코미디 프로그램이 활력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느새 시청자들이 시청해야 할 이유가 없는 프로그램이 된 <웃찾사>는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연예인 뿐 아니라 회사에서도 일처리를 제대로 못하는 직원들은 해고 당한다. 말하자면 웃기지 못하는 코미디언들은 일을 제대로 못한 셈이다. 냉정하지만, 그게 진실이다. <웃찾사>의 폐지는 직원들의 일처리가 원할하지 않은 상황이 길게 지속되었기 때문에 회사 자체가 문을 닫은 상황이다. 억울하지만 어떡하겠는가. 부도가 난 회사는 이미 회생 불가다.

 

 

 


<웃찾사>가 아닌, 현재의 트렌드에서 코미디언들의 활용을 고민할 때

 

 


<웃찾사>의 폐지를 마냥 슬퍼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코미디언들이 존재감을 보일 프로그램을 만들어 내느냐 하는 지점을 고민해야 한다. 코미디언들이 재능을 뽐내고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기회'를 얻을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급선무다. 단순히 <웃찾사>의 폐지를 '반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이미 <웃찾사>는 신인 코미디언 발굴의 장이 되지 못하고 있다. 지난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웃찾사>로 존재감을 드러낸 코미디언들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차라리 <라디오 스타>같은 프로그램에서 한 번 큰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 훨씬 더 파급력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웃찾사>에서 '밥줄' 이상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가.

 

 

 


이정도면 <웃찾사>로 '코미디언의 설자리'를 운운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코미디가 없는 코미디 프로그램의 존속은 '억지 웃음의 강요'밖에 되지 않는다. 시청자들이 외면하는 프로그램을 코미디에 대한 자긍심이 아닌, 자신의 '밥줄'이라는 이유로 존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코미디언으로서 '웃기지 못한 책임'에 대한 성찰이 없는 행동이다.

 

 

 


이제부터 그들이 고민해야 할 것은, 공개 방청 코미디의 존속이 아니라 현재의 예능 트렌드에서 어떻게 살아남을까 하는 것이다. 차라리 현재의 예능 트렌드에서 코미디언들을 활용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한 일이다. 그들이 해야 하는 일은 <웃찾사>의 존속이 아닌, 기회를 만드는 일이다. 물론 이익을 우선시 해야 하는 방송사에서는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처럼 공채를 뽑은 책임 역시 방송사에는 존재한다. <웃찾사>를 폐지하지 말라고 할 것이 아니라 <웃찾사>가 아닌 프로그램에서 코미디언들이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할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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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작품 속에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를 담으면서 권력에 저항하는 주인공들의 위기를 그리며시청자들의 뒷통수를 치는 반전으로 호평을 받던 박경수 작가의 신작 <귓속말>은 이보영과 이상윤이 주인공으로 캐스팅 되면서 방영 전부터 화제를 모을 수 있었다.

 

 

 


<귓속말>역시 박경수 작가의 특징이 강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정의로운 판사였던 이동준(이상윤 분)은 정의롭다고 여겼던 판결 때문에 법정에 서지 못할 위기를 맞고 이 때문에 양심에 거스르는 판결을 내리는 조건으로 대기업 회장인 최일환(김갑수 분)이 내민 손을 잡을 수밖에 없게 된다.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해 지는 지점에서 생겨난 피해자 신영주(이보영 분)는 아버지에 대한 불합리한 판결을 인정할 수 없고 복수의 칼날을 들이댄다. 선과 악, 그리고 권력에 대한 작가의 메시지가 강렬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강약조절에 실패한 스토리..주인공들의 매력도 반감

 

 

 

 


초반부 스토리는 이동준이 받는 압박으로 흘러간다. 이동준은 신념을 버렸다는 양심에 가책을 받는 것은 물론, 신영주, 최일환의 딸 최수연(박세영 분), 최수연의 연인 강정일(권율 분)등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있다.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삶이지만 그 삶은 지옥이다. 여기에서 <귓속말>의 첫 번째 오류가 생겨난다. 남자 주인공이 사방에서 받는 압박을 드라마를 시청하는 내내 숨이 막힐 정도로 몰아붙이고, 숨 쉴틈이 없는 상황 속에서 드라마는 오히려 피곤하게 느껴진다.

 

 

 


여기에 ‘섹스비디오’로 협박을 하는 여주인공 신영주는 초반부터 매력발산에 실패한다.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부당한 판결을 한 것에 대한 분노는 이해할 수 있지만, 신영주의 ‘막무가내 식’ 몰아붙이기는 캐릭터의 매력을 반감시키는 요소다. 상황과 현실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통해 만들어진 계획이 아니라 상대방의 약점을 잡고 무조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라며 떼를 쓰는 모습은 여주인공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을 방해한다.

 

 

 

 

초반부의 답답한 전개를 딛고 이동준과 신영주는 서로 같은 편에 서게 되고 두 사람의 멜로는 진행되지만 드라마의 서사는 이들에게 감정이입을 하도록 만들지 못한다. 매회 일어나는 사건들과 반전들은 시청자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기 보다는 지치게 만든다. 일이 해결될 때 쯤에 터지는 위기나 반전은 놀라움이 아닌 ‘반전을 위한 반전’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이는 사건의 강약조절에 실패한 스토리라인의 탓이 가장 크다. 적절한 순간에 모두가 예상하지 못한 반전은 찬사를 받지만, 마치 패턴처럼 반복되는 반전에 대한 호기심은 일지 않는다. 시청자들은 반전에 대한 긴장감이 사라지고 의례히 이쯤에서 다른 상황이 터져나올 것이라는 예상을 하게되고야만다.

 

 

 

 



주인공보다 악역에 집중되는 이야기 구조...시청포인트가 애매모호해지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을 연기하는 이보영과 이상윤의 연기마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해 보인다. 형사 출신이라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이보영의 말투나 액션은 캐릭터를 돋보이게 만들기 보다는 이전의 지적이고 깔끔한 이보영의 이미지에 갇혀있고, 이상윤의 심각한 표정과 낮게 깔린 목소리는 지나치다 싶을만큼 기계적으로 느껴진다. 오히려 이야기의 흐름을 풍성하게 만드는 것은 악역을 소화한 권율이다. 권율이 소화한 강정일이라는 캐릭터는 주인공보다 훨씬 더 자연스러운 감정의 흐름을 보여준다. 애인의 배신이나 아버지의 죽음등을 계기로 복잡해지는 감정의 진폭을 표현하는 권율의 연기는 ‘재발견’이라는 평가가 나올만큼 상당히 인상적이다. 

 

 

 


주인공들에 대한 매력이 반감되고 악역에 대한 지지도가 올라가자 드라마의 중심축이 흔들린다. 악인을 처단하는 통쾌함에 초점을 맞출 수도 없고, 주인공들의 처절한 고군분투에 공감이 가지도 않는다. 이야기의 흐름이 애매모호해지면서 드라마는 어딘지 모르게 어색해진다.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기록했으나 과연 작가와 배우의 역량을 최대한 이끌어 낸 드라마인지에 대한 의문은 남는다.

 

 

 

주인공들에 대한 힘이 떨어지자 멜로라인에 대한 관심 역시 줄어든다. ‘성인의 멜로’를 보여주겠다는 포부가 무색할 정도로 두 사람이 서로에게 빠지는 상황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고, 두 사람의 멜로에도 감정이입을 하기 힘들다. 결국 드라마는 주인공들에 대한 매력을 설명하는 데 실패하고 만다.

 

 

 


 

<귓속말>은 그동안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으로 시청자들의 호평을 이끌어 냈던 박경수 작가의 작품 중, 가장 그 구성이 열악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다소의 억지와 개연성 부족을 드라마의 휘몰아치는 메시지와 구성력으로 극복하던 박경수 작가의 필력이 이번만큼은 제대로 발휘되지 못한 것이다.

 

 

 


결국 <귓속말>은 주인공을 위한 드라마가 되지 못했다. 명작이라고 부르기엔 배우들의 매력과 작가의 역량이 아쉽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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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 곳에 떨어진 연예인들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을 담은 예능의 설정은 상당히 흔하다. 바로 얼마 전 히트한 <윤식당>이 그랬고 그 이전에 <삼시세끼>가 있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1박 2일>이나 <정글의 법칙>역시 그런 뉘앙스를 품고 있다.  olive tv와 tvN에서 방송을 시작한 <섬총사>는 그런 트렌드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는 예능이다. 침체기를 넘고 케이블에서 다시 전성기를 맞은 강호동과 가수겸 배우 정용화, 배우 김희선까지. 도무지 예측이 안가는 조합의 인물들을 섬으로 끌고 들어간다. 대체 무슨 이야기가 나올까 싶지만 첫 회에서 생각보다 큰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힐링' 여행 예능, <삼시세끼> 뛰어넘을까

 

 


 

<섬총사>는 같은 여행 예능이지만 <1박 2일>이나 <정글의 법칙>처럼 비교적 빠른 템포로 극적인 연출로 진행되는 예능과는 달리, 나영석pd의 트레이드 마크인 ‘힐링’을 표방한 느낌이 강하다. 바다에 둘러싸인 섬이라는 공간은 <삼시세끼>의 어촌편을 떠올리게 만든다. 물론 <섬총사>에서는 밥을 지어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미션이 주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도심과 멀리 떨어진 낯선 곳에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자신의 취향대로 살아야 한다는 미션이 주어진다. 어떤 상황 설정이나 해야 하는 일이 없다는 것은 오히려 더욱 출연자들을 난감하게 만든다.

 

 

 


그저 취향대로 살기만 하면 되지만, 그들의 취향은 사실 ‘섬’이라는 공간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산이 좋냐, 바다가 좋냐”는 질문에 “둘 다 싫다. 호텔이 좋다.”고 말하는 김희선은 이 예능의 키 포인트를 보여주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세 걸음 걸으면 차를 타야 한다는 뜻의 ‘삼보승차’가 자신의 별명이라 밝힌 김희선은 섬에서 일을 하고 뒹굴기엔 지나치게 곱고 화려하다. 인터뷰에서도 김희선은 "생선의 눈을 보지 못한다"고 말하거나 "섬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회는 먹는다"고 말하는 김희선은 어쩐지 재미있는 캐릭터다. 전혀 섬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그가 섬 생활을 받아들이는 장면에는 묘한 쾌감이 있다.

 

 

 


 

<섬총사>는 도시화가 되지 않아 비교적 오염이 되지 않은 섬의 아름다운 풍광을 그들의 섬 생활을 천천히 보여주는 배경으로 삼는다. 이는 <삼시세끼>가 굳이 시골로 가 음식을 만들게 한 이유와도 비슷하다. 복잡하지 않고 단조로운 삶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삼시세끼만 걱정하게 만든 포맷은 단순했지만, 보고 있으면 묘하게 빠져드는 부분이 있다. 복잡하고 시끄러운 삶 속에서 삼시 세끼만 걱정하면 되는 단조로움은 시청자들에게 ‘힐링’으로 다가온 것이다.

 

 

 


<섬총사>역시 그런 부분을 놓치지 않는다. <섬총사>는 삼시세끼처럼 함께 생활하며 가족이라는 테두리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각자 살게 되는 집도 다르고, 서로 협력해야 하는 미션도 없다. <섬총사>는 출연자들이 익숙한 공간이 아니라 주변에 아무 것도 없어 개성을 전혀 살릴 수 없을 것 같은 공간에서 그들이 자신의 역할을 스스로 찾아내고 그들의 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내게 만들며 캐릭터를 쌓아 나가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그 공간에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는다는 바로 그 지점이다. 그런 그들이 섬에 정을 붙이고 그 섬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일종의 ‘힐링’이라고 할 수 있다.

