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의 남자]가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단종시대의 최고 비극인 '계유정난'이 마무리 되며 거목 김종서가 역사의 한 페이지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특히 17일 방송에선 김종서가 생존해 있단 걸 안 수양대군이 그를 다시 한 번 제거하는 내용이 방송됐다.


그렇다면 실제 역사 속에서도 철퇴를 맞은 김종서는 살아 있었을까? 수양대군은 정녕 김종서를 두 번 죽였을까? 수양대군을 경악케 한 김종서의 생존은 진짜 있었던 일이었을까?


계유정난이 일어나던 밤, 상황은 예상보다 훨씬 급박하게 돌아갔다. 김종서의 집에 불시에 찾아간 수양대군은 김종서가 잠시 방심하던 틈을 타 철퇴로 그의 머리를 내리쳤다. '백두산 대호'라 불리던 김종서는 그 자리에 쓰러졌고, 수양대군은 다시 한 번 철퇴로 김종서를 내리쳤다. 그러나 이번에는 김종서 대신 그의 맏아들인 김승규가 맞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김종서 부자가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진 것을 확인한 수양대군과 그 일파는 서둘러 궁궐로 향했다. 궁궐로 향한 수양대군은 일거에 권력을 장악했다. 수양대군으로부터 김종서의 죽음을 전해들은 한명회 역시 분주하게 움직엿다. 그는 김종서 일파를 궁궐로 불러들여 살생부에 따라 차례로 살해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있었던 영의정 황보인이 제거됐고 민신, 조극관 등 단종에게 충성을 맹세한 인물들 또한 모두 목이 날아갔다. 말 그대로 하룻밤 새에 세상이 뒤집어 진 것이다.


수양대군 일파는 승리감에 도취됐다. '금상 위에 좌상'이라 불리던 김종서 가문을 하루 아침에 멸족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단종을 떠받들던 신료집단을 한번에 쓸어낸 것에 대한 만족감이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수양대군을 경악하게 하는 일이 벌어진다. 바로 김종서의 시신이 없어진 것이다. 김종서의 시신을 수습하러 갔다가 그의 시신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홍윤성은 기함할 수 밖에 없었다.


홍윤성은 수양대군 일파의 컨트롤 타워인 한명회에게 김종서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소식을 전했고, 한명회는 직감적으로 김종서가 생존해 있음을 깨달았다. 용의주도하고 냉철한 판단력으로 계유정난의 모든 것을 진두지휘했던 한명회였으나 이 때만큼은 다소 당황했는지 수양대군과 수양대군의 보디가드격인 임운, 양정에게 "김종서가 죽은 것을 확인하셨소이까?" 라고 몇 번이나 캐물었다 한다.


한명회의 직감처럼 김종서는 철퇴를 맞고 쓰러진 뒤에도 숨이 붙어 있었다. 4군 6진을 개척하며 '백두산 호랑이'라 불리던 천하장사 김종서였다. 철퇴 한 번으로 제거하기엔 너무나 강한 상대였던 셈이다. 김종서는 급한대로 철퇴를 맞은 부분에 응급처치를 하고 서둘러 입궐하고자 했다. 수양대군이 궁궐을 장악하기 전에 먼저 단종의 신변을 보호해야만 수양대군의 쿠데타를 막을 수 있단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김종서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도성의 8대문은 모두 수양대군에게 장악됐고, 김종서가 입궐할 수 있는 방법은 모두 차단되었다. 김종서를 태운 가마가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돈의문이었다. "환자가 있으니 문을 열어주시오" 라며 간청하는 김종서의 하인에게 돈의문 수문 갑사는 "수양대군의 명이 있을 때까진 누구도 들어올 수 없다"는 차가운 답변만을 내놓았다.


돈의문이 차단되었음을 확인한 김종서는 급히 가마를 돌려 서소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환자가 있으니 문을 열어달라는 김종서의 하인에게 "수양대군의 명이 없이는 성문을 열지 못한다" 는 답변만이 되풀이 되었다. 이 때, 김종서는 노기를 참지 못하고 "내가 일국의 좌상 김종서니라! 당장 문을 열거라!" 라고 일갈했다. 허나 문은 굳게 잠겨 열리지 않았다.


