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편이 본격적으로 '드라마 승부수'를 띄운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성과를 내고 있는 작품이 바로 드라마 [인수대비]다.


일찌감치 채시라의 차기작으로 주목을 받은 이 드라마는 [왕과 비]의 정하연 작가가 극본을 맡고,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의 이태곤 PD가 연출을 맡아 jTBC의 '간판 드라마'로 그 입지를 확고히 굳히는 중이다.


허나 이 드라마의 의도적인 '역사 왜곡'은 불편하다 못해 속이 상할 지경이다. 특히 문종에 대한 지나친 폄하는 도가 지나치다는 느낌까지 든다.


드라마 [인수대비] 속 문종은 철저히 나약하고 무능한 군주로 그려진다. 양녕대군이 면전에 대고 "효도 빼놓고 한 게 뭐가 있느냐"며 타박할 정도다. 그 스스로도 동생인 수양대군 앞에서 "임금은 나 말고 수양 네가 되어야 한다"고 하기도 하고, "나는 효도 빼곤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라며 자책하기도 한다. 야심만만하고 진중한 수양대군과 비교하면 문종의 이미지는 더욱 초라하고 보잘 것 없어진다.


허나 이건 명백한 왜곡이다. [인수대비]가 수양대군을 위시한 계유정난 세력 즉, 쿠데타 세력에 더 우호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라 할지라도 문종의 캐릭터를 이런 식으로 형편없이 그리는 건 그 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문종이 그토록 무기력하고 무능한 왕이었다면 2년 3개월의 짧은 치세에 백성들이 혀를 깨물고 죽을 정도로 비통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종은 조선 왕조 역사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능력을 지닌 성군이었다. 아버지 세종대왕의 치세를 지척에서 지켜봤던 그는 왕세자 시절부터 철저한 '군왕교육'을 받으며 임금이 갖춰야 할 기량과 자세를 배워나갔다. 아버지인 세종대왕이 "왕세자가 가히 성군의 자질이 있다"고 칭찬할 정도로 문종의 재능은 비범한데가 있었다.


특히 그는 세종 24년부터 병으로 앓아 누운 세종을 도와 '대리청정' 즉, 왕세자로서 섭정을 하기 시작했다. 그 때 문종의 나이 불과 29살이었다. 세종 18년부터 알게 모르게 세종의 정치 활동을 지원했던 문종이 세종 24년에 이르러 드디어 정치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세종 말년의 그 빛나는 업적들은 실상 세종과 문종이 함께 일궈낸 세종-문종 공동정부의 치적이라 할 만하다.


세종은 이 섭정 기간동안 문종으로 하여금 왕처럼 남쪽으로 향해 앉아 조회를 받게 하는 한편, 일부 국가 중대사를 제외한 모든 서무를 모두 문종에게 일임했다. 약 8년여에 걸친 이 대리청정의 기간동안 문종은 모든 일을 빈틈없이 수행하고 꼼꼼하게 처리하여 대소신료들의 찬사를 받았고, 국가의 기틀을 튼튼히 하는 한편 아버지 세종에게도 효도를 다하는 등 완벽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했다.


또한 문종은 아버지인 세종대왕보다 더욱 학문을 좋아했던 '문왕 중의 문왕'이었다. 그는 대소신료들을 모아놓고 토론하기를 좋아했으며, 한 번 손에 잡은 책은 다 읽을 때까지 놓지 않을 정도의 독서광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언론의 자유로운 감시와 비판을 수용하는 등 언관에 관대한 정치를 펴 일을 처리하는데 있어 쓴 소리를 듣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런 그의 숭문적 경향과 친 언론적 자세는 직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았다. 그는 6품 이상의 신하들에 대해 돌아가면서 왕을 만나는 것을 허락했고 삼정승을 비롯한 고위 관료들 뿐 아니라 벼슬이 낮은 신하들의 의견까지 두루 들으려 애썼다. 문종은 신하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즉시 이를 기록하는 습관이 있었고, 대리청정 시절에는 이러한 의견을 종합하여 세종에게 건의하는 등 국가 경영 정책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뿐 아니라 그는 직접 측우기 제작에 뛰어들 정도로 천문, 역수 및 산술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글씨 또한 명필이었다. <동국병감><고려사절요><고려사><대학연 의주석>등의 편찬도 모두 문종의 치세에 이뤄진 일이며 보다 효율적인 군사 활용이 가능한 12사 군제 개혁안을 출범시킨 것도 그의 업적이다. 말 그대로 문종은 세종만큼이나 문무에 모두 능통한 당대의 명군이었던 셈이다.


