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의 남자]가 클라이막스를 향해 치달아 가고 있다.


사육신의 반란과 세령의 반항에 점점 더 평정심을 잃어가고 있는 세조의 모습과 그에 대항하는 김승유 집단의 단종복위계획이 구체화 되면서 갈등이 고조 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22일 방송분에서는 세조의 맏아들인 의경세자가 병에 걸려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장면이 방송됐다.


세령은 이를 두고 아버지인 세조에게 "당신의 업보를 자식들이 받아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라고 일갈한다. 그렇다면 세령의 말처럼 세조의 자식들은 정말 일찍 죽었을까?


세조는 정비인 정희왕후 윤씨에게 2남 1녀를, 후궁인 근빈 박씨에게 2남을 두어 총 4남 1녀를 두었다. 여기서 세령 캐릭터의 모티브가 된 세희공주까지 합치면 4남 2녀다. 그렇다면 생몰년이 미상인데다가 여전히 실존 여부를 두고 말이 많은 세희 공주를 제외한 나머지 세조의 자식들은 몇 살에 세상을 떠났을까.


우선 세조의 맏아들인 의경세자(훗날 추존왕 덕종)은 20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해서에 능하고 영민하다 알려졌으나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던 그는 계유정난 이 후, 더욱 건강이 나빠져 병상에 눕는 일이 잦았다. [공주의 남자]에서는 의경세자가 아팠다는 사실을 세조가 뒤늦게 알게 되는 것으로 그렸는데, 사실 세조 부부는 맏아들인 의경세자의 건강 때문에 애초부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다 단종폐위사건을 전후해 극심한 죄책감과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한 의경세자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얼마 되지 않아 숨을 거두게 된다. 의경세자는 꿈 속에서 자주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 권씨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에게 의경세자의 혼을 현덕왕후의 귀신이 데리고 갔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이 소문에 격분한 세조는 현덕왕후를 폐위시키고 그녀의 무덤을 파헤치는 패륜을 저질렀는데, 이는 시동생이 형수의 무덤을 파헤친 것으로 강상과 윤리를 치도의 근본으로 삼는 조선의 예법상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를 사료해볼 때 당시 세조가 의경세자의 죽음에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헤아려 볼 수 있다. 의경세자의 부인은 그 유명한 인수대비(소혜왕후) 한씨이며, 그의 둘째 아들은 성종이다. 그는 훗날 덕종임금으로 추존된다.


세조의 둘째 아들은 예종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의경세자와 마찬가지로 잩은 병치레로 세조 부부의 애간장을 태웠던 그는 재위 1년만에 19살의 나이로 갑자기 승하했다. 모후인 정희왕후 윤씨조차 "주상의 병이 이토록 심각한지 몰랐다"고 경악할 정도로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허나 그가 재위 시절 내내 발바닥과 엉덩이에 난 종기로 크게 고생했고, 마땅한 치료법이 없어 밤잠을 설치는 일이 많았던 것으로 볼 때 예종의 승하는 어느 정도 예견되어 있었던 일이 아닌가 싶다.


예종이 너무 이른 나이에 흉서하자 많은 백성들은 또 다시 "세조의 업보를 자식들이 대신 받는다"며 두려워했다. 당시 백성들의 인식과 달리 최근 몇몇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예종을 둘러싼 정치역학관계를 두고 예종 독살설 또한 주목을 받고 있다. 예종의 형수이자 의경세자의 부인이었던 수빈(훗날의 인수대비)한씨는 사돈이었던 한명회, 대훈신 신숙주와 결탁해 자신의 둘째아들인 자을산군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종의 죽음은 필수적이었다. 결국 수빈은 훈구파를 움직여 예종을 정치적으로 압박하는 한편, 시어머니 정희왕후를 제 편으로 포섭해 든든한 왕실세력의 뒷받침을 얻어냈다. 끊임없는 정치 공격과 남이-귀성군으로 대표되는 신진세력의 몰락 등으로 큰 충격을 받은 예종은 가뜩이나 좋지 않았던 건강이 더 악화되었고 곧 숨을 거뒀다.