 

 

 


<섬총사>의 포맷, 독보적인 캐릭터의 탄생을 기대해 보아도 좋을까

 

 

 

 

첫 회의 이야기는 세 사람의 인터뷰로 시작된다. 그들은 섬 생활에 대한 기대감을 표현하면서도 불편할 수밖에 없는 섬의 환경에 불안함을 드러낸다. 섬으로 향하는 그들은 아직 서로와 가까워진 상태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친해지는 과정에서 주고받는 이야기들은 그들의 캐릭터를 드러낸다. 김희선의 ‘오빠’라는 단어에 얼굴이 붉어지며 민망해하는 강호동이나, 허당같은 매력을 드러내는 정용화, 그리고 큰 트렁크 하나에 술을 가득 채워온 김희선까지 그들의 조합은 어울리지 않는 듯 하면서도 절묘하게 케미스트리를 만들어 내는 부분이 있다. ‘스타’를 버려야 하고 열악한 환경을 감당해야 하는 섬 생활을 그들이 받아들이면서 보여주는 소박함은 <삼시세끼>에서 보여주는 힐링의 메시지와 닮아 있다.

 

 

 


문제는 앞으로 그들의 캐릭터를 어디까지 다변적으로 활용하고, 어디까지 대중에게 설득시킬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단순히 섬에 그들을 내려 놓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들이 ‘무언가’를 할 수 있도록 만들면서도 그들에게 지나친 개입이나 강요를 하지 않고, 그들의 캐릭터를 시청자들에게 설득시켜야 하는 작업이 성공해야 <섬총사> 역시 성공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삼시세끼>같은 예능과는 다른 궤도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 이 예능이 가진 숙제다.

 

 

 


첫 방송의 캐릭터는 생각보다 매력적으로 그려졌다. 특히나 리얼 예능에 최초로 모습을 드러낸 톱스타 김희선은 예능에서의 새로운 캐릭터를 기대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캐릭터에 시청자들이 열광하게 만드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아주 작은 포인트로도 예능 캐릭터의 성패는 갈릴 수 있다. 그 종이 한 장의 차이를 <섬총사>를 통해 발견해 낼 수 있을까. 김희선이 <섬총사>의 뮤즈로 거듭나는 기적을 보이며 <섬총사>가 단순히 비슷한 ‘힐링’ 예능이 아닌 또 다른 히트작이 될 수 있을지가 궁금해 지는 첫회가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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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N <터널>은 시작부터 tvN의 히트작 <시그널>의 그림자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형사들의 수사물이라는 점, 과거와 현재가 소통하며 사건이 해결된다는 판타지적인 설정. <시그널>에서는 과거로부터 무전이 오는 무전기가 존재했다면, <터널>에는 아예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 수 있는 ‘터널’이 존재한다. 단순히 전파를 주고받았던 <시그널>과는 달리, 아예 물리적인 시공간을 초월하는 <터널>은 분명 똑같은 설정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터널>은 제작 발표회에서부터 <시그널>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배우들과 PD는 <시그널>을 보지 않았다고 밝혔으며, <시그널>과는 다른 작품임을 분명히 하는 데 주력했다. 그러나 <시그널>이 화두가 된 것 자체가 <시그널>과의 비교는 피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재확인이었다. 설정은 변화했지만 ‘진화’했다고 볼 수는 없었고, 이야기는 완전히 새로울 수 없었다.

 

 

 


로맨스 드라마에 지친 시청자들이 새로운 것을 찾게 되자 특별한 소재로 호평을 얻을 수 있는 수사물은 제작 붐이 일었다. 타임 슬립 역시 다수의 드라마에 사용된 설정으로 이제 더 이상 새로운 소재가 아니었다. 설정을 어떻게 바꾸든, 이전에 반복된 형태를 피해가기는 힘들었다. 특히나 <터널>은 타임슬립과 수사물이라는 장르가 합쳐져 얼마 전 히트했던 <시그널>을 떠 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반복되어 온 소재, <터널>이 <시그널>을 극복하는 법

 

 

 


<터널>은 수사물의 흐름을 굳이 거스르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연쇄살인’이라는 사건을 30년의 세월에 녹이면서 이야기를 긴밀하게 구성하여 긴장감을 증폭시킴으로서 이야기 구조를 촘촘하게 만드는데 주력한다. 과거와 현재의 흐름 속에서 연쇄 살인 사건에 대한 진실이 밝혀지는 과정과 살인범의 정체에 대한 반전등은 꽤 유려한 흐름으로 짜여있고, <시그널>의 그림자를 벗어던지게 하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터널>이 <터널>의 이야기 만으로 가치가 있을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 유기적인 구성과 흐름이다. 기존의 수사물과 완전히 흐름을 달리 하는 구성은 아니지만, <터널>이 가진 이야기를 기대하게 만드는 힘은 강력하다.

 

 

 


여기에 <터널>만의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는 것은 피해자들에 대한 시선이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분리되어 있는 상황 속에서 사건 발생으로 인해 피해자의 입장에 서게 되고, 그로인해 피해자에 감정이입을 하게 되는 여타 수사물의 주인공들과는 달리 <터널>의 주인공들은 사건과 아주 긴밀한 접점에 놓여 있다. 이를테면 김선재(윤현민 분)는 연쇄 살인사건 피해자의 가족이고 신재이(이유영 분)는 연쇄 살인마의 위협을 직접적으로 받는 존재가 되는 식이다.

 

 

 

피해자가 겪어야 하는 아픔들은 주인공들을 통해 보다 직접적으로 전달된다. 사건이 일어난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고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사건이 잊혀질 때 조차, 피해자의 가족들은 여전히 고통받고 있고, 힘겨운 싸움을 계속 해 나가야 한다는 것. 그들의 아픔을 가벼이 여길 수 없다는 메시지가 이 드라마를 관통하고 있다. 사건은 피해자와 가해자로 단순히 나뉘는 것이 아니라, 그 주변에 나비효과를 일으키고 또 다른 분노와 아픔을 만들어 낸다는 메시지 만으로도 <터널>의 장점은 유효하다. 

 

 

 


 


초반부의 완성도에 비해 힘이 달리는 후반부는 다소 아쉽다.

 

 


그러나 <터널>의 후반부는 초반부의 긴장감에 비해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터널>의 이야기는 대부분 과거가 아닌 미래에서 진행이 된다. 과거로부터 30년을 타임슬립한 형사 박광호(최진혁 분)은 이 드라마의 핵심요소지만,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존재로서 활용되었었을 뿐, 타임슬립이라는 판타지의 본질에 다가서는 역할을 수행하지는 못한다.

 

 

 


작가는 30년의 터울이 있지만, 미래와 과거의 시간이 같이 흐르는 것으로 설정을 해놓는다. 이를테면 30년 후에서 5개월이 흐르면, 30년 전에서도 5개월이 흘러있는 것이다. 이 설정은 두 세계를 긴밀하게 연결하기 위한 것이다. 과거에서 무언가를 바꾸면 미래에서도 바뀌게 된다는 설정은 그동안 타임슬립 물에서 수차례 이용되어왔던 설정이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가장 주요한 설정 중 하나인 이런 설정이 마지막회에서도 전혀 활용되지 못하고 끝을 맺어버린다. 과거에서 연쇄살인범 목진우(김민상 분)을 검거하면 수많은 살인을 막을 수 있음에도 그런 뉘앙스조차 풍기지 않고 드라마는 마무리 된다.

 

 

 


또한 신비로운 터널에 대한 이야기 역시 너무나 빈약했다. 어떻게 해야 과거로 돌아오고 어떻게 해야 현재로 타임슬립을 할 수 있는지에 관한 조건조차 제대로 설명되지 않았다. 사건이 해결되자 당연히 과거로 돌아가는 박광호의 뒷모습은 그동안 과거로 돌아가고자 해도 돌아갈 수 없었던 터널의 비밀을 다 풀어 낸 모습이었지만, 그런 이야기는 드라마 안에서 제대로 설명된 적이 없었다. 또한 박광호가 과거로 돌아가면서 2017년의 사람들이 어떻게 변했고, 어떻게 다른 삶을 살아가는지에 대한 이야기의 마무리도 없었다. 해피엔딩이라고 넘어가기엔 여러 가지로 아쉬움이 남았다.

 

 

 


또다시 성공한 웰메이드 수사물, 시청자들은 <터널>을 인정했다.

 

 

 


 

그러나 연쇄 살인 사건이라는 무거운 이야기를 하면서도, 우정과 가족,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따듯한 시선을 견지한 <터널>은 타임슬립과 수사물이라는 클리셰를 사용하고도 <터널>만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비슷한 이야기지만 그 이야기를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라 또 다른 웰메이드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터널>이 보여준 것이다. 5%가 넘는 높은 시청률은 이 드라마의 재미를 가늠하게 하는 부분이다.

 

 

 


 

비록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마지막까지 <터널>만의 <터널>다운 이야기를 풀어낸 드라마. 또 수사물에, 또 타임슬립이라는 핸디캡을 딛고도 시청자들을 tv앞으로 모이게 했다는 점에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 작품임엔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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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이상해>의 타이틀만 보면 ‘아버지’가 이 드라마속 갈등의 중심에 있을 것 같지만 그 안에서 더 중요한 갈등은 자식들이 겪는 일들이다. 첫째의 혼전임신, 둘째의 동거, 셋째의 왕따 트라우마 그리고 네 형제가 모두 받아들여야 하는 배다른 형제까지. 이 모든 일들은 아버지의 시선보다는 자식들의 시선에서 그려진다. <아버지가 이상해>는 그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통해 이따금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기도 한다. 그러나 가끔씩,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어떤 문제에 대한 시선은 조금 이해하기가 어렵다. 

 

 

 


집안에서 벌어지는 ‘왕따 문제’...아버지가 아니라 자식들이 이상해

 

 

 


아버지 변한수(김영철 분)가 집으로 데려온 또다른 아들 안중희(이준 분)는 가족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존재다. 물론 그는 변한수의 친아들이 아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전과자가 될 위기에 처한 이윤석이 친구 변한수의 죽음을 통해 신분을 뒤바꾼 과거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 변한수는 실제로 이윤석이고, 안중희는 과거 사망한 변한수의 아들이다. 그러나 이런 복잡한 사연을 말할 수 없는 변한수는  안중희를 아들로 받아들이고, 같이 살자는 그의 돌발 제안도 수용한다.

 

 

 


가족회의를 통해 그를 데려올지 말지 결정하는 과정에서 네 남매는 거부감을 표시한다. 복잡한 사정을 모르는 네 남매에게 안중희는 배다른 형제일 뿐이고, 그의 존재는 불편하기 짝이 없다. 갑자기 벌어진 일에 대한 그들의 당황스러움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이제껏 모르고 살았던 이복 형제의 등장은 충격을 넘어서 배신으로까지 느껴질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드라마 속 착한 네 남매는 엄마 나영실(김해숙 분)의 의견을 따른다. 엄청난 갈등 끝에 나영실이 안중희를 받아들이겠다며 중심을 잡은 이후이기 때문에, 네 남매가 반대할 명분이 없는 것이다. 결국 부모님 뜻에 따르는 네 남매. 그러나 이들의 본색은 안중희가 집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시작된다.

 

 

 


 

안중희에게 쉽게 정을 줄 수 없는 그들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그들의 행동은 생각보다 조직적이고 가학적이다. 일단 네 남매가 합심하여 안중희를 무시하는 부분은 ‘왕따’와도 다를 바가 없다. <아버지가 이상해>는 그동안 셋째 변미영(정소민 분)과 김유주(이미도 분)의 관계를 통해 왕따 가해자와 피해자의 상반된 시선을 다뤘다. 그러나 학교 때 김유주의 괴롭힘이 아직도 트라우마로 남은 변미영조차 안중희에 대한 왕따에 암묵적으로 동참한다. 심지어 변미영은 안중희의 매니저로 일하고 있었던 상황. 안중희에 대한 불편함은 일에도 영향을 미쳐 변미영은 일터에서도 집안에서도 연신 굳은 표정으로 안중희를 피한다. 전혀 프로답지 못한 모습이다. 안중희가 수차례 관계를 개선하려 손을 내밀어 보지만, 관계의 회복은 좀처럼 쉽지 않다. 5월 7일 방영된 20회에 이르러서야 변미영은 안중희에게 사과를 했지만, 그동안 자신이 왕따 피해자였으면서도 왕따 가해자 혹은 방관자들의 행동 패턴을 그대로 답습했다는 것은 상당히 아쉬운 부분이었다.

