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수다] 의 '루저' 파문이 아직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


"키 작은 남자는 루저" 라는 여대생의 말 한마디로 대한민국이 발칵 뒤집어 진 것도 재밌지만, 그 이후 벌어지는 갖가지 루저 패러디는 더더욱 재밌다.


그런데 이 여대생의 말보다 더 '무서운 것' 은 따로 있다. 바로 TV가 끊임없이 주입하는 또 다른 '루저' 헤게모니다.




TV 속에 보이는 "못생긴 여자들"


많은 사람들이 [미수다] 의 "키 작은 남자는 루저" 라는 말에 분노했던 이유는 그 말이 너무나도 노골적인 차별의식을 담아낸 말이기 때문이다. 능력, 성격 등을 완전히 무시하고 신장이라는 한 가지 잣대로 위너와 루저를 갈라버리는 흑백논리는 우리가 공공연하게 말하는 '상식' 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이렇게 확연히 눈에 띄는 '차별' 은 오히려 양반이다. 우리가 더 경계하고 무서워해야 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공공연하게 '옳은 것' 으로 받아 들여지는 차별이다.


TV가 주입하는 가장 무서운 차별은 바로 못생긴 사람, 특히 못생긴 여자에 대한 희화화와 비웃음이다.


KBS의 대표적인 코미디 프로그램인 [개그콘서트]를 보자. 박지선이 나와서 남자의 사랑을 구걸한다. 그녀가 남자의 사랑을 '구걸' 해야 하는 이유는 한 가지다. 못생겨서다. 그리고 그녀가 사랑을 구걸하는 잘생긴 남자는 그녀를 마치 흉물처럼 취급한다. 그래도 박지선이 연기하는 못생긴 여자는 웃는다. 흉물처럼 취급받아도 남자의 사랑을 쟁취할 수 있다면 '만사 OK' 라는 식이다.


이 속에서 못생긴 여자는 인격이 없는 존재다. 억지스럽게 남자에게 들러 붙고, 말도 안되는 상황으로 남자를 얻었다며 좋아하는 못생긴 여자는 솔직히 말해서 상당히 거북스럽고 부담스럽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아주 유쾌하게 웃는다. 못생긴 여자의 고군분투를 즐기며 '비웃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못생긴 여자의 사랑 구걸은 정도를 넘으면 넘을수록 재밌어진다. 비웃을 수 있는 상황이 훨씬 많아지기 때문이다.


신동엽, 신봉선이 진행하는 [샴페인] 의 '이상형 월드컵' 에는 이런 장면도 나온다. 전지현, 이효리 같은 미녀 스타들의 사진이 나오다 신봉선, 김신영, 정주리 등 흔히 말하는 못생긴 코미디언의 사진이 나오면 곳곳에서 탄식이 쏟아진다. "뭐야, 이거 빨리 넘겨!" "자, 쉬어가는 타임인가요?" 그야말로 노골적인 외모에 대한 비난이다. 그런데 비난을 당사자인 신봉선과 정주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깔깔대고 웃는다. 비난하는 사람이나, 비난받는 사람이나 웃고 지나간다. 참으로 훈훈한(?) 광경이다.


이러한 모습은 간혹가다 미녀 스타와 신봉선의 사진이 함께 붙을 때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선택하는 사람의 의사와 관계 없이 주위의 분위기는 미녀스타='위너', 신봉선='루저' 라고 못 박는다. 어쩌다 선택하는 사람이 신봉선을 뽑게 되면 그 사람은 아주 이상한 사람, 상당히 특이한 사람으로 전락한다. 그리고 그들은 묻는다. "아니, 어쩌다가 신봉선을 뽑게 됐나요?" 이 말은 곧 "어쩌다가 루저를 위너로 만들었나요?" 라는 물음과 같다. 아무도 "못생긴 여자는 루저" 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지만 이미 그들은 "못생긴 여자는 루저" 라는 말을 진실을 넘어선 진리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셈이다.