이를 두고 김인호 교수는 "결국 예종의 세력은 훈구세력을 등에 업은 인수대비의 세력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리하여 예종은 '암살'이라는 여운을 남기며 요절하였고, 자신의 아들이 아닌 인수대비의 둘째아들 성종에게 왕위를 넘길 수 밖에 없었다" 고 평가했다. 어찌되었든 예종 역시 열 아홉이라는 짧디짧은 생애를 마치고 간 비운의 임금인 셈이다.


세조의 두 아들과 달리 유일한 딸이었던 의숙공주는 비교적 오래 살았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일 뿐, 의숙공주가 숨을 거둘 당시 그녀의 나이는 고작 33살이었다. 정인지의 아들인 정현조의 부인으로 들어갔던 의숙공주는 결혼 이 후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되어 오랜 시간동안 병치레를 하다 숨을 거두었다. 게다가 그녀는 여자로서 단 한명의 아이도 생산하지 못한 석녀였다. 여성으로선 불행하기 짝이 없는 운명이었다.


후궁인 근빈 박씨에게서 얻은 두 아들 역시 요절한 것은 마찬가지다. 형인 덕원군의 생몰년은 미상이나, 둘째인 창원군은 28살 한창 나이에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로써 세조의 아들들은 30살이 되기 이전 모두 세상을 떠난 셈이 됐고, 특히 정비인 정희왕후 윤씨에게 얻은 두 아들은 모두 20살을 넘기지 못하고 요절했다. 단종을 죽인 업보요, 현덕왕후의 복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이른 죽음이었다.


신기한 것은 세조와 함께 계유정난-단종폐위를 주도했던 1등공신 한명회의 자식들 역시 대부분 빨리 요절했단 사실이다. 한명회는 셋째 딸과 넷째 딸을 각각 예종과 성종에게 시집 보내 두번이나 자신의 집안에서 왕비를 탄생시켰지만 그녀들은 모두 채 스물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운명이었다. 예종비 장순왕후는 17세의 나이에 산후병에 걸려 승하했고, 그가 낳은 해양대군도 14개월 만에 운명을 달리했다. 성종비 공혜왕후 역시 19세의 나이로 후사 없이 승하했으니 한명회로선 통탄할만한 노릇이었다. 그야말로 '천벌'이라 할 만했다.


신숙주 역시 생전에 자식을 잃는 슬픔을 겪었다. [공주의 남자]에서 세령-승유와 삼각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신면이 바로 그다. 신면은 세조조의 대표적인 반란이었던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다 반란 세력에게 무참히 살해당했다. 당시 신숙주는 이시애가 퍼뜨린 헛소문 때문에 반란세력으로 지목당해 옥살이를 하던 중이었다. 말 그대로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자식을 잃은 것이다.


이처럼 세조와 측근들의 자식들은 정말 부모의 '업보'를 떠맡은 냥 너무 빨리, 너무 비참하게 세상을 떠났다. 세조가 말년에 정신병에 걸리고 건강이 악화되는 등 고생을 한 것도 자식들의 요절에 의한 상처가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김종서, 안평대군, 금성대군 등 희대의 권신과 왕족들을 모두 죽이고 피로써 차지한 왕위였지만 세조 역시 인간적인 죄책감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었던 셈이다.


세조와 그 자식들은 정말 [공주의 남자] 속 세령의 말처럼 "세조의 업보를 지고" 저승으로 끌려간 것일까. 문득 하늘의 지엄함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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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공주의 남자 2011.09.23 15: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피로 흥한자 피로 망하리라(제 생각입니다)

  2. 1234 2011.10.05 08: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단종은 덕종이 죽은 후에 죽었는데.




[공주의 남자]가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단종시대의 최고 비극인 '계유정난'이 마무리 되며 거목 김종서가 역사의 한 페이지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특히 17일 방송에선 김종서가 생존해 있단 걸 안 수양대군이 그를 다시 한 번 제거하는 내용이 방송됐다.


그렇다면 실제 역사 속에서도 철퇴를 맞은 김종서는 살아 있었을까? 수양대군은 정녕 김종서를 두 번 죽였을까? 수양대군을 경악케 한 김종서의 생존은 진짜 있었던 일이었을까?