일이 틀어진 것을 직감한 김종서는 아들 김승벽의 처가에 몸을 숨겼다. 환부를 치료한 뒤 차후의 일을 도모할 생각이었다. 허나 김종서를 가만히 둘 한명회가 아니었다. 김종서의 생존을 확인한 한명회는 도성 전반을 샅샅이 뒤져 김종서의 은신처를 확보했고 양정, 이흥적, 이흥상으로 이뤄진 자객단을 보내 김종서의 주살을 명령했다. 김종서로선 수양대군 일파에 의해 '두 번' 죽게 된 셈이었다.


결국 김종서는 끝끝내 단종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수양대군 일파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됐다. 세종에게 "육진의 개척은 내가 있어도 종서가 없으면 되지 않았을 일이며, 종서가 있어도 내가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야" 라며 총애받았던 인물, 명재상 황희에게 "내 뒤를 이을 인물은 단 하나, 종서 뿐이다" 라고 극찬받았던 인물, 두만강변을 평정하고 육진을 개척하며 고려사를 개수했던, 문무에 모두 능통했던 충신 중의 충신 김종서는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절재 김종서.


그의 생애는 장중하면서도 화려했다. 충절, 거목, 원훈 등의 찬사를 받기에도 모자람이 없는 인품이었다. 그는 고려 왕조가 망하기 2년 전인 공양왕 2년 도총 김제추의 아들로 태어나, 조선조 태종 5년 약관 16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고 관직에 등용된 엘리트였다. 그는 말 그대로 문무를 겸비한 준재였고, 태종-세종-문종-단종 네 임금을 지척에서 모신 명재상이었다.


임금의 비서격인 대언을 비롯하여 내직은 언제나 문반이었고, 함길도 도절제사와 같은 외직으로 나가면 무반으로서의 책무를 완벽히 수행하여 후진들로부터 끊임없는 존경을 받았다. 단종조에 이르러 권력의 정점에 섬으로써 국정을 전횡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으나 그의 강직한 성품으로 미루어 볼 때 이는 흔들림 없이 국사를 운영하려던 그의 태도를 오해한 것으로 사료된다.


64세. 백두산 대호 김종서는 그렇게 아들 김승규, 김승벽과 함께 일찍이 그 자신이 노래했던 "삭풍은 나무 끝에서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 와 흡사한 늦가을 찬바람 속에서 멸문의 화를 입었다. 그의 부재는 곧 단종시대의 종말을 예고했고, 이로써 조선 왕조는 급격히 난세로 빠져들게 되었다.


임금도 장상도 한번은 죽어야 한다. 생애가 아무리 아름답고 화려했다고 할지라도 그 죽음까지 아름답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죽음은 오로지 비통할 뿐이다. 그러기에 절재 김종서의 죽음이 더더욱 한없는 아쉬움을 남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공주의 남자]는 김종서의 퇴장과 함께 '제 2라운드'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승유와 세령의 사랑은 더욱 비극으로 치달을 것이고, 수양대군 일파의 왕위 찬탈 음모도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과연 [공주의 남자]는 이 역사적 비극을 어떤 식으로 담아낼 것인가. [공주의 남자]의 내용이 자못 궁금해지는 이유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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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7788dud 2011.08.18 07: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재밌는 드라마 하나 건졌네요. 이렇게 알아 듣기 쉽게 글을 써 주시니 감사합니다 '공주의 남자' 정말 궁굼합니다 기다려지네요.

  2. 2011.08.18 08: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종서에 대한 평이 너무 치우쳐져 있네요
    조선왕조실록을 직접 읽어보셔야 할 듯

  3. 와우 2011.09.02 00: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궁금했었는데, 좋은 자료 올려 주셔서 감사해요! 김종서의 최후는 정말 비극적이고 슬프네요 ㅠㅠㅠ

  4. 으갸갸 2012.01.02 18: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흠~~~
    역사란 진짜 누구의 입장에서 쓰느냐에 따라 해석이 많이 달라질수 있을듯 하네....
    한 나라의 왕은 가장 큰 힘과 이엄을 갖 춰야 국가가 안정될듯함.
    문종이 가장 큰 잘못, 어리석은 짓을 한것 같다...자기 어린 불쌍한 자식을 위해서라도 욕심을
    버리고 동생에게 정당하게 임금자리를 내주었으면, 조선왕조의 많은 피비린내나는 역사를
    접할 필요가 없었을텐데....
    한 나라의 권력을 잡는것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생존권의 문제이니....늬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을수밖에 없는 운명들....이런때는 그저 아주 평범한 가늘고 긴 삶을 살수있는 우리
    민초가 훨씬 낳은것도 같음.