이번에는 드라마를 보자. 대개 드라마에 나오는 뚱뚱하고 못생긴 사람들 중에 성격 좋거나, 지성미를 갖춘 인물은 없다. 화려하고 예쁜 주인공들 사이에서 양념처럼 등장하는 못생기고 뚱뚱한 사람들은 무식하게 힘만 세거나, 안하무인 격으로 자존심만 강하던가 아니면 지독하게도 주인공을 괴롭힌다. 여기에 못생기고 뚱뚱한 사람에게 '아줌마' 라는 타이틀까지 붙게 되면 말 그대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죽일 년이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드라마에서 아무런 문제 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키작은 남자는 루저" 에는 광분하고, "못생긴 여자는 루저" 에는 동의하는 이상한 사회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예전부터 TV가 끈질기게 주입해 왔던 "외모" 에 관한 은근한 차별에 사람들이 이미 너무나도 관대해져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차별이라는 것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무덤덤해 진 사람들은 한 발자국 더 나아가 못생긴 사람들을 비하하고 비난하면서 쾌락을 얻는다.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차별은 이번 [미수다] 사건처럼 비판하고, 자정하고, 노력하면서 바꿔나가면 된다. 그런데 은근하게 퍼져있는 차별은 곪을대로 곪아도 치료조차 하지 못한다. 뿌리깊게 박혀있는 외모에 대한 공공연한 차별이 바로 여기에 속한다. 못생긴 사람조차 자신의 외모를 사용해 웃음을 주려고 하는데 그 누가 그것을 차별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은근하면서도 대단히 노골적이고, 아무도 말하지 않지만 누구나 다 아는 이 차별은 그래서 더더욱 무섭고 징그럽다.


혹자는 말한다. 사람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맞다. 사람이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고, 아름다운 것을 원한다. 그런데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곧 아름답지 않은 것을 배척하는 것과 동일시 되는 것은 아니다. 아름다운 것이 반드시 '가치 있는 것', 아름답지 않은 것이 반드시 '가치 없는 것' 은 더더욱 아니다.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것대로,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름답지 않은 것대로 가치가 있고 쓸모가 있다. 아름다운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말 그대로 차이일 뿐이다. 차이가 차별의 당연한 근거로 사용되서는 안 된다.


나아가 사실은 그 아름다움의 기준이라는 것도 사람마다 각각 다른 것이다. TV가 전파하는 외모 차별의 문제는 아름다움의 기준을 외모로 한정시키고 그 외모조차 '이러이러 해야 한다' 고 획일화 시킨데 있다. 그 누군가는 박지선 역시 예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는 대단한 비극이다.


우리는 "키 작은 남자는 루저" 라는 말은 절대적으로 틀린 명제라고 말하면서 "못생긴 여자는 루저" 라는 말은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는 이상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또한 우리는 "남자의 키는 경쟁력" 이라는 말에는 광분하면서 "외모는 경쟁력" 이라는 말에는 고개를 끄덕이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두 말의 차이라면 전자는 한 여대생의 입에서 노골적으로 나왔고, 후자는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지만 누구도 말하지 않는 암묵적인 것이라는 것 뿐 아무런 차이가 없다.


문화 평론가 정덕현은 사회가 어떠한 구조적 문제를 지니고 있을 때, 그 문제에 대해 지적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차별을 차별이라고 의식하지 못하고, 문제를 문제라고 생각하지도 못하는 우리 사회야말로 구조적으로 고착화 되어 있는 이 '요상한 차별' 부터 다시금 곱 씹어 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한 여대생의 생각 없는 발언에 대한 광분이 아니라 자신부터 되돌아 보는 진지함이다. 우리는 지금 '위너' 는 없고, '루저' 만이 가득한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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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선은 대단했다.

 말이 5천만원이지 [1대 100] 애청자라면 누구나 그 5천 만원 상금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안다. 찬스를 두 번이나 사용할 수 있는 이점은 있지만 그래도 무려 백명 보다 운이 좋아야 살아 남을 수 있는 것이니까. 

  
 아무튼 상대적으로 도전자가 유리한 위치에 서 있다 하더라도 아직까지 5000만원의 주인공은 10명이 채 되지 않을 만큼 문제는 상당한 난이도를 자랑한다.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찍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몰리면서 주는 긴장감은 상당한 재미를 선사한다. 나름대로 문제를 풀어보고 (엄밀히 말해 찍어 보고) 최후의 1인도 틀린 문제를 맞추기라도 할 때면 그런 재미는 더욱 극대화 된다.