계유정난이 일어나던 밤, 상황은 예상보다 훨씬 급박하게 돌아갔다. 김종서의 집에 불시에 찾아간 수양대군은 김종서가 잠시 방심하던 틈을 타 철퇴로 그의 머리를 내리쳤다. '백두산 대호'라 불리던 김종서는 그 자리에 쓰러졌고, 수양대군은 다시 한 번 철퇴로 김종서를 내리쳤다. 그러나 이번에는 김종서 대신 그의 맏아들인 김승규가 맞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김종서 부자가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진 것을 확인한 수양대군과 그 일파는 서둘러 궁궐로 향했다. 궁궐로 향한 수양대군은 일거에 권력을 장악했다. 수양대군으로부터 김종서의 죽음을 전해들은 한명회 역시 분주하게 움직엿다. 그는 김종서 일파를 궁궐로 불러들여 살생부에 따라 차례로 살해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있었던 영의정 황보인이 제거됐고 민신, 조극관 등 단종에게 충성을 맹세한 인물들 또한 모두 목이 날아갔다. 말 그대로 하룻밤 새에 세상이 뒤집어 진 것이다.


수양대군 일파는 승리감에 도취됐다. '금상 위에 좌상'이라 불리던 김종서 가문을 하루 아침에 멸족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단종을 떠받들던 신료집단을 한번에 쓸어낸 것에 대한 만족감이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수양대군을 경악하게 하는 일이 벌어진다. 바로 김종서의 시신이 없어진 것이다. 김종서의 시신을 수습하러 갔다가 그의 시신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홍윤성은 기함할 수 밖에 없었다.


홍윤성은 수양대군 일파의 컨트롤 타워인 한명회에게 김종서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소식을 전했고, 한명회는 직감적으로 김종서가 생존해 있음을 깨달았다. 용의주도하고 냉철한 판단력으로 계유정난의 모든 것을 진두지휘했던 한명회였으나 이 때만큼은 다소 당황했는지 수양대군과 수양대군의 보디가드격인 임운, 양정에게 "김종서가 죽은 것을 확인하셨소이까?" 라고 몇 번이나 캐물었다 한다.


한명회의 직감처럼 김종서는 철퇴를 맞고 쓰러진 뒤에도 숨이 붙어 있었다. 4군 6진을 개척하며 '백두산 호랑이'라 불리던 천하장사 김종서였다. 철퇴 한 번으로 제거하기엔 너무나 강한 상대였던 셈이다. 김종서는 급한대로 철퇴를 맞은 부분에 응급처치를 하고 서둘러 입궐하고자 했다. 수양대군이 궁궐을 장악하기 전에 먼저 단종의 신변을 보호해야만 수양대군의 쿠데타를 막을 수 있단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김종서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도성의 8대문은 모두 수양대군에게 장악됐고, 김종서가 입궐할 수 있는 방법은 모두 차단되었다. 김종서를 태운 가마가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돈의문이었다. "환자가 있으니 문을 열어주시오" 라며 간청하는 김종서의 하인에게 돈의문 수문 갑사는 "수양대군의 명이 있을 때까진 누구도 들어올 수 없다"는 차가운 답변만을 내놓았다.


돈의문이 차단되었음을 확인한 김종서는 급히 가마를 돌려 서소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환자가 있으니 문을 열어달라는 김종서의 하인에게 "수양대군의 명이 없이는 성문을 열지 못한다" 는 답변만이 되풀이 되었다. 이 때, 김종서는 노기를 참지 못하고 "내가 일국의 좌상 김종서니라! 당장 문을 열거라!" 라고 일갈했다. 허나 문은 굳게 잠겨 열리지 않았다.


일이 틀어진 것을 직감한 김종서는 아들 김승벽의 처가에 몸을 숨겼다. 환부를 치료한 뒤 차후의 일을 도모할 생각이었다. 허나 김종서를 가만히 둘 한명회가 아니었다. 김종서의 생존을 확인한 한명회는 도성 전반을 샅샅이 뒤져 김종서의 은신처를 확보했고 양정, 이흥적, 이흥상으로 이뤄진 자객단을 보내 김종서의 주살을 명령했다. 김종서로선 수양대군 일파에 의해 '두 번' 죽게 된 셈이었다.