다만, 그의 약점 한 가지는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너무 빨리 세상을 떴다는 점이다. 어린 아들인 단종을 홀로 남기고 서른 아홉의 젊은 나이에 승하하는 바람에 조선조는 골육상쟁의 피바람에 휩싸이게 됐고 결국은 계유정난, 단종폐위 같은 역사의 비극 또한 벌어졌다. 문종이 10년만 더 살아 있었더라도 아마 단종은 안정적으로 국가 운영의 바통을 이어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허나 '빨리 세상을 떴다'는 죄목 하나 때문에 문종이 이토록 유약하고 무능하게 그려지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실제 문종은 드라마 [인수대비]처럼 무기력한 임금이 아니었을 뿐더러, 큰 아버지인 양녕대군에게 "할 줄 아는 건 효도 밖에 없다"고 꾸지람을 들은 적도 없다. 적어도 문종 치세는 조선왕조에서 가장 안정적인 태평성대였고 학문과 과학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은 아름다운 시기였다.


드라마 [인수대비]는 문종의 무능력함을 자꾸만 부각시켜 수양대군 세력의 '쿠데타'를 정당화 하는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다. 드라마 [인수대비]가 궁극적으로 설파하고자 하는 것은 쿠데타 세력의 유능함과 그 속에서 태어난 걸출한 여성정치인의 존재감이다. 이는 마치 현실정치에서의 쿠데타 세력(박정희 정권)과 여성정치인(박근혜)을 빗댄 듯한 뉘앙스를 자아낸다.


허나 세조의 계유정난은 어떤 명분을 갖다 붙여도 명백한 왕위 찬탈이었으며 국가 체제를 뒤집은 쿠데타였다. [인수대비]가 노리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는 바 아니나 이런 식으로 쿠데타를 옹호하는 것은 옳지 않을 뿐더러 하늘에 계신 문종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내가 아마 문종대왕이었다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꾸짖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이제 드라마 [인수대비]가 보기에도 민망하고 부끄러운 역사 왜곡은 제발 그만두길 바란다. 드라마로서 최소한의 품위와 교양은 지키고 있는지, 그대들의 양심에 손을 얹고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길 기대한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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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donzulog.tistory.com BlogIcon 으노야 2011.12.06 07: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흠... 종편의 횡보가 정말 마음에 안드는데...

    은정씨의 연기는 ㅋㅋ 톡톡튀어서 좋더라구요.

    흐음... 드라마라는게 원래 픽션이 들어가는거니깐 왜곡되는부분도 있겠지만 너무 지나치게 해선 안되겠죠. ㅎㅎ

  2. 2011.12.06 09: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종편이야.. 대놓고 왜곡하려 만들어진 방송국이나 다름없는데..
    그걸 모르고 보시기 시작하셨나봐요~

  3. 에르자드 2011.12.06 09: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확실히 그 부분만큼은 조금 의아했지만 그러러니하고 넘겼는데..그런 숨은 뜻이 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네요..그러는 사이 저도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면서 주인공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네요..다음부터는 좀 더 객관적인 시각에서 시청하겠습니다..

  4. Favicon of https://ddella.tistory.com BlogIcon 2011.12.06 10: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수양대군 세력의 '쿠데타'를 정당화 ㅋㅋㅋ종편답네요 정말

    • 혜림 2011.12.23 02:06  댓글주소  수정/삭제

      인수대비 보다가 너무 어이없고 기가막혀서 보지 않고 있네요~ 제발 인수대비 작가분이 이글좀 보셨으면 좋겠네요~~어린 단종이 넘 불쌍하고 안타까울 뿐이네요~ ㅠㅠ

  5. 백번동감합니다 2011.12.06 15: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실 수양대군의 쿠데타는 미화된 부분이 상당히 많죠...
    쿠데타의 명분도 매우 약했을 뿐더러

    수양대군이 왕위 찬탈한 뒤의 역사는 정말 부정적인 측면이 많았으면 많았지 결코 좋았던 점은 별로 없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더구나 문종은 제 2의 세종이라 불릴 만큼 현명했던 임금이었고, 그의 아들인 단종도 똑똑했던 데다가 문종의 장자라는 정통성도 더 컸기 때문에
    수양대군의 계유정난... 과연 좋게 볼수 있을까 의문이 강하게 드네요

    그런의미에서 전 이 드라마 아예 안 봅니다
    애초에 이럴게 뻔해보였거든요 ㅋ
    더구나 저번에 공주의 남자를 재밌게 본 적이 있어서 말이죠^^

  6. 백번동감합니다 2011.12.06 15: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리도 되도록이면 종편 보지 마세요 ㅡㅡ;;;

    종편채널 웬만하면 다 삭제하시고 관심 가져주지 마세요

    왜냐면 종편은 보수라는 미명하에 조중동 이 썩은 찌라시들의 여론몰이를 위한 거니까요

  7. 도미닉 2011.12.06 21: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종편은 정치적인 성향을 가진 뉴스만 안보면 되지 예능이나 드라마는 괜찮지 않나요 위의 분 참 이상하시네 그리고 글쓴이의 글을 읽어보니 이해가 갑니다만 제목이 인수대비이다 보니 작가가 드라마 내용을 그렇게 한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고등학교시정 학교에서 배우기에도 문종은 뛰어난 성군으로 배웠습니다. 하지만 드라마에서는 원래 생각하고 배우는 것에 비해 내용이 이상하게 흘러가더라구요 하지만 드라마는 드라마일뿐 역사가 아니지 않습니까 드라마로 너무 불쾌해하지 마세요 드라마는 드라마일뿐 사실이 아닙니다.