 

 

 


 

단순히 어떤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문제와 합심하여 누군가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배제시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모두와 친하게 지낼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하여 누군가의 마음에 생채기를 낼 권리는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엄마 아빠의 어버이날 선물을 사는 문제에서 호의를 베풀 때 조차 “그쪽과 부담 덜고 싶은 맘 없다. 신경끄라”고 말하는 차가운 행동들은 결코 성숙한 태도가 아니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대할 거라면 애초에 그가 합가하겠다고 했을 때, 찬성표를 던져서는 안됐다. 자신들의 의견이 아닌 부모님의 결정을 존중한 것이라 해도 이런 식의 행동은 부모님의 의견에 대한 존중이라고 볼 수도 없다. 마음을 여는 것 까지는 무리일 지라도 최소한 왕따의 형식으로 한 사람의 위치가 설정되는 것은 어쩐지 좀 불편한 일이다. 가뜩이나 왕따 문제에 대한 피해자의 시선을 다룬 바 있는 드라마에서 말이다.

 

 

 


 


동거에 대한 시선....이번에도 자식들이 이상해

 

 

 


 

이런 문제점은 둘째 변미영(이유리 분)의 동거를 보는 시선에서도 드러난다. 한국에서 아직 동거는 드러내 놓고 할 수 있는 성질의 행동양식이 아니다. 그러나 동거의 문제는 도덕적 잣대의 프레임을 씌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고 함께 살아가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면, 결혼만이 꼭 선택지는 아닐 수 있다. 단지 문제는 사회적인 시선이다. 동거를 한 사람들이 마치 어떤 흠결이 있는 것처럼 바라보는 시선들은 동거를 더욱 음지의 영역으로 몰고 간다. 물론 동거를 경험한 사람을 애인이나 결혼 상대자로서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본인의 자유다. 그러나 개개인의 선택을 존중하지 않고 마치 무조건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한 것처럼 몰고 가는 시선에는 오류가 있다.

 

 

 


 

극중 변미영은 로펌에서 일하는 변호사다. 나이도 34살이고 충분히 자신의 선택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는 성인이며, 능력도 갖추고 있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기로 결정했다고 해서 그 결정에 대하여 누군가가 비난할 권리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미영은 동거 사실을 부모님은 물론 남매들에게도 숨긴다. 괜한 잡음을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들통 난 동거 사실에 부모님은 역시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변미영은 순식간에 죄인 취급을 받는다. 이는 충분히 세대간의 갈등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부모님 세대가 자식의 동거, 특히 딸의 동거에 대하여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전반적인 이해가 한국사회에는 있다. 더군다나 변미영의 동거 상대는 과거 수차례 갈등이 있었던 건물주 오복녀(송옥숙 분)의 아들 차정환(류수영 분)이다. 반대는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변미영은 말한다.

 

 


“이렇게까지 화내실일인지 이해가 안가요. 속이고 말한 건 잘못했어요. 하지만 제가 그렇게 죽을 죄를 지었는지 모르겠어요. 동거가 왜 나빠요?  좋아하는 성인남녀가 함께 있고 싶어서 같이 지내는 게 나쁜 일은 아니잖아요. 미성년자도 아니고 30대 성숙한 성인이잖아요. 동거가 그렇게 부도덕하고 비난받아야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엄마 아빠가 생각하시는 것 보다 세상이 많이 변했어요. 많은 젊은 사람들이 동거를 해요.”

 

 

 


이에 “그렇게 당당한데 왜 속였냐. 왜 처음부터 떳떳하게 밝히지 않았냐.” 고 묻는 나영실에 변미영은 “이러실까봐요. 무조건 반대하시고 중죄인 취급하시잖아요.”라며 “변해가는 가치관을 왜 인정하지 않으세요. 엄마 아빠 세대의 가치관과 우리 세대의 가치관이 달라요.” 라고 논리적으로 말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그렇게 부모 가치관 무시하고 네 멋대로 살 거면 나가!” 라는 감정적인 대답이다. 이것이 바로 세대간의 갈등이다. 변미영의 말에 제대로 반박은 할 수 없으나 동거는 도저히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세대간의 갈등은 보편적인 공감대가 있지만 같은 나이 또래인 남매들이 동거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황당하기 짝이 없다. “동거하다 걸렸는데 뭐가 그렇게 당당하냐”는 첫째 변준영(민진웅 분)의 시선이 대표적이다. “온 가족 극진한 배웅 받으면서 나갈 때 양심의 가책 안받았냐.”, “뭘 잘 했다고 큰 소리냐. 넌 엄마 아버지께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드렸다.” 며 끊임없이 ‘감정적’인 부분을 지적한다. 동거가 왜 잘못됐는지에 대한 논리적 근거는 없고, 그저 그 일에 대해 부모님이 상처받은 상황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다. 참지 못한 변미영은 “그런 오빠는 나한테 그런 말 할 자격이나 되냐!” 고 소리친다. 변준영은 고시생 신분으로 여자친구를 혼전임신 시켜 결혼을 준비하고 있는 상황. 여기서 변준영의 대답은 가히 충격적이다. “나도 말할 주제안되지만 그래도 넌 그러면 안돼. 내가 잘못하면 그건 부모님께 큰 실망이지만 니가 잘못하면 그건 큰 배신이라고! 부모님께 네가 어떤 의미인지 몰라? 부모님이 너한테 얼마나 기대하고 의지하고 큰 자부심을 가지시는지 몰라서 그래!”라고 소리친다. 이건 ‘나는 그래도 되지만 너는 그러면 안된다’는 이중 잣대에 불과하다. 부모님의 기대를 핑계로 자신의 허물은 작은 것으로, 남의 허물은 큰 것으로 만들어 버리며 죄책감까지 심어주는 최악의 대화법이 아닐 수 없다.

 

 


오히려 “그게 얼마나 버겁고 힘든 일인줄 알아? 나만 왜! 가슴 답답하고 가슴 짓눌리게 내가 왜 다 감당해야 하냐고!” 라는 변미영의 절규가 훨씬 더 와 닿는다. 그러나 끝까지 모여 앉은 남매들이 변미영에게 ‘언니가 잘못했다. 실망이다’고 한 마음이 돼서 비난하는 것으로 장면은 끝맺어진다. 형제가 넷이나 있지만 변미영의 입장에서 공감해주고 이해해 줄 사람은 이 집에 없다. 누군가 잘못했을 때, 쌍심지를 켜고 비난하고 죄책감을 심어줄 사람들만이 가득하다. 더군다나 그들이 누군가를 비난할 자격이나 되는지조차 의문이다. 한마음 한 뜻으로 한 사람에게 가해지는 비난은 폭력적인 행동에 다름 아니다.

 

 

 

 

왕따 같은 폭력을 다루면서도 폭력적인 시선에 의외로 관대한 <아버지가 이상해>속 인간군상. 갈등이 있기에 드라마는 활력을 더 가질 수 있지만, 그 갈등에 대한 시선이 지나치게 편협하다면 그것도 문제다. 과연 이런 문제점들을 <아버지가 이상해>는 어떻게 풀어갈 수 있을까. 가끔씩 보이는 설정의 오류는 캐릭터마저 비호감으로 만들 여지가 있다. ‘아버지가 이상해’가 ‘자식들이 이상해’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인물에 대한 세심한 터치가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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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하는 드라마에는 성공적인 캐스팅이 있다. 작품 속에서 호연을 보여준 연기자는 주목을 받고 이름값이 올라간다. 그러나 반대로 이미 높은 인지도와 이름값을 지닌 배우들을 이용한 마케팅역시 무시할 수 없다. 초반 시청률은 드라마의 성패를 좌우하는데 중요한 요소다. 이 시청률을 달성하는데 톱스타들의 출연만큼 강력한 무기도 없다. 그러나 최근 브라운관에서 야심차게 준비한 ‘톱스타’ 마케팅이 줄줄이 실패하고 있다. 그 문제점을 짚어보았다. 

 

 

 


<사임당>... 이 시대의 '어머니상'보다 이시대의 '이영애상'

 

 

 

 

 

 

<사임당-빛의 일기>(이하 <사임당>)은 이영애가 <대장금>이후 무려 13년만에 컴백작으로 선택한 작품이었다. 그에 걸맞게 제작 규모도 컸다. 드라마 방영전부터 200억을 투자한 작품으로 화제가 되었고 억대를 뛰어넘는 이영애의 출연료도 관심의 대상이었다. 드라마로 제작된 적 없던 신사임당의 일대기 역시 어떻게 표현될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다. 이영애는 신사임당 역할에 더 이상은 없을 정도의 캐스팅이었다. 그동안 ‘산소같은 여자’로 시작하여 우아함의 대명사가 된 이영애의 결혼과 출산 이후 작품으로서 이만큼 훌륭한 선택은 없었다.

 

 

 


그만큼 <사임당>은 이영애의 일관적인 정체성이 어떻게 발전되어 나갔느냐를  보여주려는 의도가 다분한 작품이었다. 13년 전, 영민하고 호기심 많으며 마음이 따듯한 장금이는 현명하고 주체성이 강하며 가족을 이끌어가는 사임당이 되었다. 13년이라는 세월 동안 이영애도 나이가 들고 결혼을 했고, 아이도 낳았다. 그러나 여전히 단아하고 우아한 모습을 간직한 이영애의 이미지는 <사임당>을 통해 고스란히 재현된다.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권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대장금>에 대한 향수를 자극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었다. 그만큼 공을 들인 탓인지 제작기간도 길었다. 사전제작 드라마로 2014년 기획하여 2015년 제작에 들어갔으나 방영시기를 조율하며 2017년에야 방송을 시작했던 것이다. 모든 기운이 이 드라마의 성공을 위해 모여 있는 듯 했고, <사임당>은 15%가 넘는 높은 시청률로 출발해 2회때는 16%를 넘겼다.

 

 

 


그러나 <사임당>은 그 이점을 단 한순간도 살리지 못한채, 이영애라는 톱스타의 이름값에 빚을 진 시청률을 유지하지 못하는 참담한 결과를 낳았다. 현대와 과거의 교차 편집은 오히려 집중력을 흐트러트렸고 드라마의 전체적인 이야기의 흐름 역시 촘촘하고 흥미롭게 전개되지 못한다. 이 와중에 이영애의 캐릭터 활용 역시 <대장금> 시절보다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다. 드라마 속 주인공 사임당에게 쏟아지는 각종 위기상황과 절체절명의 순간 속에서도 이영애는 그저 고고하고 우아한 신사임당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오히려 과거보다 지나치게 절제된 표현 방식 속에서 이영애는 사임당이 아니라 그저 이영애로서 존재할 뿐이다. 자신을 놓아버린 연기가 아닌 자신의 이미지대로 끌려가는 연기는 시청자들에게 감동을 주기에는 부족했다. 고리타분한 스토리 속에서 신사임당의 재발견이 아닌 다시 이영애의 이미지만 확인할 수 있었고 결국 이시대의 어머니상을 다시 쓰는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막대한 제작비를 회수할 중국 시장역시 ‘싸드 보복’으로 수출이 여의치 않았고, 국내에서도 드라마 <김과장> 등에 밀리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방영내내 낮은 화제성을 기록한 <사임당>은 스페셜 방송과 재편집등 초강수를 두는 와중에서도 반전을 만들어내지 못했고 사전제작 드라마임에도 결국 2회 축소 종영이라는 굴욕을 맛보았다. 이영애의 화려한 컴백에 비해 초라한 퇴장이었다.   