결국 김종서는 끝끝내 단종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수양대군 일파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됐다. 세종에게 "육진의 개척은 내가 있어도 종서가 없으면 되지 않았을 일이며, 종서가 있어도 내가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야" 라며 총애받았던 인물, 명재상 황희에게 "내 뒤를 이을 인물은 단 하나, 종서 뿐이다" 라고 극찬받았던 인물, 두만강변을 평정하고 육진을 개척하며 고려사를 개수했던, 문무에 모두 능통했던 충신 중의 충신 김종서는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절재 김종서.


그의 생애는 장중하면서도 화려했다. 충절, 거목, 원훈 등의 찬사를 받기에도 모자람이 없는 인품이었다. 그는 고려 왕조가 망하기 2년 전인 공양왕 2년 도총 김제추의 아들로 태어나, 조선조 태종 5년 약관 16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고 관직에 등용된 엘리트였다. 그는 말 그대로 문무를 겸비한 준재였고, 태종-세종-문종-단종 네 임금을 지척에서 모신 명재상이었다.


임금의 비서격인 대언을 비롯하여 내직은 언제나 문반이었고, 함길도 도절제사와 같은 외직으로 나가면 무반으로서의 책무를 완벽히 수행하여 후진들로부터 끊임없는 존경을 받았다. 단종조에 이르러 권력의 정점에 섬으로써 국정을 전횡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으나 그의 강직한 성품으로 미루어 볼 때 이는 흔들림 없이 국사를 운영하려던 그의 태도를 오해한 것으로 사료된다.


64세. 백두산 대호 김종서는 그렇게 아들 김승규, 김승벽과 함께 일찍이 그 자신이 노래했던 "삭풍은 나무 끝에서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 와 흡사한 늦가을 찬바람 속에서 멸문의 화를 입었다. 그의 부재는 곧 단종시대의 종말을 예고했고, 이로써 조선 왕조는 급격히 난세로 빠져들게 되었다.


임금도 장상도 한번은 죽어야 한다. 생애가 아무리 아름답고 화려했다고 할지라도 그 죽음까지 아름답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죽음은 오로지 비통할 뿐이다. 그러기에 절재 김종서의 죽음이 더더욱 한없는 아쉬움을 남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공주의 남자]는 김종서의 퇴장과 함께 '제 2라운드'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승유와 세령의 사랑은 더욱 비극으로 치달을 것이고, 수양대군 일파의 왕위 찬탈 음모도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과연 [공주의 남자]는 이 역사적 비극을 어떤 식으로 담아낼 것인가. [공주의 남자]의 내용이 자못 궁금해지는 이유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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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7788dud 2011.08.18 07: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재밌는 드라마 하나 건졌네요. 이렇게 알아 듣기 쉽게 글을 써 주시니 감사합니다 '공주의 남자' 정말 궁굼합니다 기다려지네요.

  2. 2011.08.18 08: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종서에 대한 평이 너무 치우쳐져 있네요
    조선왕조실록을 직접 읽어보셔야 할 듯

  3. 와우 2011.09.02 00: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궁금했었는데, 좋은 자료 올려 주셔서 감사해요! 김종서의 최후는 정말 비극적이고 슬프네요 ㅠㅠㅠ

  4. 으갸갸 2012.01.02 18: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흠~~~
    역사란 진짜 누구의 입장에서 쓰느냐에 따라 해석이 많이 달라질수 있을듯 하네....
    한 나라의 왕은 가장 큰 힘과 이엄을 갖 춰야 국가가 안정될듯함.
    문종이 가장 큰 잘못, 어리석은 짓을 한것 같다...자기 어린 불쌍한 자식을 위해서라도 욕심을
    버리고 동생에게 정당하게 임금자리를 내주었으면, 조선왕조의 많은 피비린내나는 역사를
    접할 필요가 없었을텐데....
    한 나라의 권력을 잡는것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생존권의 문제이니....늬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을수밖에 없는 운명들....이런때는 그저 아주 평범한 가늘고 긴 삶을 살수있는 우리
    민초가 훨씬 낳은것도 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