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의 고현정은 미실을 연기하며 연기 대상을 수상했다. 주인공과 대척점에 서 있는 악역이었지만 고현정의 설득력있는 연기와 존재감은 주인공을 바꿔놓을 정도로 큰 임팩트를 발휘했다. 고현정이라는 톱스타가 악역을 맡은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는 선택이었다.
작년 MBC 연기대상 시상식에서 대상을 탄 이유리는 고현정만큼의 무게감을 자랑하는 톱스타가 아니었다. 그러나 막장극의 조연이라는 핸디캡까지 모두 뛰어넘고 시청자들의 선택을 받았다. 다소 개연성이 떨어지는 인물인 연민정을 설득력있게 포장하고 기대를 뛰어넘은 연기를 보인 이유리는 엄청난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바야흐로 악역을 연기하는 배우들의 전성시대다. 어떤 역할이든 자신의 매력을 충분히 어필할 수 있는 연기력과 존재감을 보인다면 악역을 맡은 배우들의 진가는 훨씬 더 뇌리에 각인된다.
청룡영화상에서 <사도>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유아인은 영화 <베테랑>에서 동정의 여지가 없는 악역을 맡았다. 자신의 재력을 믿고 사람들을 물건 취급하고 뭐든 돈으로 해결하며, 심지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사이코 패스에 가까운 악역이었지만 관객들은 이 캐릭터에 열광했다. 유아인의 연기력이 이 캐릭터를 표현하는데 손색 없이 훌륭했기 때문이었다. 정의의 편에선 황정민 보다 악역인 유아인의 존재감이 영화의 전반을 지배했다. 덕분에 유아인은 천만 배우라는 수식어를 얻고 2015년을 유아인의 해로 만들었다.
<내부자들>에서도 ‘착한 주인공’은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약하다. 오히려 눈길을 끄는 것은 이병헌이 맡은 안상구와 백윤식이 맡은 이강희 역할이다. 이병헌이 맡은 안상구가 단순히 착하기만 한 캐릭터라면 이정도의 호응을 끌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의 복수의 목적은 정의의 실현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가해진 불합리함에 대한 포효다. 그 스스로도 ‘내가 원하는 것은 그저 복수일 뿐’ 고 소리치고 그와 우연찮게 손을 잡게 된 검사 우장훈(조승우 분)은 말한다. ‘너도 죄가 없는 것은 아니잖아.’. 그 역시 권력에 아부하는 깡패였고 그들의 뒤를 봐주며 온갖 비리에 연루된 인물이다. 그런 그의 복수가 통쾌한 것은 그가 선한 인물이고 정의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감정에 동화되기 때문이다. 그 캐릭터를 훌륭히 소화한 이병헌은 그를 따라다닌 추문을 벗어던질 계기를 마련했다. 영화는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에도 불구하고 500만을 훌쩍 넘어 순항중이다.
드라마에서 이런 현상은 지속되었다. <육룡이 나르샤>의 박혁권은 명백한 악역임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박혁권의 과한 화장과 여성스런 몸짓은 그 캐릭터를 돋보이게 하는 설정으로 자리 잡았고, 그가 죽음으로서 퇴장을 하는 시점에서 그 캐릭터의 죽음을 아쉬워 하는 시청자들이 다수였다. 그에게는 심지어 ‘길태미 예쁘다’의 준말인 ‘태쁘’라는 애칭까지 붙었다. 이는 미녀배우 김태희의 애칭과 동일한 별명이다. 그에 쏟아지는 시청자들의 애정이 어느정도인지 확인할 수 있는 지점이다.
최근 시작한 드라마 <리멤버-아들의 전쟁>역시 주인공보다 눈에 띄는 것은 악한 속성을 가진 이들이다. 영화 <베테랑>을 드라마로 옮겨 온 것 같은 분위기는 절대 악에 도전하는 정의를 내세우지만, 이 드라마의 캐릭터들은 정의의 갑옷으로만 치장하지 않았다. 박성웅이 맡은 변호사 박동호는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속물이다. 그의 뒤를 봐주고 있는 것은 무려 조폭. 그 역시도 조폭이 되고자 했던 과거까지 있다. 그가 일을 처리하는 방식은 협박과 회유에 가깝다. 의뢰인을 빼내기 위한 합의를 이끌어 내기 위해 폭행 사건을 조작하는 모습은 그의 캐릭터를 설명하는 동시에 통쾌함마저 안겼다. 박동호는 ‘착하기만 한’ 캐릭터가 절대로 아니지만, 주인공 보다 훨씬 더 큰 존재감을 발휘하며 드라마 1~2회를 장악했다.
악역을 맡은 남궁민 역시, 뛰어난 연기력으로 드라마의 설득력을 높였다. 그가 만들어 낸 남규만이라는 캐릭터는 <베테랑>의 유아인이 맡았던 조태오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악랄하다. 그는 법 위에 서 있는 절대 악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그의 연기력과 결합된 캐릭터는 그라는 연기자에 대한 신뢰를 오히려 증가시킨다. 그가 강력하면 할수록, 드라마의 긴장감은 배가 되고 그에 대한 평가 역시 달라진다.
악역이라는 한계에 갇혀 주인공의 들러리가 되었던 시대는 갔다. 이제 악역도 개성시대. 악역을 어떻게 소화하느냐에 따라 경우에 따라서는 주인공보다 훨씬 더 주목받고, 연기자로서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결국 배우는 역할에 상관없이, 자신이 맡은 바를 다 할 때 가장 빛이난다는 사실이 진리임이 증명된 것이라 할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