  8. 위에 도미닉님 2011.12.07 03: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종편은 정치적인 성향을 가진 뉴스만 안보면 되지 예능이나 드라마는 괜찮지 않나요 < 괜찮지 않아요. 이미 언론이나 인터넷 여론에서 많이 나왔듯 미디어 산업이란게 만만한게 아니잖아요. 언론학을 배우다 보면, 사실 방송사든 신문사든 결국엔 '뉴스'가 목적입니다. 그외 예능이나 교양 등.. 모두 나름의 존재이유가 있긴 하지만, 결국 언론사에서 가장 신경쓰는 것 뉴스에요. 나머지는 뉴스스로 시청자 혹은 독자를 끌어들이기 위한 자본조달청 혹은 낚시용 떡밥입니다. 종편 프로그램 보다보면, 종편사에서 뉴스를 만들 광고비 등의 미디어운영 자본금을 대주는 꼴이죠. 거기다 드라마나 예능이나, 내용이나 상징적 언어의 활용으로 세뇌하기도 하죠. 대표적인 것이 경찰국가를 미화하는 설정이라든지.. 위의 인수대비도 마찬가지고요. 쿠데타를 정당화하는 극의 흐름이나. 알고 보는 사람은 답답해서 안 보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그대로 보다보면 그대로 세뇌당하는 거고.

  9. 위에 도미닉님 2011.12.07 03: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지만 드라마에서는 원래 생각하고 배우는 것에 비해 내용이 이상하게 흘러가더라구요 < 뭔가 이상한 낌채를 님도 눈치채신 거네요. 그런데 그게 무서운 거에요. 원래 배운 사람이 한번 설득 당하면 더 세뇌당하기가 쉽다고 하잖아요. 그게 처음엔 좀 이상하다고 하면서 보다가도, 드라마에서 이런 저런 논리를 대면서 자꾸 얘기하다 보면, '아 그런가' 싶어서 설득당할 위험이 있어요. 다른 재밌는 드라마나 유익한 다큐 많으니, 한번 생각해봐 주시길 바랍니다.

  10. 동감합니다. 2011.12.07 17: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백번 동감합니다.. 저도 12.12쿠대타 옹호하려고 나온 들마라는건 눈치는 챘습니다.. 역시 쓰레기들..

  11. 동감합니다. 2011.12.07 17: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공주의 남자에서 그동안 미화되어온 수양 세조와 한명회의 실체가밝혀졌는데그걸 다시 덮으려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입니다.. 하여튼 웃기는놈들임..역사도 지들 멋대로 조작하려고 드는..한나라당의 선관위 공격도 기가 막힌일이지만

  12. 동감합니다. 2011.12.07 17: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ㅋㅋㅋ 진짜 어이가 없는놈들입니다. 문종께서 일찍 돌아가신것이 아쉽지만 세종대왕의 총애를 듬뿍 받고 세종대왕과 가장 많이 닮고 그의 덕망과 지식,학식 모든면에서 가장 많이닮은 뛰어난 군주였습니다. 과학기술,군사 기술 세자시절부터 문종대왕의 업적은 상당히 많습니다. 세종께서 대단히 총애하셨구요..그런 문종대왕을 무능하다니.. 정말 천벌받을자들입니다.

  13. Favicon of http://4321 BlogIcon 의갸갸 2011.12.12 03: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그렇구나....그래서 문종의 이름도 문종이야....임금들이름은
    돌아가시고 나서 사후에 그분둘의 행적에 관련하여 이름을 지어주니....
    근데 사실, 수양대군이 위협을 받을수는 있었을것 같습니다.
    자신이 살려면 상대를 죽일수밖에 없는 절절함....그리고 정치는 아주
    복잡 다양하게 여러사람이 얽혀있다보니...다들 저 살기위해서 서로에게
    깐죽대고...단종을 키워준 세종 네째부인도, 단종을 지키지 못하면 자신의
    삶에 직접적으로 위협을 받을테니까 도 그러수밖에...결론은 이 지구상의
    모든 인간은 다 각자가 자신이 행동하면서 살아가는 이유가 있는데..
    그 서로의 이해관계가 다르니, 어쩔수 없읍니다.