고현정의 컴백작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선덕여왕] 이 처음부터 대박조짐을 보이고 있다.


특히 1회에서 보여준 진흥왕의 죽음과 여걸 미실의 등장 등은 많은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는 상황.


1회에서 미실은 진흥왕을 독살하기 직전까지의 상황에 내몰리며 "내 손으로 당신을 죽이지 않게 한 것에 감사하다." 라고 읊조린다.


그렇다면 과연 이 나라 역사에서 미실과 같이 '임금' 을 독살하고자 했던 여성이 있었을까. 믿기 어렵겠지만 임금을 독살하고자 하는 시도는 삼국시대, 고려왕조 뿐 아니라 조선왕조에서도 비일비재했다. 특히 여성성이 억압되어 있던 조선왕조에서 권력을 차지하고자 몸부림쳤던 여걸들의 임금 독살은 대단히 주도 면밀하게 이루어졌다.


이쯤에서 궁금해진다. 역사 속 임금을 '죽이고자' 했던 역사 속 여인들의 모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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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비가 되기 위해 시동생의 죽음을 기도한 여인, 소혜왕후 한씨



순종적인 며느리, 엄격한 어머니, 잔인한 할머니라는 세 가지 운명을 타고 난 소혜왕후 한씨는 성종조 '윤비 폐출 사건' 으로 연산군의 비극을 만들어 낸 격랑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여성이다. 우리에게는 '인수대비' 라는 이름으로 더욱 친숙한 그녀는 젊은 나이에 중전의 자리를 목전에 두고 세자였던 남편의 죽음 때문에 궐 밖으로 쫒겨 나와야만 했던 비운의 삶을 산 여인이기도 하다.


사실상 원론적으로 따지자면 남편을 잃은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궐 안으로 돌아올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둘째 아들을 임금의 자리에 올리고, 스스로 대비의 자리를 쟁취함으로써 궐 밖으로 나간지 불과 10여년 만에 화려하게 정치적 일선에 복귀했다. 그리고 그 험난한 '정치적 복귀' 의 뒷면에는 시동생 예종의 죽음을 싸늘하게 지켜봐야만 했던, 냉정하고 섬뜩한 정치적 함수관계가 숨겨져 있었다.


세조의 죽음 뒤, 당시 수빈이었던 인수대비는 자력으로 자신이 정치 일선에 복귀하는 것은 '불가' 하다고 생각했다. "중전은 못 되어도 대비는 되고자 했던" 그녀에게 남아있는 것은 바로 병약한 시동생 예종의 요절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허약했던 예종을 오랜 시간 지켜 본 그녀는 예종의 장수를 빌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죽음을 기도하고 재촉했다. 예종의 죽음이 곧 자신의 '부활' 임을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수빈(인수대비)는 사돈이었던 한명회, 대훈신 신숙주와 결탁해 예종을 정치적으로 압박했다. 그 결과 '세조 능묘 파문' (세조의 능묘를 석실로 하자는 수빈의 의견이 받아들여진 사건)이 일어났고 이것이 수빈에게는 결정적으로 정치적 일선에 복귀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수빈의 부활은 곧 예종의 추락이었다. 예종의 왕권은 궐 밖에 나가있는 형수에게조차 무시당하는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추락했고, 이런 정치적 타격은 그의 건강을 더욱 악화시켰다.


결국 건강이 갈수록 악화일로로 치달았던 예종은 크고 작은 정치적 상처들 속에 큰 소리 한 번 내보지도 못하고 재위 1년만에 죽음을 맞이했다. 예종의 모후였던 정희왕후조차 "주상의 병이 이토록 심했는지 감히 짐작조차 못했다." 고 할 정도로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김인호 교수는 예종의 죽음에 대해 "결국 예종의 세력은 훈구 세력을 등에 업은 수빈(인수대비)의 세력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리하여 예종은 '암살' 이라는 여운을 남기며 요절하였고, 자신의 아들이 아닌 수빈의 둘째 아들에게 왕위를 넘길 수 밖에는 없었다." 고 평가했다.


