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월화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를 보다보면 중인 출신의 장희빈(김태희 분)을 시어머니인 왕대비 김씨(김선경 분)가 모질게 구박하는 장면을 자주 접할 수 있다.

 

 

장희빈의 출신을 조롱하는 것은 물론이고 회임을 하지 못하도록 약까지 먹이는 왕대비의 모습을 보노라면 조선판 시월드가 따로 없을 지경이다. 이쯤에서 궁금해진다.

 

 

과연 장희빈은 드라마에서처럼 시어머니에게 모진 구박을 받았을까.

 

 

여걸 중의 여걸이었던 명성왕후 김씨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서 장희빈의 시어머니로 나오는 왕대비는 조선조 18대 왕인 현종의 정비이자 숙종의 모후인 명성왕후 김씨. 손이 귀한 왕실에서 아들인 숙종을 출산하며 일찍이 정궁으로서 확고한 자리를 구축한 명성왕후는 시아버지 효종에게 귀한 내 며느리라는 찬사를 들을 만큼 영리하고 총명한 여성이었다. 훗날 그는 이 비상한 머리로 자신이 지지하는 서인 세력의 집권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특히 명성왕후는 철두철미하고 과단성 있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내명부의 기강을 호되게 잡는 것은 물론이고 궁인들이 쉽게 임금 곁에 다가가지 못하도록 엄히 다스렸다. 후궁 소생의 아들이 태어나는 것에 대해 본능적인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던 명성왕후는 누구보다 철저히 현종의 주변을 관리, 감독했다. 이 때문에 현종은 조선에 재위했던 수많은 왕들 중 유일하게 후궁이 없는 임금이 됐다.

 

 

현종이 승하하고 아들인 숙종이 보위에 오르자 왕대비가 된 명성왕후는 자주 정사에 간섭해 대소신료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복선군 삼형제가 궁녀와 내통했다고 무고해 그들을 귀양 보낸 사건인 이른바 홍수의 변은 남인 세력을 궁지로 몰기 위해 명성왕후가 각본 연출한 대표적 사건이었다. 이 시기 명성왕후는 자신의 의견을 관철 시키고자 편전에 직접 등장해 보란 듯이 대성통곡하는 정치적 쇼를 벌여 대신들을 기함하게 했다.

 

 

서인 집안에 뿌리를 두고 있었던 명성왕후는 그 스스로 서인의 뒷배를 자처했고, 평생에 걸쳐 자신의 정치력을 총 동원해 서인당의 집권을 도왔다. 명성왕후는 조선의 왕비가 왕실의 일원을 넘어 확실한 정치색을 가질 수 있음을 보여준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남인들을 한 하늘을 함께 이고 살 수 없는 세력으로 간주했으며 이로 인해 남인 세력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다.

 

 

홍수의 변 이 후로, 남인들은 줄곧 명성왕후를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 윤씨에 빗대 조롱했다. 20년간 수렴청정을 단행하며 국정을 전횡한 문정왕후는 두 차례의 사화를 일으켜 조선 사림의 증오의 대상이 된 인물이다. 그와 비교할 만큼 남인 세력에게 명성왕후는 공포와 증오의 대상인 동시에 왕실 세력 중 최우선으로 견제해야 하는 인물이었던 셈이다. 이러한 명성왕후와 남인의 긴장 관계는 명성왕후가 승하하는 그 날까지 끝나지 않고 계속되었다.

 

 

장희빈이 두려워했던 유일한 여성

 

 

시어머니가 이 정도로 강한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면 밑에 있는 며느리가 고생을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다. 명성왕후는 자신이 추천했던 인경왕후와 인현왕후에게는 한없이 자애롭고 관대한 시어머니였지만 대왕대비 장렬왕후 조씨의 비호를 받았던 장희빈에게는 누구보다 모진 시어머니였다. 평생을 무서울 것 없이 살았던 장희빈이 유일하게 두려워했던 인물이 있다면 그는 다름 아닌 시어머니 명성왕후였을 것이다.

