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4월 드라마 대전’이 개막됐다. 각 방송사가 자존심을 걸고 준비한 새로운 드라마들이 대거 등장하는 가운데 과연 어떤 작품이 최후의 승자가 될 것인지 그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그러나 경쟁이 뜨거운 만큼 부작용도 속출하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기존의 편성을 완전히 무시하는 ‘변칙편성’이다.
시청률 지상주의가 낳은 ‘변칙 편성’
시청률은 작품의 성패를 판단하는 대표적인 잣대 중 하나다. 방송사 입장에선 시청률이 높을수록 광고를 많이 팔고, 그만큼 수익을 낼 수 있다. 현재 방송 시장에 시청률만 높으면 만사 OK라는 ‘시청률 지상주의’가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상식 이하의 변칙 편성이 자행되는 원인도 이와 결코 무관치 않다.
최근 MBC는 3월 25일 월화 드라마 <마의>를 끝내고 나서도 이튿날인 26일 이어 4월 1, 2월에도 후속작을 방송하지 않아 구설수에 올랐다. 4월 1일에는 <2013 봄 MBC 드라마 빅3 스페셜>을 방송 예정이고, 2일에는 특선영화 <차형사>가 편성되어 있다. 새 월화드라마 <구가의 서>의 첫 주 방송을 SBS <야왕>의 마지막 주 방송과 겹치지 않게 하기 위해 꼼수를 부린 것이다. <야왕>의 마지막 회가 높은 시청률을 기록할 가능성이 큰 만큼, 무리하게 경쟁하느니 차라리 방송을 한 주 미루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셈이다.
이러한 변칙 편성은 비단 MBC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난 2월 13일, SBS는 <그 겨울, 바람이 분다>의 1, 2회를 연속 방송 해 논란을 일으켰다. SBS 측은 “드라마의 촘촘한 구성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강변했지만 같은 날 시작한 <아이리스2>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전략이 아니냐는 의심을 피할 순 없었다. 방송사끼리 합의한 ‘드라마 72분 룰’을 일방적으로 깨버린 것 또한 문제였다.
당시 이강현 KBS 드라마 국장은 “업계 상도 상 이건 아니다. 룰이 쉽게 무너지고 깨지면서 자괴감이 들었다”며 강도 높게 비난했다. 그러나 KBS 역시 <그 겨울, 바람이 분다>의 2회를 견제하기 위해 본래 편성된 <추적 60분>을 특선영화 <고지전>으로 갑작스럽게 교체해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SBS의 변칙 편성 전략에 똑 같은 방법으로 맞불을 놓으면서 가해자도 피해자도 없는 진흙탕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이는 비단 어제 오늘만의 일이 아니다. 과거에도 SBS는 MBC <해를 품은 달>의 마지막 주 방송을 피해 <옥탑방 왕세자> 첫 방송을 한 주 미뤘었고, KBS는 <적도의 남자> 첫 방송을 무려 3주나 연기하는 무리수를 둬 시청자들의 거센 저항에 직면한 바 있다. 초반 시청률을 조금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자존심도, 정체성도 모두 포기한 수준 낮은 경쟁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콘텐츠로 승부하는 환경 정착돼야
방송사가 서로 눈치를 보며 변칙 편성을 자행하는 동안 그 피해를 고스란히 감내해야 하는 쪽은 애꿎은 시청자들이다. 수익 올리기에만 급급한 방송사들로 인해 시청자의 ‘볼 권리’가 심각하게 침해받고 있는 것이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방송은 시청자가 주인”이라는 말이 무색해 지는 순간이다. 방송사 스스로 지금껏 쌓아올린 믿음과 신뢰를 무참히 무너뜨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방송사는 공급자이고, 시청자는 소비자다. 공급 자체가 소비로 인해 존재할 수 있다면 공급자는 언제나 소비자의 만족을 최우선시 해야 한다. 눈앞에 있는 이익만을 좇는 근시안적 경영 대신 보다 넓고 멀리 보는 안목을 갖춰야 하는 이유다. 경쟁작을 의식한 무분별한 변칙 편성은 오히려 시청자들의 불만만 키우고, 각 방송사 간의 감정의 골만 깊어지게 하는 최악의 전략일 뿐이다.
이제라도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콘텐츠의 내실이다. 작품만 좋다면 시청자들은 언제라도 볼 준비가 되어 있다. 작년 한 해 큰 호평을 받은 SBS <추적자>의 경우만 봐도 그렇다. 콘텐츠 그 자체로 승부를 볼 각오를 해야지 이런 저런 핑계 대며 반칙과 편법을 당연하게 자행하는 건 너무 비겁한 행동이다. 지상파 방송이 지니고 있는 권위와 품격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1~2% 시청률에 희비가 엇갈리는 작금의 방송 환경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팍팍한 현실을 핑계로 잘못된 관행까지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여선 안 된다. 느리지만 꿋꿋이 옳은 방향으로 바꿔 나가려는 노력이 선행될 때에만 오늘보다 더 진보한 내일을 맞이할 수 있다. 방송사와 제작진, 시청자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건 더 이상 거부하기 힘든 시대적 요구다.
이런 상황에서 망가져 버린 ‘72분 룰’의 복원은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2008년 3사 드라마 국장이 합의한 대로 확대 편성, 드라마 연장, 연속 방송, 무분별한 결방 등을 자제하고 드라마 편수를 조정해 ‘제 살 깎아먹기’식 경쟁을 당장 중단해야 한다. 구두 합의에서 한 발 자국 더 나아가 이를 법제화하고 실천하려는 노력이 더해진다면 금상첨화다. 공정한 규칙은 공정한 경쟁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시청자가 만족할만한 좋은 작품으로 치열하게 경쟁하고, 이 과정에서 도출된 결과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는 데도 신경을 기울여야 한다. 시청률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시청률 지상주의’에서 과감히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가 자리 잡아야 작품을 만드는 모든 이들이 사명감과 자존심을 지키며 작업을 할 수 있고, 변칙 편성 같은 꼼수 역시 설 자리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제 문제 해결의 공은 각 방송사에게로 넘어갔다. 과연 그들은 처절한 자기 성찰과 혁신 의지로 무너진 신뢰를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 시청률 지상주의가 아닌 ‘시청자 지상주의’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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