 

 

 


<완벽한 아내> 용두사미된 스토리, 고소영의 존재감 없었다.

 

 

 


 

<사임당>에 이영애가 있었다면 <완벽한 아내>에는 고소영이 있었다. 고소영은 10년만에 안방극장에 출연했으나 초반 분위기를 압도하는 것은 여의치 않았다. <완벽한 아내>는 3.9%의 초라한 시청률로 출발했다. 배우로서 고소영에게 대중이 갖는 기대치가 높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부분이다.

 

 

 


그러나 <완벽한 아내>는 단순한 ‘유부녀 성공스토리’가 아니라 미스테리를 가미하며 호평을 얻었고 높은 폭은 아니지만, 시청률은 상승세를 탔다. 고소영의 연기역시 합격점을 받았다. ‘예쁜 고소영’을 포기하고 편한 복장과 힘을 뺀 연기력으로 시청자들의 호평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호평을 끝까지 이어나가는 데는 실패했다. 후반 부 스토리가 어그러지면서 작품은 중심을 잃었다. 미스터리는 단순히 한 남자에게 집착한 한 여성의 비이성적 행동에 그쳤고, 주인공을 정신병원에 가두는 전개는 다소 뜬금없이 펼쳐졌다. 미스터리로 출발한 이야기의 흐름 자체를 감당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우리는 더 열심히 살고, 더 열심히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는 심재복(고소영 분)의 마지막 나레이션이 가슴을 파고들지 못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드라마의 흐름이 중구난방이 된 것과, 반전도 흥미요소도 없는 미스터리의 처리 방식은 실망감만을 안겨주었다.

 

 

 

고소영이 선택한 캐릭터 심재복에 대한 아쉬움 역시 크다. 고소영의 연기 자체는 합격점이었지만 대중의 뇌리 속에 각인될 만큼의 특별함은 없었다. 심재복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지나치게 많이 반복되어 온 소재였다. 남편의 바람을 감당하고, 연하남과의 ‘썸’ 비슷한 관계를 형성하며 어느상황에서든 꿋꿋하고 굿센 아줌마 캐릭터는 이미 익숙하게 경험해 본 것들이었다. 오히려 병적으로 누군가에게 집착하는 내면을 숨기고 웃음을 가장한 조여정의 ‘사이코 연기’가 이 드라마에서는 훨씬 더 주목할만한 포인트였다.

 

 

 


시청률은 물론이고 연기적으로도 큰 주목도가 낮았는데, 드라마마저 완성도가 높지 않았다. 결국 호평요소를 굳이 찾자면 ‘조여정의 연기력의 재발견’을 이룬 드라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어 버린 것이다.

 

 

 


<추리의 여왕>인데 추리는 없다.

 

 


최강희가 타이틀롤을 맡고, 권상우가 3년만에 선택한 드라마 <추리의 여왕>은 ‘아줌마 탐정’이라는 소재를 내세웠으나 이 드라마의 가장 특징은 ‘추리’가 없다는 것이다. 사실 성공하는 드라마는 ‘추리’를 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특징이 있다. 앞으로 전개가 어떻게 될지 궁금한 마음에 시청자들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설왕설래가 이어지는 드라마일수록 성공 확률도 높아진다. 그러나 중반이 넘은 <추리의 여왕>은 제목에 추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용에는 추리가 없다.

 

 

 


사건을 촘촘하게 만들고 그 사건이 밝혀지면서 일어나는 반전과 놀라움을 주로 삼을 것이라는 기대는 <추리의 여왕>속에서 산산이 부서진다. 일반인이 보기에도 어설픈 수사 방식은  개연성의 문제로 몰입도를 떨어뜨린다. 형사인 하완승(권상우 분)의 수사 방식은 수사방식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채로 쓰여진 듯하고 추리 천재로 나오는 주인공 유설옥(최강희 분)의 행동은 때때로 너무나 큰 민폐다.

 

 

 


이 모든 상황을 차치하고라도 추리 드라마임에도 범인을 보여주고 범인의 행적을 그대로 따라가는 방식은 시청자들이 추리 해 볼 여지도 잘라내는 방식으로, 시청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방식에서 한참이나 동떨어져 있다. 이미 결론까지 지어져 있고, 반전 따윈없는 추리드라마는 새로운 방식이 아니라 잘못된 방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야기는 늘어지고 전개는 답답한 상황 속에서 시청률은 하락세로 돌아섰다. 겨우 동시간대 1위를 차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10%도 넘지 못하는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톱스타들의 출연이 성공을 담보하지 않는다

 

 

 


톱스타들이 출연한 드라마는 화제성을 끌 수 있다는 장점이 분명하다. 특히나 중국시장이 성장하면서 중국시장에 어필할 수 있는 스타들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기도 했다. 그러나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재미있는 드라마’라는 본질이다. 지금 톱스타가 된 스타들도 한 때는 신인이었다. 그들 역시 출세작을 통해 스타가 됐다. 작품 속에서만이 배우는 빛날 수 있다. 배우의 후광을 업고 만들어진 작품의 유효기간은 아주 짧다.

 

 

 


 

드라마의 꺼져가는 불씨는 드라마의 완성도만이 살릴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드라마에 누가 출연하느냐 하는 단편적인 사실이 아니라 바로 그 드라마 자체에 있다는 사실을 톱스타들이 출연하고도 성공을 거머쥐지 못한 드라마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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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사자만 모르는 상황을 설정하고 누군가를 속이는 일에는 묘한 쾌감이 있다. 공식적으로 거짓말을 해도 되는 만우절 같은 날이 생긴 것도 그런 카타르시스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속이는 사람은 속는 사람의 반응을 보며 즐기고 웃을 수 있다. 그래서 ‘몰래 카메라’는 세계 어떤 방송사에서건 한 번쯤은 시도해봤을만한 콘텐츠다. 진실이 아니라는 지점에서 어떤 심각한 상황도 웃음으로 결론지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포인트다.

 

 

 


'몰카' 지나치게 손쉬운 예능의 접근 방식

 

 

 


한국에서도 이경규로 대표되는 몰래카메라 콘텐츠는 상당히 오랫동안 예능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 이경규의 몰래카메라는 1991년 <일요일 일요일 밤에>에서 처음 방송된 이래, 수차례 리메이크됐다. 이경규를 내세운 mbc뿐 아니라 다른 방송사에서도 연예인 뿐 아니라 일반인들의 반응을 보는 몰래카메라 콘텐츠는 관찰카메라, ‘스타 이런 모습 처음이야’ 등의 이름으로 숱하게 활용되었다. 또한 <런닝맨><무한도전><1박 2일>등 어느 예능에서든지 몰래카메라를 부분적으로 이용하며 출연자들의 반응을 보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이렇게 2017년 현재까지 몰래 카메라는 가장 손쉬운 예능의 접근 방식이다. 그래서일까. <진짜 사나이>가 종영한 후 방영되고 있는 <은밀하게 위대하게>(이하 <은위>)는 몰래 카메라를 전면에 내세웠다. 현재의 예능 트렌드는 몰래 카메라를 이용하여 활기를 불어넣는 수단으로 사용은 할 수 있어도 그런 형식을 전면에 내세워 목적으로 삼지는 않는다. 그러나 <은위>는 기승전결이 모두 ‘몰카’라는 형식속에서 이루어진다. 속이지 못하면, 프로그램 자체가 성립이 되지가 않는 것이다.

 

 

 


1991년 이후 16년이 지났지만 <은위>가 보여주는 몰카 프로그램의 세상은 그 때와 비교해 더 나아진 것이 없다. 스타를 섭외하고 그 스타에게 황당한 상황을 던져주고, 그 스타의 반응을 보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몰카임을 알려주는 것. 이야기는 뻔하고 새로운 것이 없다. 이경규가 출연을 거절한 이유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더 큰 문제는 그 뻔한 이야기를 상쇄할만한 긴장감이나 소재도 없다는 점이다. 이야기는 고조되지 못하고 제자리를 맴돌다가 종료되고 의표를 찌르는 의외성은 기대하기조차 어렵다.

 

 

 


몰카를 바라보는 '은밀'한 시선은 가학적일 뿐이다.

 

 

 


 

그러면서도 <은위>는 몰카의 전형성이라고 할 수 있는 가학적인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동생이 사기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상황에 동석하거나(산다라 박편), 병에 걸려 생업에 지장을 받는다는 친구의 거짓말이 펼쳐지거나(박정현 편), 실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놓은 후, 선배 앞에서 당황하는 모습을 관찰하거나(홍진영 편) 하는 식이다. 다른 연예인들의 몰카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스토리로 흘러간다.

 

 

 


 

이 안에서 연예인들의 성품은 부각된다. 친구를 위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거나, 주어진 일을 끝까지 해내거나, 황당한 미션들을 수행해 나가는 장면들은 그들의 순수성을 목격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 순수성은 조작된 것이다. 그들의 진심이 조작된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황당한 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을 만들고 그 안에서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은 상대적인 약자로 비춰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상황 자체를 미리 알고 있거나 중간에 눈치채지 못했다면 그들이 황당한 일이 벌어지는 상황속에서 느끼는 감정은 진실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느끼는 당황스럽고 슬프고 때때로 화가나기까지 하는 감정들은 이 한 마디로 정리된다. "미안, 장난이었어."

 

 

 


어떤 상황이든 조작된 상황속에서 그들이 적극적으로 어떤 일을 해야만 결론이 나는 상황에서 발을 뺄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억지스러운 상황에 사람을 던져놓고 그 반응을 구경거리 삼는 것은 관음증에 바탕을 둔 재미며 가학적인 행동이다. 몰카를 예능에 활용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 자체가 목적이 될 때 그 가학성은 더 부각된다. 몰카를 통해 어떤 스토리가 설명되거나 예능의 흐름이 자연스러워 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속였다’는 쾌감만이 있는 <은위>의 기획은 지나치게 구시대적이다.

 

 

 


설득하지 못하는 몰카, 예능의 흐름을 거스르다.

 


우리는 <은위>를 보면서 몰카를 기획한 목적을 설득당하지 못한다. 몰카의 목적이 단순히 속이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그 속이는 과정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그저 그들이 저런 황당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반응할까에 대한 변태적인 시선에 불과하다. 다른 목적이나 신선한 이야깃거리 따위는 없다. 그렇다고 몰카의 준비성이나 기획 방식 자체가 특별하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제작비가 여의치 않은 듯, 상황은 몇 명의 엑스트라를 동원한 작은 세트로 이루어질 뿐이고 그런 소박함은 몰카의 재미마저 몰락시킨다. 차라리 몰카의 세심한 이야기 구조로 기승전결을 만들어 몰카의 스펙타클함을 살렸다면 모르나 그저 가짜 오디션, 가짜 점쟁이, 가짜 후원 방송등의 상황만을 던져주고 예상 가능한 범주에서 일어나는 몰래 카메라는, 우리가 그동안 친구에게 쳤던 장난 이상의 희열을 선사하지 못한다. 굳이 주말 예능 채널에서 그런 장면을 봐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어떤 방식을 택하든, 몰카가 주가되는 시대는 갔다. 바햐흐로 캐릭터의 시대다. 요즘 예능에 필요한 것은 단순한 이야기 구조라도 그 구조 속에서 캐릭터가 발견되고 그 캐릭터로 인한 웃음이 창출될 수 있는 환경이다. <아는 형님>의 김희철과 <은위>의 김희철이 다른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면 답은 나온다. <은위>에는 착하고 순수해 보이는 연예인들은 있어도, 예능에 적합한 캐릭터 따위는 없다. 그것이 바로 몰카의 한계다. 예능의 성공은 섣불리 담보할 수 없고,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의외의 대박이 터지기도 하지만 의외성이 전혀 없는 예능에서는 그런 일을 기대할 수 없다. 시작한지 5개월이 지났지만 일요일 황금시간대에도 불구하고 <은위>의 저번주 시청률은 5.2%에 불과했다. 제작진은 부인했지만 폐지설이 나오는 것도 우연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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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8일 방영된 <뮤직뱅크>의 1위 후보는 아이유와 걸그룹 라붐이었다. 음원 줄세우기를 통해 ‘음원 퀸’의 자리가 건재함을 과시하며 컴백과 동시에 1위 후보가 된 아이유는 지난 ‘스물 셋’ 앨범에서는 가요 프로그램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음악 방송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에 아이유 컴백에 대한 화제성은 물론 컴백과 동시에 1위를 할 수 있을까 하는 호기심은 팬들의 관심을 촉발했다. 반면 라붐의 ‘휘휘’는 이미 음원차트에서 차트 아웃된 상황이었다. 그동안 음원순위나 인지도등 라붐의 파급력 역시 크다고 할 수 없었다. 인기 걸그룹에 비해 아직 존재감이 약한 라붐이 1위 후보가 된 것 조차 의아한 상황. 그러나 반전이 일어났다. 그 라붐이 1위를 차지한 것이다.