 물론 박지선의 뛰어난 상황판단력과 운을 보는것은 (박지선의 경우 운도 실력이라 할 만 했지만) 나름 재미도 있었지만 감동도, 희열도 평소의 그 3분의 1로 줄어들었다. 



 스포일러, 보고 싶지 않아도 보게 하면 어떡하나?


 이미 다 알고 있었더랬다. 그리고 이미 놀랐다. 박지선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박지선이 주저 앉았다는 디테일한 설명까지 덧붙여 있었다. 단지 이번 [1대 100]은 어제 읽었던 기사의 리바이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떡하니 제목을 '박지선 5천만원 획득'같은 스포일러로 꾸며 놓은 채, 각종 포털사이트 메인에 등장한 기사 덕택에 박지선의 우승 소식은 벌써 부터 알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어제가 처음이 아니었다. 녹화가 끝나자마자 흘러나온 스포일러는 기사로 배포되었고 방송 날짜가 다가오자 너무나도 친절하게 다시 한 번 비슷한 기사가 시선을 잡아끌었다. '주저 앉기 까지 했다'는 필요 없는 설명까지 덧붙인 채 말이다.


 이런 상황은 한 두번이 아니다. 드라마의 결말이 궁금할 때 쯤이면 어김없이 스포일러가 새어 나온다. 드라마 제작진 측에서는 원하지 않았더라도 어떻게 새어 나왔는지 당당히도 결말을 제목으로 내 붙인다. "과연 결말은?" 같은 말로 결과를 알 수 없게 해 놓아 사람들이 읽을지 안 읽을지 선택권을 주지도 않는다. 

 
 최근 나온 [아내의 유혹]의 기사만 보더라도 '애리 자살'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이 붙여졌다. 굳이 알지 못했더라도 상관없는 결말을 알게 됨으로써 드라마의 흥미가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아무리 조회수가 중요하다지만 꼭 그렇게 까지 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미국의 한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결과를 숨기기 위해 출연진과 제작진들과 거액의 계약금을 건 계약서를 작성할 만큼 치밀한 준비를 했다.


 꼭 그런 것이 아니라도 '사전 제작 방식'에 익숙한 미국 드라마나 일본 드라마들의 결론은 드라마의 마지막이 방영될 때까지 결코 쉽게 밝혀지지 않는다. 미국이나 일본의 언론사들이 스포일러를 무차별적으로 내보냈다면 제작진 측에서 소송도 불사할 일이다. 그런 법적인 문제를 다 떠나서 스포일러 금지는 시청자들에 대한 '예의'다.


 만약 브라운관이 아니라 스크린의 스포일러였다면 어땠을까. 치밀한 반전을 준비한 [장화홍련]이나 최근에는 충격적인 반전이 있다는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같은 영화의 반전이 떡하니 기사의 제목으로 나온다고 생각해 보라. '사실은, 장화홍련의 임수정이 000였다.' 같은 제목으로 영화의 흥미를 떨어뜨리는 일이 발생한다면 영화를 누가 보고 싶어 할까. 한국에서도 한바탕 소동이 날 일이 아닐 수 없다.


 왜 스크린과 브라운관에서 지켜져야 하는 룰이 달라야 하는지 모르겠다. 시청자들이 드라마나 쇼프로 그램을 보는 이유도 어쩌면 결말이 궁금해서 일 수도 있다. 시청자들은 뻔한 결말은 뻔한 결말대로, 충격적인 결말은 충격적인 결말대로  온전히 프로그램에 집중하고 싶어한다.


 이미 한국 인터넷 인구가 15세 이상 인구를 기준하여 2700만명을 넘었다는 결과 보고도 있는 마당에 불특정 다수에게 노출되는 기사들이 이렇게 무책임해서야 가히 '횡포'라는 말 밖에는 할말이 없다. 


부디 단지 한 사람, 그 결말을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라도 최소한의 '예의'는 시청자들을 위해 언론사건, 방송사건 지켜 주었으면 한다.
Posted by 한밤의연예가섹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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