어쨌든 예종의 죽음은 수빈의 부활이었고, 곧 '궁궐의 제왕' 인수대비의 등장을 알리는 서막에 불과했다. 훈구세력을 등에 업고 시동생 예종의 죽음을 재촉했으며, 암살이라는 여운까지 남기며 자신의 둘째 아들을 왕위에 올렸던 그녀의 정치적 결단은 이렇게 시어머니 정희왕후의 권력욕과 사돈 한명회의 정치적 야심과 결탁하여 최선의 선택으로 자리했다.


'충효' 가 강요되던 조선 왕조에서 시동생이자 한 나라의 임금인 예종의 죽음을 바라보며 어쩌면 인수대비는 그 누구보다도 기뻐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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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비정한 계모, 문정왕후 윤씨



조선 왕조 두번째로 수렴청정을 하면서 그 어떤 왕실 여인들보다 막강한 위세를 누렸던 문정왕후 윤씨의 그 대단한 '권력' 의 이면에는 아들을 죽이고 권력을 쟁취해야만 했던 어머니의 무서운 야욕이 숨겨져 있다. 물론 문정왕후에게 죽임을 당한 인종은 문정왕후의 '친아들' 은 아니었지만 법적 관계로만 따지자면 인종과 문정왕후 만큼 가까운 사이도 없었기에 문정왕후에 의한 '인종 독살' 은 더더욱 충격적인 사건으로 받아 들여진다.



중종의 죽음과 함께 인종이 즉위하고, 인종을 위시한 '대윤' 이 정치판을 장악하자 대비였던 문정왕후는 인종을 죽이는 것을 통해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대윤 세력을 일거에 제거했다. 인종이 세자에 있을 때부터 동궁전에 불을 지르는 등 예종 암살에 열을 올렸던 문정왕후는 끝끝내 윤리와 강상이 치도의 근본이었던 조선 왕실의 한 복판에서 임금에게 독이 든 떡을 먹이는 것으로 자신의 위치를 보장 받을 수 있었다.



'인종 독살' 은 아직까지 확인된 바 없는 '설' 정도로만 전해지고 있지만 정황 상 문정왕후가 인종을 독살할 이유는 충분하다고 보여진다. 인종의 죽음은 그녀에게 궐 안에서 대적할 수 없는 왕실 최고의 어른임을 확인시켜 주는 동시에 수렴청정이라는 막강한 권력까지 안겨다 줄 수 있는 최고의 시나리오였다. 그리고 결국 문정왕후는 무시무시한 독살 계획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스스로 거행함으로써 일종의 정치적 쿠데타를 내부적으로 확실하게 매듭지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여걸의 자질이라 할 만 했다.



그러나 그 담대한 자질이 조선 왕조를 위한 대승적 결단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과 친아들의 지위 보장을 향한 '그릇된 모정' 에서 시작 되었다는 것은 대단히 아쉬운 일이다. 천수를 누린 문정왕후의 죽음 뒤에 훗날 사관들은



"문정왕후는 천성이 엄의嚴毅(엄격하여 굳세고 사나움)하여 비록 상(명종)을 대하는 때라도 말과 얼굴을 부드럽게 하지 않았고 수렴청정한 이래로 무릇 설시設施(임금이 정사를 돌보는것)하는것도 모두 상이 마음대로 하지 못하였다. 불교에 마음이 고혹되고 환관을 신임하여 나라의 재정을 다 기울게 했고, 승도僧徒(스님들)들을 봉양하고 남의 전지와 노복을 빼앗아..... 게다가 권세가 외척으로 돌아가 정사가 사문私門 에서 나오고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지며 기강이 문난해지고 국세가 무너져서 장차 구언하지 못하게 되었다."



라고 혹평했으니 비정하고도 치열했던 권력에의 집착은 결국 이러한 비극만을 나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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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목대비가 지목한 '선조 독살' 의 주범, 김개시.



조선 왕조에서 임금의 '수라' 는 언제나 독살의 위험이 천만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많은 임금은 독살을 방지하기 위해 여러가지 대비를 하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살설에 대한 의문은 풀리지 않고 계속 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선조의 독살이다. 변덕 많고 의심 많았던 아버지 선조에게 끊임없이 시달림을 받았던 아들 광해군이 서둘러 왕위에 즉위하기 위해서 아버지를 독살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독살설의 한 가운데에는 선조와 광해의 총애를 동시에 받았던 상궁 김개시(김개똥) 이 존재한다.