 

 

 


라붐은 음원과 시청자 선호도에서는 아이유에 크게 뒤졌지만 방송점수와 음반점수에서 아이유를 크게 앞지르며 1위를 거머쥐었다. 물론 아이유는 이제 막 앨범을 내고 방송을 시작한 상황이라 방송점수가 높지 않고, 음반 발매 전 선공개 곡이었던 ‘사랑이 잘’로 1위 후보에 오른 까닭에 음반 판매가 집계되지 않아 0점으로 처리 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사안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라붐의 1위 수상은 미심쩍은 부분이 많다.

 

 

 

 

 

 


인지도 낮은 라붐, 28000장 음반 판매의 비밀?

 

 

 

 


일단 라붐의 ‘휘휘’가 대중 친화적인 곡이 아니라는 점이 그렇다. 단순히 <뮤직뱅크> 1위 결과 점수를 분석해보아도 그렇다. 음원 순위도 그렇지만 시청자 선호도 점수 ‘0’점 이라는 점만 봐도 이 곡에 대한 반응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렇다고 라붐은 팬덤이 큰 그룹도 아니다. 라붐의 팬미팅은 100명을 모집했지만, 단 130명만이 신청하여 경쟁률이 낮았다. 보통 10:1의 경쟁률을 뚫어야 하는 인기 걸그룹의 팬사인회에 비해 팬덤이 크지 않다는 점을 증명하는 일이다. 노래조차 대중에게 생소한 느낌이 더 크다.  

 

 

 

 


생소한 느낌이 강한 까닭에 어떻게 집계되었는지 알 수 없는 방송점수도 의아하지만 그 부분은 넘어간다고 하더라도 대중적인 인기는 물론 열렬한 팬이 없는 상황에서 앨범 판매량이 급증했다는 것을 이해하기는 힘들다. 보통 앨범은 팬들의 공동구매와 대중적인 관심이 집중되는 첫 주에 가장 많이 팔린다. 더군다나 지금 가수의 팬이 아닌 일반 대중들은 앨범 구매욕구가 크지 않고 음원으로 듣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팬들의 화력이 그만큼 중요한 시대가 됐다. 그 화력은 앨범이 발매된 초반부에 가장 집중되는 경향이 짙다. 가수를 띄우기 위해서는 초반 물량 공세가 주효하기 때문이다.

 

 

 

 


 

라붐은 음원 순위에 있어서 차트 100위권에도 들지 못하는 성적으로 출발했다. 현재 음반 판매량과 비슷한 판매량을 보이는 가수들이 음원 차트에서 상위권에 랭크된 것과는 다른 모양새였다. 이런 상황에서 음반만큼은 처음부터 예약구매가 3000장이 넘으면서 한터 음반 차트 1위에 등극했다. 전작 ‘푱푱’의 총 판매가 3000장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하루에 수천장의 판매고는 엄청난 상승세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초동(첫 주 앨범 판매량)이 400장이 최고였던 라붐은, 하루 판매량이 점차 늘어나며 대박을 넘어 메가 히트에 가까운 앨범 판매량을 이뤄냈다. 17일 발매후 23일까지 앨범 판매량이 무려 28000장에 달한 것이다. 온라인 판매가 집계되지 않고 오프라인 판매만 집계되는 주말 판매순위만 한정한다면, 한터가 집계를 시작한 2008년 이후 여가수 음반판매 1위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트와이스의 기록도 넘어섰다. 꾸준한 히트곡을 내온 여자친구는 총판매량에서 라붐에 뒤지는 상황까지 펼쳐졌다. 이는 2008년 이후 등장한 모든 여가수들 중, 총판매량이 33위에 랭크되는 기적적인 상황이었고, 1위곡도 없이 이정도의 성과를 낸 전례는 없었다.

 

 

 


공감대 얻지 못한 순위차트, 조작논란만이 남았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영향력을 발휘할만한 근거가 지나치게 빈약했다는 것이다. 2014년 데뷔 후, 단 한번도 1위곡을 내지 못한 것은 물론, 음원 순위 상위권에서 찾아보기도 힘들었던 라붐이 음반이 불황인 상황에서도 작은 팬덤의 열세를 극복하고 28000장이 넘는 음반 판매고를 기록한 것에 대한 의구심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곧 사재기가 아니냐는 의혹이 터져 나왔다. 아이유를 누르고 음악 방송 1위를 차지하자 비난은 더욱 거세게 불었다.

 

 

 

 

단순히 라붐이 1위를 했기 때문에 쏟아진 비난은 아니다. 1위를 만들어 가는 상황에 있어서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고, 지나치게 허술한 방식으로 1위가 결정되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전에도 <뮤직뱅크>는 트와이스와 AOA의 순위를 뒤바꿔 발표하며 집계 오류를 인정한 바 있다. 그 이외에도 <뮤직뱅크>의 ‘조작 논란’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만큼 순위 자체에 신뢰성을 갖기 힘들다는 뜻이다. 이런 반응은 순위에 대한 신뢰보다는 사재기나 조작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1위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오히려 강하다는 뜻이다.

 

 


이런 조작방송이 더 쉬워진 것은 음악방송이 그들만의 리그가 되었기 때문이다. 음악방송의 시청률은 1%대로 해당 가수의 팬들이 아니면 거의 본방사수를 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또한 팬이라 할지라도 나중에 인터넷을 통해 얼마든지 지지하는 가수의 무대만 따로 감상할 수 있는 통로가 생기며 굳이 여러 가수들이 나오는 방송을 지켜볼 필요가 없어졌다.

 

 

 

 

그러나 시청률을 떠나서 가요 프로그램 자체를 전 세대가 공감할 수 없게 만든 것에 제작진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한 1위에 의미가 없어지자 순위 발표에는 긴장감이 없어졌다. 또한 전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음악이 아닌 아이돌 위주의 차트는 지나치게 편향된 모양새로 흘러갔다. 무대를 제대로 만들거나 노래를 제대로 들려줘야 한다는 의지도 프로그램 내부의 고민보다는 가수들의 능력에 더 크게 기대고 있다. 관심의 중심에서 멀어진 가요 프로그램 순위에는 논란만이 남았을 뿐이다.

 

 

 


공감대는 사라지고 조작 의혹만 불거지고 있는 상황 속에서 가요 프로그램의 순위는 가요 프로그램의 몰락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부끄러운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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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은 갈등을 유발하고 드라마의 활력을 불어 넣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카드 중 하나다. 각종 악역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지금 방영되고 있는 월화드라마 <역적-백성을 훔친 도적>(이하<역적>), <완벽한 아내><귓속말>에 등장하는 악역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악역들은 조금 특별하다. ‘사이코 패스’에 가까운 캐릭터로 주인공 이상의 존재감을 발휘하는 큰 위력을 가진 캐릭터들이기에 그렇다. 사실상 세 드라마 모두 악역의 힘으로 밀어 붙이는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역적>-가장 강력한 적, 사이코 패스 연산군

 

 

 


<역적>은 삼사 월화 드라마 중 가장 스토리의 결이 매끄럽다. 사극이지만 시의성을 반영하여 권력에 대항하는 힘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감정을 파고드는 부분이다. 영웅이 되어가는 홍길동(윤균상 분)은 백성에 대한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살리고자하고 그런 백성들의 반란을 폭동으로 여기는 연산군(김지석 분)은 절대 권력을 가진 기득권층으로 대표되며 절대 악으로 묘사된다.

 

 

 


그동안 연산군은 수많은 드라마에서 되풀이되어온 캐릭터다.  폐비 윤 씨의 사사,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등 드라마를 수놓을 수 있는 극적인 사건들이 충분한 소재였기 때문이다. 김지석의 연산군은 광폭한 폭군으로 수없이 묘사되었던 연산군의 계보를 잇고 있지만, 단순히 어떤 계기로 인해 폭군이 되었다기 보다는 애초에 보편적인 감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이코 패스’ 기질이 있는 것처럼 묘사된다.

 

 

 


‘인간 사냥’을 통해 홍길동의 몸을 부수는 연산군의 표정에는 죄책감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다. 인간을 사냥하며 짐승취급하는 연산군의 모습은 그의 내면이 짐승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엿보게 하는 것이다. 서늘하고 소름끼치는 감정표현으로 김지석은 악역임에도 ‘인생 캐릭터’를 만났다는 평을 들었다.

 

 

 

 

사람을 죽이는 일을 놀이 취급 할 만큼의 사이코 패스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와중에서도 자신의 위치가 무너질까 두려워 초조한 왕의 심리가 극적으로 표현되며 김지석의 연산군은 드라마 후반부에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완벽한 아내>-막장으로 달리는 스토리 안에서도 소름끼치는 ‘사이코’

 

 

 


이 드라마는 후반부로 갈수록 제목이 왜 <완벽한 아내>인지 조차 모호한 스토리로 뒷심을 잃어버렸지만, 이은희 역할을 연기하는 조여정만큼은 끝까지 연기의 중심을 놓치지 않는다. 이은희는 극 초반부터 웃음을 가장하고 있지만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캐릭터로서 극의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조여정은 이 이해하기 힘든 캐릭터를 시청자들에게 설득시킨 일등 공신이었다. 주인공 심재복(고소영 분)의 이혼에 기뻐하며 혼자 웃으며 춤을 추거나, 웃음 뒤에 언뜻 보이는 서늘한 무표정은 이 캐릭터의 심리 상태를 제대로 표현해 낸 것이었다.이은희의 정체를 숨기면서도 그 캐릭터가 안에 숨겨진 정상적이지 않은 자아를 표현해 내는데 조여정은 더할나위 없는 적역이었다.

 

 

 


이은희는 주인공 심재복 보다 훨씬 더 주목도가 높은 캐릭터다. 이은희가 벌이는 사건이 이 드라마에 가장 큰 중심 축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갈수록 정신병원에 심재복과 이은희를 가두며 다소 어이없는 전개로 흘러간 것은 아쉬운 부분이지만 그 안에서도 조여정은 소름끼치는 연기력을 선보이며 시청자들의 뇌리에 각인된다. 불안한 정신상태로 다른 사람을 상처입히며 즐거워 하는 ‘사이코’ 캐릭터는 <완벽한 아내>의 최고의 수확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귓속말>-자신이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사이코’

 

 

 


이보영, 이상윤 주연에 박경수 작가가 집필하여 화제가 된 <귓속말>은 작가의 색채가 짙게 배어 나오지만 전작들에 비해 부족한 느낌을 지워버릴 수가 없다. 사건은 사건의 꼬리를 물고 연속적으로 터지지만 반복되는 위기 상황 속에서 긴장감은 오히려 줄어든다. 사건을 터뜨리는 부분에서 강약 조절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 탓이다.