 

 

명성왕후가 장희빈을 못 마땅하게 생각한 가장 큰 이유는 장희빈이 남인 세력의 후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희빈의 숙부는 남인세력의 돈줄로 활약했던 장현이었고, 장희빈을 숙종에게 소재시켜 준 사람은 남인 계열의 장렬왕후였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남인이라면 치를 떠는 명성왕후에게 장희빈은 며느리가 아니라 남인의 간자일 뿐이었다. , 무슨 수를 쓰더라도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인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던 셈이다.

 

 

게다가 명성왕후는 당시 한낱 침방나인에 불과했던 장희빈이 숙종의 곁에 머무는 것에 상당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명문가의 여식으로 자라 중전과 대비라는 초 엘리트 코스를 밟았고, 중궁 시절에는 그 흔한 후궁조차 경험하지 않았던 명성왕후로선 아들인 숙종이 얼굴만 반반한 침방나인과 사랑을 나눈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을 것이다. 명성왕후가 장희빈 축출에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나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결국 명성왕후는 장희빈이 중전이었던 인경왕후를 저주하고 모함했으며, 행실이 매우 거칠고 방자하다는 죄목을 들어 그를 궁궐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임금의 승은을 입은 궁인이 특출한 죄목 없이 쫓겨나는 일은 전례가 없는 희귀한 일이었기에 숙종과 장렬왕후의 극렬한 반대가 있었지만 명성왕후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장희빈을 두둔하던 시할머니 장렬왕후를 거칠게 타박해 무안을 줄 정도였다.

 

 

이와 같은 명성왕후의 서슬 퍼런 기세에 장희빈은 입 한 번 뻥긋하지 못하고 무려 6년 여간 궐 밖에서 숨죽이며 살 수밖에 없었다. ,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희빈이 명성왕후에게 소리 지르고 대드는 장면들은 사실상 완전한 허구인 셈이다. 만약 실제로 장희빈이 드라마에서처럼 명성왕후에게 대들었다면 그의 성격상 당장 사약을 내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재밌는 점은 장희빈을 퇴출한 이 후에도 그에 대한 명성왕후의 견제는 끝도 없이 계속됐단 사실이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숙종실록 12년에 기록되어 있는 일화다. 인현왕후가 장희빈이 숙종의 승은을 입은 궁인이므로 환궁시키는 것이 맞다고 간청하자 명성왕후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인현왕후의 부탁을 단호히 거절한다.

 

 

내전(인현왕후)이 그 사람(장희빈)을 아직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이오. 그 사람은 매우 간사하고 악독하오. 주상이 평일에도 희로의 감정이 느닷없이 일어나시는데 만약 꾐을 받게 되면 국가에 화가 됨은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이니 내전은 후일에도 마땅히 나의 말을 생각해야 할 것이오.”(숙종실록 12, 1210)

 

훗날 인현왕후는 시어머니의 이러한 충고를 무시하고 장희빈을 다시 궐로 불러 들였다가 더할 나위 없는 고초를 겪게 된다.

 

역사에 가정이라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지만 만약 명성왕후가 42살의 나이에 요절하지 않고 천수를 누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장희빈이 궁궐에 다시 들어오는 일도, 그의 아들이 숙종의 대를 이어 보위에 오르는 일도, 인현왕후가 그토록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는 일도, 서인 세력이 속수무책으로 남인에게 밀려나는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명성왕후는 왕실과 내명부를 대표하는 최고 권력자였던 셈이다.

 

 

삼척동자도 다 안다는 천하의 장희빈조차 고양의 앞의 생쥐꼴로 만들었던 명성왕후 김씨. 뚜렷한 정치색과 강력한 권력욕으로 숙종 집권 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그는 현재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안에 있는 숭릉에 남편인 현종과 함께 합장되어 있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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