조선 후기의 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에서는 "김개시가 어여쁜 외모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광해의 총애를 독차지 했던 것은 선조의 독살이라는 광해 최대의 약점을 움켜 쥐고 있었기 때문" 이라고 했는데, 그만큼 선조의 죽음에는 선조와 김개시, 그리고 광해군의 정치적 함수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던 셈이다. 훗날 광해군에게 폐모 되었다가 복권 되었던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는 광해군과 김개시를 싸잡아서 "부살(父殺)한 것이 과연 광해와 개똥이로다!" 라며 선조 독살을 강력하게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 편에서는 선조의 죽음을 지척에서 바라보았던 인목대비의 이러한 주장은 자신의 아들을 죽인 광해군에 대한 앙갚음의 차원에서 나온 '날조된 사실' 로 치부하기도 한다. 아무리 반정으로 쫒겨 난 왕일지라도 함부로 죽일 수 없었던 조선 왕조의 법도 상 인목대비가 광해를 사지로 몰아 넣기 위해서는 '선조 독살' 이라는 누명을 씌우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인목대비의 정치적 입장은 광해군을 궁지에 몰아넣기에 충분한 사안이었고, 김개시 역시 죽음으로 이끌고 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어쩌면 '선조 독살' 의 가장 큰 수혜자는 광해군과 김개시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한을 풀고자 했던 인목대비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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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빈의 아들을 '제거' 하라, 인원왕후 김씨.



조선 왕조의 500년 역사 중 가장 '치열한' 당쟁을 벌였던 숙종 조에 춘몽처럼 지나갔던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삶과 죽음은 그대로 훗날의 아픔이 됐다. 사약을 받고 쓰러지는 어머니 장희빈의 죽음을 눈 앞에서 똑똑하게 지켜봐야 했던 경종과 그런 경종에게서 '연산군' 의 악몽을 뒤늦게 발견한 노론 세력은 이미 화해할래야 화해할 수 없는 정치적 라이벌로 추락했다. 경종은 노론 세력의 강공을 끊임없이 방어해야 했고, 노론은 숙빈 최씨의 소생 연잉군을 내세워 경종을 압박하는 지루한 싸움을 계속할 수 밖에 없었다.



경종에게 불행했던 것은 자신의 법적인 '어머니' 인원왕후 김씨가 자신의 편이 아니라 훗날 영조가 되는 연잉군의 편이었다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소론 당파였으나 지아비 숙종을 따라 노론 당파로 자리를 옮긴 뒤 열렬한 '노론주의자' 로 변신했던 인원왕후 김씨는 연잉군과 노론 세력이 궁지에 몰릴 때마다 경종을 압박해 정치적 활로를 뚫어주는 '왕실의 호랑이' 였다. 장희빈이라는 굴레 속에서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었던 경종에게 인원왕후의 차가운 냉대는 감당할 수 없는 정치적 시련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종은 재위 2년이 지나면서 눈에 띄게 왕권을 회복해 가고 있었다. 노론 세력을 침몰시키고 소론을 등용했으며 조정에도 활기를 불어 넣고자 했다. 경종의 이러한 움직임은 연잉군에게나, 노론에게나, 인원왕후에게나 반가운 것이 아니었다. 결국 그들은 '독살' 이라는 최후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원래 몸이 안 좋았던 경종이 환후로 고생하던 때에 연잉군은 평소 경종이 좋아했던 '게장' 을 수라로 올려 기어코 먹게 한다. 경종은 게장을 먹으며 "역시 연잉군이야 말로 내 진정한 형제로다!" 라며 칭찬했다지만 문제는 게장이 그의 환후와는 상극인 '치명적 음식' 이었다는 것이었다.



당시 소론 세력은 연잉군의 '왕권 찬탈' 을 우려하여 연잉군의 대전 출입을 엄격히 감시할 때였지만 왕실의 큰어른이었던 인원왕후는 이러한 소론 세력의 견제 속에서도 연잉군이 올린 문제의 '게장' 을 무사히 경종 앞에 대령할 수 있도록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인원왕후가 게장과 경종의 환후가 상극의 성격을 띠고 있는지 눈치채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녀 역시 경종의 독살에 일조한 주범 중 한명인 것은 분명한 일이다. 각본, 연출이 인원왕후였다면 주연은 연잉군이었다.