 

 

 


특히 이보영이 연기하는 신영주 캐릭터에는 오류가 많다. 아버지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고, 불치병까지 걸린 마당에 복수심에 불타오르는 것은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너무 앞뒤없이 사건에 덤벼드는 탓에 오히려 사건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걸림돌이 되고 만다. 뚜렷한 대책이나 계획 없이 무작정 달려드는 여자 주인공의 행동은 오히려 시청자들의 호감도를 떨어뜨리는 역할을 하고 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주목받는 것은 악역 캐릭터인 강정일(권율 분)과 최일환(김갑수 분)이다. 강정일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살인까지 저지르는 인물로, 자신이 가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빼앗기자 점차 괴물이 되어간다. 어떻게 보면 사랑 때문에 누군가를 위해 저지른 악행으로 시작된 일이지만, 그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사람에게 뒤집어 씌우고 그일로 인해 벌어진 일들이 자신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에 분노하는 모습은 결코 인간적이지 않다.

 

 

 


그러나 악역 악역의 심리와 고뇌를 놓치지 않는 스토리 라인 덕분에 ‘섹시한 악역’으로서 평가받으며 주목을 받고 있다. 강정일을 연기하는 권율 역시, 이 드라마로 그동안의 순수하고 착한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연기 변신을 인정받는 호연을 보여주고 있다. 다른 두 드라마에서 보다 감정적으로 절제된 캐릭터지만  어쩌면 주인공보다 더욱 주목받는 악역이다.

 

 


그 뒤에 있는 절대 악 최일환은 <귓속말>에서 가장 큰 사건을 만들어 내는 최종보스격 악의 축이다. 최일환은 신영주의 아버지 사건을 조작한데 이어서 이제는 강정일의 유일한 혈육이었던 강유택(김홍파 분)마저 살해했다. 자신의 이익과 성공을 위해서라면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는 그의 캐릭터가 주는 무게감은 드라마 전반을 짓누르고 있다.

 

 

 


강정일이 괴물이라면 최일환은 악마에 비견된다. 김갑수의 뛰어난 명불허전 연기력은 캐릭터의 존재감을 더욱 키우며 절대권력을 가진 가장 강력한 벽으로서의 역할을 확실하게 표현해 낸다.

 

 

 


주연보다 주목받는 악역, 공통점이 있다.

 

 

 


지금 주목받고 있는 악역들은 단순히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갖기 위해 전력투구하고 감정을 쏟아내며 악행과 거짓말을 서슴지 않는 악역이 아닌,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감정을 포기한 캐릭터들이다. 자신들이 잘못을 하지만 그 잘못이 실제로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남들의 고통에 대한 이해는 없으며 자신이 처한 고통은 참지 못하는 ‘사이코 패스’ 성격의 캐릭터들이 대세로 떠오른 것이다.

  

 

 

 

이런 악역들이 드라마 안에서 주목받고 그 캐릭터를 연기하는 연기자의 인기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은 시청자들이 그들에게 현실적인 감정이입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생활에 마주칠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닌, 드라마 안에서 존재하는 무지막지한 ‘사이코’ 캐릭터들은 ‘역할’로서 각인될 수 있다. 그런 캐릭터를 소화해 내는 배우들에 대한 찬사 역시 경험해 보지 못한 영역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능력에 대한 놀라움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악역에 힘을 지나치게 실어준 나머지 스토리 구조상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 역시 적지 않다. 주인공의 존재감이 약해지는 것은 물론 캐릭터의 붕괴역시 일어날 수 있다. 주목받는 악역을 만들어 내는 것 보다 그 캐릭터를 스토리 안에서 어떻게 잘 공존시켜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가 드라마에서 먼저 선행되어야 할 고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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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패러디의 조건은 무엇일까. 첫째로 공감대가 있어야 한다. 극소수만 아는 사건이나 인물을 패러디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미국에서 한국 대통령을 패러디해도 미국 사람들을 웃길 수는 없다. 반대로 오바마 대통령이나 트럼프를 한국에서 패러디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 사람의 특징이나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 한국 사람들 역시 전반적인 공감대가 있기 때문이다.한마디로 패러디는 ‘대체로 알만한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둘째로 의외성이 있어야 한다. 일단 패러디는 화제성 있는 사건을 다루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미 다른 곳에서 사용된 소재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패러디에는 이야기를 살짝 비틀어 예상치 못한 순간에 웃음을 터뜨리게 만드는 재치나 반전이 꼭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통쾌함이 있으면 금상첨화다. 단순히 누군가를 따라하는 것을 넘어서 통렬한 풍자와 비판을 가미한다면 카타르시스는 커질 수 있다.

 

 

 



활발했던 정치 패러디, 그러나 암흑기는 찾아왔다.

 

 

 


SNL(saturday night live)은 패러디로 사는 프로그램이다. 한 주간에 화제가 됐던 모든 것들을 패러디하며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그 공감에 대한 관심을 자양분 삼아 성장하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위클리 업데이트’같은 코너가 마련되어 있는 것 또한 최신 이슈에 민감한 SNL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부분이다. 미국에서 출발한 이 프로그램은 전 세계로 수출이 됐는데, 유독 한국 SNL 만큼은 패러디의 성역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여의도 텔레토비’등 활발했던 패러디가 정권 출범 이후 자취를 감춘 것은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던 방송사의 상황을 직감하게 해준다. 정치풍자는 완전히 사라졌고, 대통령 패러디도 자취를 감췄다. tvN의 모회사인 CJ e&m에 정치적인 압력을 받았던 것이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4월 14일 sbs 대선토론회에서 한 기자는 “세계 언론자유지수가 역대 최저 70위까지 추락했다”며 공영방송에 대한 반감과 불신을 지적했다. “대선 후보로서 공영방송의 점수를 평가해 달라.”는 질문에 후보들은 대부분 낮은 점수를 주며 공정한 언론을 만들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단순히 추측이 아니라, 언론 장악이 있었고 그런 사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단순히 시사프로그램이 아닌, 코미디 프로그램에까지 들이댄 칼날은 정권의 치졸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SNL은 코미디 프로그램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이 사태로 아주 큰 타격을 입은 프로그램 중 하나다. 정치풍자가 사라지자 뻔한 패러디로 전락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한국에는 정치인들을 직접적으로 패러디하며 코너로 만들 정도의 과감한 프로그램은 거의 없었다. SNL은 금기를 깨고 권력자들에 대한 날이 선 풍자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또한 ‘텔레토비’를 이용하여 캐릭터를 만들거나, 보모를 뽑는 오디션이라는 설정으로 대선주자들을 패러디한 인물들을 내세워 대선 토론을 패러디하는 등 패러디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공감대는 물론 의외성과 통쾌함을 다 잡아내며 화제에 올랐다. 단순히 성대모사나 흉내내기가 아닌 성격과 특징, 그리고 그들이 했던 발언들에 대한 해학은 SNL을 특징짓는 요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연예인 '디스' 정치 풍자만큼의 호응이 없었던 이유는?

 

 

 

 

 

 

그러나 이런 정치풍자가 사라지자 SNL은 연예인에 집중한다.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유명인들에대한 패러디는 공감대를 불러일으키기 쉽기 때문이다. 잘못을 저지른 연예인들을 ‘디스’하거나  잘못을 저질러 자숙기간을 거친 연예인들이 호스트로 출연해  자신의 잘못을 희화화 하는 ‘셀프디스’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잘못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개그 소재로 삼는 것은, 곧 유행처럼 번졌지만 시청자들의 반응은 점점 차갑게 돌아서고 있었다.

 

 

 


그 이유는 마치 연예인들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진지한 반성이나 성찰보다는 가벼운 농담거리로 전락시키는 행동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물론 과거의 잘못에 대해 입을 꾹 다문채 아무 말도 못하는 강압적인 분위기나 잘못을 모른 척 하는 행태보다는 낫지만, 자신이 한 잘못들에 대한 가벼운 농담은 때때로 불쾌했던 것이다. 정치인에 대한 패러디의 무게와 연예인들의 패러디의 무게는 같을 수 없었다. 정치는 사회 전반에 걸친 중요한 사안이지만 연예인들은 재미와 흥미에 국한되어 있는 인물이다. 정치에 대한 패러디는 사회에 대한 패러디와 맞물려 있지만, 연예인에 대한 디스는 그렇지 못했다. 그런 이들이 사회적인 문제를 저지르고, 그 문제를 희화하 하자 풍자와 해학이 아닌, 그 잘못은 단순한 웃음거리가 되고 만것이다.  통쾌함도 풍자도 해학도 없는 패러디는 결국 잘못을 가볍게 넘기려는 연예인들의 이미지 메이킹에 불과했다.

 

 

 


 

‘셀프디스’뿐 아니라 전반적인 연예인 디스 역시 빛을 잃어버린 것은 마찬가지였다. 정치인의 잘못된 행동에는 입을 다물고, 그 대체제로 선택한 것이 연예인이라는 것은 강자에게는 몸을 사리고 약자에게는 칼날을 들이대는 전형적인 행동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SNL의 패러디는 자유로운 영역이 아니라 한정된 영역에서만 가능했고, 몸을 사린 개그는 외면 받기에 충분했다. 연령대가 15세로 낮춰지면서 섹시코미디 역시 순화할 수밖에 없었던 SNL은 전반적으로 침체기를 걸을 수밖에 없었다.

 

 

 


다시 활력을 찾은 SNL, 언론의 자유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우다

 

 


그러나 최근 SNL은 다시 활력을 찾았다. 바로 박근혜 정권이 퇴진하고 나서 부터다.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SNL은 다시 정치 패러디를 쏟아냈다. 이번에는 <프로듀스 101>과 <미운 우리새끼>(이하 <미우새>)를 패러디해 ‘미운우리 프로듀스 101’이란 코너를 만들어 냈고, 정치인들에 대한 통렬한 풍자를 이어갔다. 반응은 뜨거웠다. 단순한 성대모사가 아닌, 코미디에 섞인 시의성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마음 속 깊은 공감대를 형성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립싱크 파문으로 퇴출된 JYD 여가수 컴백 문제”같은 식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풍자 역시 서슴지 않는다. 가장 눈여겨 볼 점은 정치 풍자를 젊은 감각으로 바꿨다는 것이다. 단순히 정치인의 말을 인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살짝 비틀어내는 능력은 SNL만의 장점으로, <개그콘서트>등 다른 프로그램에 비해 한 단계 높은 수준이라고 할 만하다.

 

 

 

 

젊은 층이 보는 <프로듀스 101>같은 아이돌 오디션등과 인기있는 <미우새>을 이용해 정치를 어렵고 지루한 것에서 젊은 층이 공유할만한 이야깃거리로 바꾸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로 정치적 사건을 비틀어 내 웃음을 선사했다는 점에서 SNL의 시도는 신선함을 제공한다. 이렇듯 SNL의 패러디가 성공적일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성역없는 개그’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속박이 아닌 자유가 프로그램 하나를 어떻게 바꾸는지를 통해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다시 한 번 확인한 셈이다. 왜 언론이 정권과 결탁하면 타락할 수밖에 없는지는 시사 프로그램도 아닌 SNL만 봐도 증명이 되는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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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는 갈등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인물간의 대립은 드라마에서 필수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주말드라마 <아버지가 이상해> 속에서도 여러 가지 갈등관계가 나온다. 형제자매간의 갈등, 부모와의 갈등, 연인과의 갈등, 직장에서의 갈등 등, 뜯어보면 모든 관계는 갈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모든 갈등 중, 가장 비중있게 다뤄지는 갈등 중 하나는 바로 변미영(정소민 분)과 김유주(이미도 분)의 갈등이다. 그들의 악연은 학창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유주는 학창시절 변미영의 뚱뚱한 몸을 약점 삼아 괴롭혔던 학교폭력 가해자다. 변미영은 소심한 성격 탓에 제대로 반격조차 하지 못하고 학창시절을 보내야 했고, 그 시절은 고스란히 아픈 기억으로 남는다. 동창회에서 김유주의 모습을 보고 잘못이라도 한 사람처럼 도망치듯 자리를 뜨는 쪽은 변미영이다.

 

 

 

 

 

 

동창회 정도로 끝이 난다면 다행이지만 악연은 성인이 되어서도 지속적으로 이어진다. 변미영이 힘겹게 취직한 회사에 바로 김유주가 있었기 때문. 직속 상사는 아니지만, 김유주는 이미 팀장이다. 인턴으로 겨우 회사 생활을 시작한 변미영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높은 위치에 있는 것이다. 김유주는 여전히 변미영에게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존재고 피해자지만 피해야 하는 쪽은 또다시 변미영이다. 살을 뺀 변미영을 못알아 보던 김유주가 변미영을 알아보자 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김유주는 여전히 뚜렷한 이유 없이 변미영을 못마땅해 하며 변미영 앞에서 대놓고 신경을 긁거나 부당한 일을 시키거나 하며 변미영을 괴롭힌다.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아픈 과거, '사이다'를 위해서라기엔 가혹하다

 

 

 


학창시절 이후 시간은 많이 흘렀지만 변미영은 여전히 김유주의 발아래 놓여있다. 단순히 사회적 위치 때문이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그렇다. 그 때 당했던 일에 대한 트라우마는 현재도 영향을 미친다. 변미영은 김유주의 얼굴만 봐도 가슴이 떨린다. 당한 건 변미영이지만 피하는 쪽도 변미영이다. 그것은 약육강식의 법칙이라기엔 지나치게 가혹하다. 

 

 

 


 

드라마는 이런 상황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킨다. 바로 변미영의 오빠 변준영(민진웅 분)을 통해서다. 김유주는 변준영과 사귀고 있는 상태고, 급기야 임신까지 한다. 중간에 변준영의 거짓말로 인해 사이가 위태로워지지만 뱃속의 아이는 이 모든 것을 극복하게 만드는 매개채로 사용되고 김유주와 변준영은 결국 결혼을 결심한다. 변미영과 김유주의 갈등이 심화될 수밖에 없는 지점이다.

 

 

 

 

 

 

이런 전개는 나중에 김유주에게 변미영 측이 던질 통쾌한 한방을 위해 마련된 것이다. 변미영의 언니인 변혜영(이유리 분)은 변미영과 다르게 당당하고 자신의 권리를 찾을 줄 알며, 누구에게도 주눅 들지 않고 독설을 내뱉는 캐릭터다. 막내 동생 변라영(류화영 분) 역시 천방지축에 할 말 다하는 캐릭터로 설정되었다. 변미영의 상황을 알면 시원한 탄산음료를 들이키는 느낌의 통쾌한 한 방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그런 통쾌함을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 학교 폭력 희생자에 대한 드라마의 시선은 안타깝다. 김유주가 변미영의 집으로 인사를 온 날, 두 사람은 서로의 관계에 대해서 처음으로 인지하게 되지만 변미영은 가족들에게 진실을 말할 수 없다. 변준영이 김유주를 너무나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김유주가 임신했기 때문인 탓이 더 크다. 작가는 김유주의 임신으로 두 사람이 앞으로 가족이 될 수밖에 없다는 복선을 깐다. 그것이 바로 한국 가족 드라마의 정서고, <아버지가 이상해>는 바로 그 정서를 답습할 수밖에 없는 가족극이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고통받는 피해자, 극복은 개인의 몫인가?

 

 


그러나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자. 김유주를 받아들이면 앞으로 변미영은 끊임없이 고통받을 것이다. 김유주를 마주쳐야 할 때마다 오는 떠올리기 싫어도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과 고통의 시간들을 변미영에게 감당케 하는 것은 지나친 폭력이다. 물론 드라마는 이 둘의 분위기를 점점 화해 모드로 변모시켜 나갈 것이다. 그러나 용서라는 것은 그리 함부로 다룰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아무리 김유주가 후에 개과천선하고 진심으로 용서를 빈다 해도 가족이 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자신을 괴롭혔던 사람과 친하게 지내야 하는 상황이 억지로 형성되는 것만큼 불편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용서했다는 뜻이 곧 가족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뜻은 아니다. 용서와 관계는 별개의 문제다. 용서를 했다고 하여 친하게 지내야 할 이유도 없고 필요도 없다.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문제라면 더더욱 그렇다.

 

 

 


아무리 다 잊자고 해도 잊혀지지 않는 것이 과거고, 사과를 해도 저질렀던 일을 되돌릴 수는 없다. 김유주가 오빠와 결혼을 원하면서 칼자루를 쥔 쪽은 변미영이 되었지만, 변미영은 여전히 피해자다. 자신이 어떤 일을 당했고 얼마나 힘들어야 했는지 가족에게조차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억울하다고 말조차 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피해자는 점점 더 깊은 나락으로 빠져들고 만다.

 

 

 

 

 

 

누군가가 희생해야 한다면, 사과를 하는 쪽이 희생을 해야 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 억지로 하는 사과는 진심어린 사과가 아니다. 김유주가 그렇다. 변준영과 변미영의 관계를 알기 바로 몇 시간 전만해도 김유주는 변미영을 부당하게 괴롭히며 ‘갑질’을 서슴치 않았다. 관계를 알고 나서 바로 돌변한 김유주의 친절은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소름이 끼칠 뿐이다. 진정어린 사과를 할 거라면 변미영이 원하는 사과를 해야 한다. 변미영은 “원하는 것이 뭐냐”는 김유주의 질문에 “너랑 가족이 되지 않는 거.”라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그 뜻을 존중해 줘야 진정한 사과가 될 수 있다. “그건 못하지만 미안한 건 미안해”라고 얘기해 봤자 목적을 위한 사과가 될 뿐이다.


 

 

 

 


용서와 화해의 강요, 제 3자가 아닌 당사자에게는 폭력이다.

 

 


용서도 좋고 화해도 좋다. 그러나 학교 폭력 피해자와 가해자를 한데 모아두고 가족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당사자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소름끼치는 일인가. 실제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친구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가족 관계도 끊길 수 있는 중차대한 일이다. 그러나 드라마는 이 두 사람의 관계를 결국에는 화해할 수밖에 없는 뉘앙스로 몰고 간다. 그것이 과연 학교 폭력 피해자에게는 얼마나 끔찍한 악몽인지는 제대로 표현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감정을 변미영이 극복해야 할 과제처럼 몰고간다. 가족들에게 말을 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혼자 갈등하며 김유주를 상대해야 하는 쪽은 변미영이다. 김유주를 마주칠 때마다 혼자서 마음을 진정시켜야 하는 것도 물론 변미영이고 반격을 한 번 할 때마다 큰 결심을 해야 하는 것도 변미영이다.

 

 

 


이런 일이 있다면 당연히 말을 할 수 있어야 하고, 서로의 마음을 공감 받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 가족이다. 변미영과 김유주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닌, 가족의 무관심 나아가 학교의 잘못된 시스템과 분위기가 만든 사회적인 문제다. 그러나 이 문제를 오롯이 떠안아야 하는 것은 변미영 개인이고, 결국 그를 용서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도 변미영이다.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끔찍한 일이다.

 

 

 


학교 폭력 가해자를 가족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고 해서 그 누가 치졸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드라마는 용서를 납득할만한 계기를 만들 것이다. 그러나 ‘용서해야만 하는’ 상황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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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의 여왕>의 주인공 유설옥(최강희 분)은 놀라운 추리실력을 가졌지만, 그 특출 난 능력을 발휘하고 살 기회가 없었던 인물이다. 누군가의 학력이나 사회적 위치는 어쩔 수 없이 그 사람을 평가하는 중요기준이 된다. 명문대나 대기업이라는 간판은 한 사람의 가치를 다시 평가하게 만든다. 금수저라는 말이 유행한 것 또한 '스펙'에 대한 열망에서 비롯됐다. 가끔은 비아냥을 가장하기도 하지만 '금수저'에 대한 단어에 숨겨져 있는 것은 ‘금수저’에 대한 호기심과 부러운 시선이다. 이런 현상 역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재산’이라는 가치가 그 사람의 삶 전반을 평가하는 요소가 되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누군가의 삶에 대한 행복도는 그 사람의 인간관계나 인격에 훨씬 더 큰 영향을 받지만, 제 3자가 누군가를 평가할 때는 막연히 그 누군가가 가지고 있는 재산이 많을수록, 지위와 명예가 높을수록,  더 행복한 삶을 영위할 것이라고 여긴다. 반대로 이것은, 더 가지지 못한 자들은 상대적으로 박탈감에 시달리고 불행을 끊임없이 상기하며 살아갈 것이라는 편견을 뜻하기도 한다.

 

 

 



스펙을 속여야 추리를 할 수 있는 주인공의 현실

 

 

 

 



유설옥은 그런 편견을 그대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결혼 8년차 주부. 학력은 고졸이다. 거기에 시누이와 시어머니의 지독한 시집살이까지. 남편이 검사라는 멀쩡한 타이틀을 가지고 있지만 유설옥에게 오히려 그 타이틀은 버거운 짐이다. 남편에 비해 스펙이 없는 유설옥은 집안에서 제 목소리 한 번 내기 어려운 존재기 때문이다. 유설옥의 희생은 남편이 검사가 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지만, 실제로 스펙을 가진 것은 남편이고 유설옥은 그저 별볼일 없는 아줌마일 뿐이다.

 

 

 


그런 유설옥에게도 특기가 있었으니, 바로 추리력이다. 추리소설은 물론, 각종 범죄학 전공서적과 흥미로운 사건들에 대한 기사 스크랩까지. 한때 형사가 꿈이었던 유설옥은 돈 주고도 배우거나 살 수 없는 방대한 양의 지식과 간접경험을 쌓았다. 물론 이것은 학위가 없는 한, 단순한 취미일 뿐 결코 인정받을 수 있는 스펙은 아니다.

 


그런 유설옥과 엮이는 형사 하완승(권상우 분)은 처음에는 유설옥의 추리를 무시하지만, 유설옥이 정리한 자료들을 본 후에야 ‘범죄한 박사냐’고 묻는다. 유설옥은 ‘뭐, 비슷한.’이라고 대답하며 대답을 얼버무린다. ‘심리학?’이라고 다시 묻는 하완승에게 ‘뭐….’라며 말끝을 흐리자, 유설옥을 심리학 박사로 오해한 하완승은 그제야 그의 추리를 새겨듣게 된다. 결국 ‘고졸’ 학력의 여성이 가진 한계로는 누군가를 설득시키는 일조차 쉽지 않다.

 

 

 


 

우여곡절 끝에 그토록 염원했던 사건 현장에 투입되어 추리를 시작하는 유설옥의 가슴은 설렌다. 클리셰라도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인물의 뛰어난 능력 발휘는 충분히 흥미롭다. 내용 전개는 크게 새롭지 않지만, 여성 탐정이라는 소재는 한국에서 좀처럼 사용되지 않은 소재이기도 하다. 아줌마에, 고졸. 이 모든 편견을 뛰어넘어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유설옥의 모습은 꽤 특별하게 다가온다.