결국 경종은 4년여의 재위 기간을 끝으로 연잉군과 어머니 인원왕후에게 '불의의 타격' 하나를 얻어 맞고 그대로 하늘로 떠나고 말았다. 경종의 죽음을 끝으로 연잉군은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왕좌를 얻게 됐고, 인원왕후는 자신이 지지한 당파를 보호할 수 있게 됐다. '조선의 르네상스' 라고 불리며 일대 부흥기를 열었던 조선의 영-정조 시대는 사실 법적인 아들을 버려야만 했던 어머니의 비정함을 거름으로 자라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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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을 위해 남편을 버리다, 혜경궁 홍씨.



영조 20년 1월 9일. 열살의 '세자빈' 을 앞에 두고 장차 임금의 장인이 되는 홍봉한이 입을 열었다. "궁중에 들어가면 3전 섬김을 삼가고 조심해 효성으로 힘쓰고 동궁 섬김을 반드시 옳을 일로 돕고, 말씀을 더욱 삼가해 집과 나라에 복을 닦으소서." 어린 세자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집과 나라에 복을 닦으라." 라는 아버지의 당부를 가슴 깊이 새기고 어린 세자빈은 구중궁궐 속으로 들어갔다. 바로 이 사람이 영조와 정조, 순조의 시대를 관통한 여인, 혜경궁 홍씨였다.


이렇게 '집의 복을 닦으라.' 는 아버지 홍봉한의 말 한마디는 혜경궁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백두의 처지였던 홍봉한이 하루 아침에 세자의 장인이 되고, 숙부인 홍인한이 세도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면서 혜경궁은 자신의 가문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노론 명가로 일어나기 시작한 풍산 홍씨 가문을 위해 혜경궁은 나라와 남편과 자신을 모두 갖다 바쳐야 했다. 그것이 아버지의 성공이자, 숙부의 성공이었고 곧 자신의 성공이기도 했다.


'삼종(효종-현종-숙종)의 혈맥' 을 잇는 단 하나의 혈육, 그리고 장차 왕통을 이어나가야 할 사도세자와 세자빈 홍씨는 겉으로 보기엔 '최고의 결합' 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결합은 조선 최고의 비극을 불러 일으킬 수 밖에 없는 모순된 결합이었다. '소론' 을 지지하는 세자와 '노론' 명가의 세자빈은 섞일래야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 같은 사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남편을 바라보며 혜경궁은 남편을 버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 에서 사도세자와 영조의 사이가 처음부터 좋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사도세자의 정신병이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불편한 몸을 치유하러 나간 온양 행궁에서조차 백성들의 찬사를 받을 정도로 '멀쩡한' 인물이었다. 사도세자가 혜경궁의 말처럼 그저 '미치광이' 에 불과한 정신병자였다면 영조가 10여년 동안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길 생각은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허나 혜경궁은 이상하게도 '일관되게' 사도세자 정신병자설을 고집했다.


혜경궁은 남편의 원대한 꿈을 가장 지척에서 지켜보았다. 사도세자의 꿈은 '노론정권' 을 뒤집어 엎고 새로운 '소론정권' 을 세우는 것이었다. 썩을대로 썩어버린 노론의 뿌리를 뽑아버리고 자신을 지지하는 소론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치 역학구도를 구상하는 사도세자의 꿈은 혜경궁에게 자신과 자신의 가문을 위협하는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결국 그녀는 사도세자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노론의 '스파이' 로 활약하기로 결심했다. 사도세자의 일거수 일투족은 혜경궁의 입을 통해 궐 밖으로 빠져나갔고 노론은 혜경궁의 도움에 힘입어 사도세자 제거라는 무시무시한 음모를 아무렇지도 않게 꾸밀 수 있었다.