 

 

 



유설옥의 마이너스 스펙, 잘못된 순간에 활용되는 우를 범하다

 

 

 


그러나 드라마는 유설옥의 이 평범함 속에 숨겨진 비범함을 증명하는 데 시간을 할애해도 모자른 순간에 유설옥을 현실로 끌어내린다.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울리는 시어머니의 전화가 대표적인 예다. 추리에 점점 몰입하는 유설옥은 강하게 주장하여 증거 자료를 확인하거나, 취조실까지 들어가는 데 성공한다. 여주인공이 그런 억지를 부린 후 시청자들이 기대하는 포인트는 여주인공의 멋진 능력 발휘의 순간이다. 그러나 그 순간에 울리는 전화벨 소리는 이 모든 기대를 산산이 부수며 여주인공을 ‘민폐형’ 캐릭터로 전락시킨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댁에 매여살 수밖에 없는 여성의 캐릭터는 구태의연하다. 자신의 권리나 요구조건을 관철 시키지 못하는 며느리는 이미 수없이 경험한 캐릭터의 변주에 불과한 것이다. 아니, 구태의연함을 신선하게 풀지 못한 탓이 더 크다.  능력을 실현하는 데 있어서 걸림돌을 만들어 긴장감을 주려는 속셈이었겠지만, 문제는 이런 여주인공의 현실이 공감보다는 답답함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굳이 유설옥의 스펙이 발목을 잡는 장면이 추리의 한 가운데 일 필요는 없는 일이다. 드라마가 4회동안 진행되는 동안 주인공의 스펙에 대한 편견은 이미 깨진 후다. 그러나 다시 등장한 유설옥의 시어머니라는 마이너스 '스펙'은 군더더기에 불과하다.

 

 

 


 


포인트를 잡지 못한 엉성한 긴장감, 과연 '몰입도의 여왕'이 될 수 있을까.

 

 



<추리의 여왕>의 포인트는 바로 ‘추리’에 있다. 추리라는 소재를 살리지 못하면 이 드라마의 긴장감을 보장할 수 없다. 시집살이나 스펙에 대한 한계등은 어디까지나 양념이다. 그 양념을 활용하여 완성시켜야 하는 것은 바로 주인공이 하는 추리의 기승전결이다. 그 세부사항이 얼마나 잘 조율되느냐에 드라마의 성패가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제는 <추리의 여왕>은 ‘추리’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살인사건이라는 심각한 상황속에서 울리는 전화벨과, 코믹함으로 넘어가는 설정은 엉성한 사건 구조를 메우기 위한 장치지만, 오히려 추리과정에 대한 엉성함을 더 돋보이게 만드는 역할을 했을 뿐이다. 사건의 긴박함이나 이야기의 반전등에 힘을 싣지 못하고, 여주인공의 주변 상황에 힘을 빼앗기는 것은 전혀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야기는 점점 긴박해지기 보다는 느슨해지고 피곤해지며 사건의 해결은 다음주로 넘어간다. 이런 이야기 구조는 몰입도를 떨어뜨린다.

 

 

 


<추리의 여왕>에서 시청자들은 ‘추리’를 보기를 원한다. 그 추리란, 긴박함과 반전으로 시청자들을 들었다 놨다 할 수 있을 정도의 몰입력을 갖춰야 한다.  영국 드라마 <셜록>에 많은 매니아들이 열광한 이유를 생각해 보라. 사건에 맞닥뜨린 주인공은 독특한 캐릭터로 사건을 해결하는데 온 힘을 기울인다. 그리고 한 사건의 호흡은 2회를 넘기지 않는다. 자칫 늘어지면 추리극은 몰입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추리극은 보통 드라마 보다 훨씬 더 긴밀하고 치밀한 구성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잡다한 이야기를 빼고 번잡스럽지 않은 추리극을 <추리의 여왕>으로 보게 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욕심일까. 시청자는 주인공의 긴박한 ‘추리’의 현장에 동화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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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혼’이라는 신조어가 나온 것은 우리 시대의 결혼관이 어떻게 변해가는가를 보여주지만, 왠지 가슴 한 편에 씁쓸한 감정을 남긴다. 결혼을 졸업한다는 뜻의 졸혼은 이혼은 하지 않지만, 배우자와의 관계를 지속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졸업이라는 거창한 단어가 포함된 말이지만 말처럼 끝에 대한 아쉬움과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를 동반한 시원섭섭함으로 다가오는 단어는 아니다.  

 

 

 

 

 

 

 

예능 <살림하는 남자들>(이하<살림남>)에 나오는 백일섭은 졸혼 이라는 단어를 친숙하게 만드는 인물이다. 그러나 이 졸혼이라는 단어는 그의 생각과 가치관에서 출발하여 붙여진 이름이 아니다. 백일섭은 <살림남> 기자간담회에서 “졸혼이라는 단어를 몰랐다.”고 밝혔다. 이어서 “어느 날 갑자기 기자한테 전화가 와서 '졸혼하셨군요' 하길래 그때서야 알았다. 자꾸 그런 기사가 나서 여성분들한테 미움을 사지 않을까 조심스러웠다. 졸혼 얘기가 조심스러웠는데 졸혼을 또 좋아하는 분들이 있어 다행스럽다. 오늘을 끝으로 졸혼 얘기는 그만하겠다"고 말하며 오히려 졸혼이라는 단어에 대한 부담감을 나타냈다.

 

 

 


백일섭의 <살림남>속 모습은 졸혼으로 포장되지만 뜯어보면 별거와 다를 바가 없다. <살림남> 속 백일섭의 모습은 그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다. 70살이 넘었지만, 여전히 혼자서 밥을 챙겨먹고 설거지를 하는 일 조차 어색하기만 한 그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혼자라서 자유로운’ 인생이 아니다. 자신의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고 삶의 의미를 다시 찾기 위해 배우자와 합의되어 이루어진 성숙한 관계라기보다는 서로 악화된 관계 속에서 더 이상 혼인을 지속할 수 없는 상황의 결말처럼 보인다. 혼자 살지만 여전히 며느리의 도움이 필요한 그는,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추구한다기 보다는 가부장시대의 안타까운 결말을 보여주는 듯 하다.

 

 

 

 

지난 5일 방송에서 백일섭은 아내와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딸과도 2년 째 교류가 끊겼음을 밝혔다. 아들과 만나 술을 마시던 중, ‘온가족이 모여 고기를 먹는 것이 소원’이라는 아들의 말에 눈물을 흘리는 백일섭의 모습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나도 가슴이 많이 아프고 미칠 것 같다. 네 마음 안다.”는 말 끝에 나온 '행복하자, 사랑한다'는 백일섭의 말은 그가 지금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발언이다. 그 말을 통해 그도 이런 상황을 의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백일섭은 <살림남> 기자 간담회에서도 지금 상황에 대한 소회를 이야기한다.

 

 

 


“나는 백년해로를 포기하고 (집을) 나왔지만 부부가 백년해로를 하기 위해서는 굉장히 피나는 노력이 필요한 것 같아요. 특히 좋든 나쁘든 부부간에 대화를 많이 해야 오래 같이 살 수 있는데 우리 부부는 애초부터 대화가 너무 없어서 결국 혼자 살게 된 것 같아요. 내가 워낙 바쁘고 술 한잔 마시고 늦게 들어오고 또 아침 일찍 (촬영하러) 나가야 했거든. 지금은 그 부분을 가장 많이 반성하고 있어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이해를 바라지만, 가족은 오히려 너무 가깝기 때문에 서로에 대해 무심해지기 쉬운 존재다. 같은 공간에서도 서로와 멀어지고 서로에게 상처만이 되는 가족간의 관계가 생각보다 빈번히 일어난다. 그러나 가족이라는 이름 때문에 이 갈등이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결국 서로에게 큰 상처를 남기고 등을 돌리는 사태가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집을 나와서 생활해 보니까 그동안 내가 너무 사랑이라는 것을 몰랐고 사랑이 부족했던 것 같아요. 강아지 제니를 입양해 함께 생활한 지 두 달 됐는데 제니가 내 행동반경을 먼저 읽는 것을 보면 또 하나의 가족이 생긴 것 같아요. 같이 살 때보다 아들, 며느리와 대화도 많아지는 등 사이가 좋아졌고 ‘살림남2’에 함께 출연 중인 정원관, 일라이의 모습을 보면서 사랑을 다시 배워 가고 있습니다.”

 

 


백일섭의 말처럼 가까운 사이일수록 그 소중함에 대하여 무심하다. ‘가족이니까’ 당연한 관계가 아닌,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끊임없이 환기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아버지들에게 그런 사고방식은 익숙하지 않다. 항상 무뚝뚝한 얼굴로, 따듯한 말 한마디 걸 줄 모르고 집안일이나 아이 양육에도 참여하고 싶어 하지 않아 한다. 자신을 위해 따듯한 밥을 만드는 부인의 수고로움 따위는 당연히 해야 할 일로 치부하고, 아이들과도 대화보다는 설교와 강요로 일관하기 일쑤다. 평소에 유대관계를 쌓지 못한 상태에서 들리는 설교는 오히려 반항심을 자극하고 마음의 문을 더 굳게 닫히게 만든다.

 

 

 


백일섭의 경우 역시, 그런 아버지들에 대한 공감대를 바탕으로 해석된다. 예전 <꽃보다 할배>에서 부인이 만들어 준 장조림을 걷어차던 모습은 지금까지도 그의 가부장적인 모습을 대변하는 모습이다. <살림남>에서도 며느리가 나와 그 장면을 언급하며 “그런 것이 아니다.”고 해명을 해 보지만, 어디까지나 며느리는 관계가 틀어진 당사자인 부인이나 딸의 입장은 아니다. 그 때문에 여론은 쉽게 돌아서지 않는다. 그런 단편적인 모습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결국 백일섭 스스로도 인정했듯, 오랜 기간 동안 가족 구성원 사이의 소통의 부재는 아버지의 빈자리를 당연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백일섭에게 며느리에게 주었던 '힘들지? 사랑한다'는 편지를 아내에게도 주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상황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아버지라고 해서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백일섭이 가족관계가 소원해 질동안 열심히 일한 것 또한 혼자만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가족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백일섭 역시 가족의 생계를 아직도 책임지고 있음을 밝혔다. 그러나 결국 살던 집을 나와야 했던 것은 백일섭이다. 아버지의 그런 고생과 희생에 대한 고마움이 희석되는 것은, 가족들과 나누지 못한 마음 때문이다. 가족을 당연히 그 자리에 있어야 하고, 권위를 내세워야 하는 존재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따듯하게 보듬어야 할 인격체로서 대했다면, 오히려 남편 그리고 아버지로서의 권위는 자연스럽게 생겼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백일섭은 '졸혼'으로 포장된 별거를 한 상태다. 

 

 


<살림남>은 ‘살림하는 남자’라는 소재를 삼았다. 남자의 육아, 남자의 살림, 남자의 처가 방문등이 예능의 소재가 되는 것은, 과거보다 나아졌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남자들이 그런 일을 하는데 익숙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일이다.

 

 

 


 

소외된 아버지들의 모습은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익숙하지 않음을 핑계로 외면하고 부정했던 일들이 나이가 들수록 스스로의 발목을 잡는 것이다. 백일섭처럼 따로 사는 집도 있지만 같은 집안 내에서 본인이 설 자리를 찾지 못하는 이시대의 아버지들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졸혼이라는 신 풍속도를 가볍게 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배우자는 선택할 수 있지만, 저절로 가족이 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자녀들은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날 수 없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 자연스럽게 법적으로 가족이 되지만, 그 관계는 법적으로 규정할 수도 없고, 저절로 성장하지 않는다. 서로에게 하는 작은 배려. 던지는 따듯한 말 한마디 같은 것들. 그런 작은 것들이 모여서 서로의 유대를 만든다는 단순하고 간단한 진리. 가족이기에 그 진리를 잊어버리기 십상이지만, 가족 구성원 누구라도 그 진리를 마음에 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살림남>속 백일섭에게서 느낄 수 있다.

Posted by 한밤의연예가섹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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