사도세자의 가장 큰 비극은 바로 이것이었다. 자신이 가장 믿고 의지해야 할 부인이 자신이 아닌 가문을 택했다는 처참한 상황에 영조의 어린 부인인 정순왕후 김씨가 가세하면서 사도세자의 입지는 더더욱 궁색해졌다. 사도세자는 노론이라는 강적이 밖에서 둘러 싸고 있는 위급한 형국에서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의 아들까지 낳은 부인 혜경궁과 법적인 어머니 정순왕후, 생모인 영빈 이씨 모두 바깥에서 이뤄지는 '사도세자 제거 음모' 에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베겟머리 송사가 송사 중에 으뜸' 이라는 말처럼 그렇게 사도세자는 안에서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바깥과 안에서 함께 이루어지는 공격에 영조와 사도세자는 돌이킬 수 밖에 없는 강을 건넜다. 이것은 혜경궁 역시 마찬가지였다. 운명의 그날, 사도세자는 혜경궁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내 목숨이 그 날 마칠 것도 스스로 염려하여 세손을 경계 부탁하고 왔었는데 동궁(사도세자)께서는 생각과 다르게 나더러 하시는 말씀이 '아무래도 이상하니 자네는 잘 살게 하겠네. 그 뜻들이 무서워." 하시기에 내가 눈물이 드리워 말없이 허황해서 손을 비비고 앉았더니, 이 때 대조(영조)께서 휘령전으로 오셔서 동궁을 부르신다는 전갈이 왔더라.』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혜경궁을 향한 사도세자의 원망어린 발언이다. 지금의 말로 풀자면 "나는 죽는데 이상하게도 너는 살 것 같으니 너의 뜻이 참 무섭다." 는 한탄이었다. 이어서 사도세자는 혜경궁에게 이런 말까지 남긴다. "자네가 참으로 무섭고 흉한 사람일세. 자네는 세손 데리고 오래 살려 하기에 오늘 내가 나가서 죽겠기로 그것을 꺼려 휘향을 내게 안 씌우려는 그 심술을 알겠네."


'나는 죽는데 너는 안 죽으니 이상하다.' '참으로 무섭고 흉하다' '내 아들을 데리고 혼자 오래 사려고 한다' '심술이 가득하다' 는 폭언은 10여년 넘게 자신과 함께 살아 온 부인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서슴없이 혜경궁에게 그런말을 퍼부었다. 운명의 그 날, 사도세자도 혜경궁도 사도세자가 영조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이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편을 제거할 수 밖에 없는 혜경궁과 부인의 가문에 의해 죽임을 당해야만 하는 사도세자, 그들의 만남은 처음부터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는 비극적 결합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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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죽음을 지켰던 단 한명의 여자, 정순왕후 김씨



'경종의 독살' 이라는 혐의와 함께 일어섰던 영조의 업보였을까. 그의 손자였던 정조는 즉위하는 그 순간부터 독살과 암살에 노이로제가 걸릴 정도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임금이었다. 정조 이전에도 여러 임금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의혹에 시달렸지만 정조만큼 생명을 걸고 왕좌를 지킨 임금도 드물었다. 게다가 정조는 그 어떤 임금도 겪지 못했던 '자객의 침입' 까지 받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정조가 더욱 두려워 했던 것은 보이는 '자객' 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독살' 이었다. 갑작스러운 정조의 죽음과 함께 "임금이 독살 당하였다." 는 말이 떠돌고 경상도 인동시 장시경, 장현경 부자가 정조 독살의 배후를 밝히겠다고 반란을 일으켰던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었다. 정조의 죽음 배후에는 거대 당파였던 노론 벽파 세력과 독살을 직접 진두 지휘했던 정순왕후가 존재했다.


놀라운 것은 1800년 정조 24년 6월 28일, 종기로 투병 중이던 정조를 둘러싸고 치료상의 난맥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정조 스스로 의학 지식이 뛰어난 군주였고 궁중 의원들이 즐비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조의 치료는 쉽사리 이뤄지지 못했다. 바로 정조의 최대 정적 중 한명이었던 정순왕후 김씨가 정조의 치료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기 대문이다. 궁중의 한낱 아녀자로서 임금의 치료에까지 간섭하는 것은 불경에 가까운 파격이었으나 노론 대신들은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정순왕후는 정조의 병세가 선조 병술년의 증세와 비슷하니 성향정기산이라는 탕약을 올려야 함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더욱 우스운 것은 정순왕후의 하달을 당시 도제조 이시수가 그대로 따랐다는 것이다. 의학 지식이 없는 아녀자의 말 한마디에 임금의 치료가 우왕좌왕 하는 우스운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여기에 더 나아가 정순왕후는 내시를 데리고 정조의 안색을 살피겠다며 직접 대전에 발을 들여 놓았다.


"내가 직접 받들어 올려드리고 싶으니 경들은 잠시 물러가시오." 라는 명과 함께 방 안에는 정조와 정순왕후, 단 둘이 자리잡았다. 투병 중인 임금과 그 임금을 죽여야만 사는 대비의 운명은 그렇게 결정지어졌다. 잠시 뒤 방안에서는 정순왕후의 곡소리가 들렸고 정조의 임종을 지켜본 것은 정조를 낳은 혜경궁도, 부인인 효의왕후도 아닌 정조의 최대 정적, 정순왕후였다. 이것으로 정조의 시대는 끝이났고 '수렴청정' 의 위세를 누리던 정순왕후의 시대가 열렸다.



조선 왕조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린 사건은 바로 이렇게 '허망하게'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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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 한복판에서 조선의 역사를 움직인 여성들



철저한 '남녀차별' 과 '남존여비' 의 사상으로 가득했던 조선 왕조는 누가 뭐래도 '남성들의 사회' 였다. 그러나 구중궁궐 한 복판에서 역사를 움직이고 창조한 것은 여성의 몫이기도 했다. 그들은 소리 없이 조용하게 한 나라의 군주이자 만인지상인 임금의 죽음을 목도하고, 재촉하고, 움직였다. 자신의 이해 관계에 따라, 정치적 함수 관계에 따라, 권력 투쟁의 일상 속에서 임금의 목숨줄을 가장 쉽게 움켜 쥘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임금 바로 옆에 앉아있는 왕실의 여성들이었던 것이다.



왕실 여성들이 존재하는 이상 조선 왕조는 일정부분 여성들의 치맛폭 속에서 끝끝내 벗어나지 못하는 운명이었다. 그 운명이 결국 조선의 역사를 움직였고, 왕실 여성들을 움직이게 했다. 임금의 죽음을 목도하는 것을 통해 인수대비나 인원왕후처럼 '역사적 성공' 을 거둔 인물도 있는 반면, 문정왕후나 정순왕후처럼 혹평을 받는 인물도 있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의 '정치적 선택' 은 어떻게 평가되어야 하는가?



어쩌면 그녀들의 '선택' 역시 역사가 강요했던 어쩔 수 없는 '선택' 은 아니었을까.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여성도, 남성도 아닌 그저 역사 그 자체일테니까.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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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궁금@정말.ㅜㅅ BlogIcon 어디서 돈받고 해요? 2009.05.27 01: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가 오버하는지 정확히 집어낸건지... 확신은 못하겠다.
    노대통령의 서거 원인은 현정부의 망신주기에 있다는 것이 여론이다.(여기까지 팩트)
    그런데... 은근히 꼬면서..대통령을 죽음으로 몰고간 원인을 다른곳에서 찾아볼려는 꼼수같은 황당한 뉘앙스를 풍기고 잇는 블로그다.

  2. Favicon of http://궁금@정말.ㅜㅅ BlogIcon 그렇게 살고 싶은가? 2009.05.27 01: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얼마받으면.. 이런글도 써주고.. 얼마주면.. 댓글하나 없는데 대문에 표지로 나오죠?

  3. Favicon of http://궁금@정말.ㅜㅅ BlogIcon 연예가섹션님 2009.05.27 01: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히 가십시오.^^
    전 이만 ...

  4. 글쎄요... 2009.05.27 11: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 잘 읽었습니다.
    본문내용에서 보면 정사로 확실하게 인정받은 부분이 아니라
    하나의 가설에 불과한 부분이 많더군요.
    그런 부분을 그냥 역사적 사실인것처럼 인용하는 것은
    너무 앞서가는 것이 아닐지... 실하게 보자면 역사왜곡입니다.
    요사이 사극들처럼...

  5. 혜경궁 2009.05.27 14: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른 사람은 모르겠고 혜경궁은 좀 그렇네요. 남편이 멀쩡했다고 주장하면 그 멀쩡한 남편을 죽인 시아비를 욕보이는 셈이 됩니다. 시아비를 욕 안보이면서 남편을 멀쩡하게 만드려면 남편이 실로 모반을 꾀했다는 걸 인정할 수 밖에 없죠. 그럼 아들이 문제가 됩니다. 모반자의 아들이 왕이 될 수는 없는 거잖아요. 당연 남편이 정신이상이었다고 주장할 수 밖에 없는 거죠.

  6. 음... 2009.05.27 19: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수대비도 비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물인데... 성종 치세가 워낙 태평천하였다고 평을 받아 그런지 약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