  14. 호호호 2011.12.27 04: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종 문종 단종 이 삼세대가 꾸준히 이여졌더라면 조선왕조의 역사가 태평성대를 이루었을텐데...ㅠ 세조도 훌륭한 임금이지만 문종의 업적에는 미치지는 못했죠 세종과 문종은 성격과 정치적인 코드가 잘 맞아서 문종이 세종을 도움으로 많은 업적들을 남길수가 있었죠 어릴적부터 집현전학자들과 동고동락했다고 실록에 기록되어져 있더군요 어진사람을 나약하다고 표현하는 사람은 경솔한 사람이죠 그래서 인수대비는 자신의 손자인 연산군에게 늙어서 학대 받잖아요 그 성정이 어디서 나왔겠어요~ㅋ어진임금에게 충성스런 신하는 존재하는 법이지요 역대 임금중에서 이런 충신이 어디 있을까요? 사육신...혜빈양씨도...지신의 동생인 안평대군과 금성대군도요 하지만 세조는 자신의 할아버지 태종처럼 왕권을 지키기위해 결단을 내린것 뿐입니다

  15. dsds 2011.12.27 15: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라마 인수대비를 종편이랑 연개해서 까는거는 좀 어이가 없는듯합니다.
    인수대비정도의 픽션은 솔직히 역사왜곡이라고 할수도 없는걸요.요즘 지상파 방송사극들을 좀 보시죠.인수대비야 역사적 사실을 기초로 했다고 해도 지상파방송들에서 사극이라고 하는 드라마들은 환타지 찌라시 수준의 스토리를 가지고 사극이라고 우기는 실정입니다.

    오히려 종편에서 하는 인수대비가 정통사극에 더 가깝더군요.이걸 가지고 종편이 왜곡 어쩌구 한다면 지상파 방송들은 무엇이 되나요.아무리 조중동이 싫어도 말도 안되는걸로 걸고 넘어지면 안되죠.

  16. ff 2011.12.28 18: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조는 훌륭한 임금이 아닙니다.. 훌륭한 임금이라면 세종, 정조나 적어도 태종만큼이라도 했어야죠.

  17. dsds님꼐 2012.01.13 22: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수대비가 왜 정통사극에 가까운지 부터 물어봐야겠네요 ㅋㅋ
    조선왕조실록에 어디 대군따위가 세자에게 그런 효도 밖에 못하는 한심한 자 라는 말을 했는지가 궁금 하네요 꼭 찾아서 알려주세요 ㅎㅎ

  18. 요즘 드라마를 2012.01.14 03: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분석하면서 보는 이 어이없음...그냥 드라마는 드라마로 보시죠 이게 역사 교과서도 아니고 역사공부 하려면 책을 보시던가 그리고 그시대에 살다 오지도 않았으면서 위에 적어놓은것이 마치 사실인양 쓴것도 어이없음

  19. ggg 2012.04.27 09: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라마재방우연히 보다가 의아했던게 ... 단종은 12살에 보위에 올라 어리다는 이유로 수양대군과 그외 사람들이 구데타를 일으킨건데 이번에 보위에 오른 성종도 13살이라면서요?참~아이러니하네요.성종이나 단종이나 그 나이또랜데...단종을 친 이유는 정치욕심때문이라는것 밖에 안되는군요.




[공주의 남자]가 클라이막스를 향해 치달아 가고 있다.


사육신의 반란과 세령의 반항에 점점 더 평정심을 잃어가고 있는 세조의 모습과 그에 대항하는 김승유 집단의 단종복위계획이 구체화 되면서 갈등이 고조 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22일 방송분에서는 세조의 맏아들인 의경세자가 병에 걸려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장면이 방송됐다.


세령은 이를 두고 아버지인 세조에게 "당신의 업보를 자식들이 받아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라고 일갈한다. 그렇다면 세령의 말처럼 세조의 자식들은 정말 일찍 죽었을까?


세조는 정비인 정희왕후 윤씨에게 2남 1녀를, 후궁인 근빈 박씨에게 2남을 두어 총 4남 1녀를 두었다. 여기서 세령 캐릭터의 모티브가 된 세희공주까지 합치면 4남 2녀다. 그렇다면 생몰년이 미상인데다가 여전히 실존 여부를 두고 말이 많은 세희 공주를 제외한 나머지 세조의 자식들은 몇 살에 세상을 떠났을까.


우선 세조의 맏아들인 의경세자(훗날 추존왕 덕종)은 20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해서에 능하고 영민하다 알려졌으나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던 그는 계유정난 이 후, 더욱 건강이 나빠져 병상에 눕는 일이 잦았다. [공주의 남자]에서는 의경세자가 아팠다는 사실을 세조가 뒤늦게 알게 되는 것으로 그렸는데, 사실 세조 부부는 맏아들인 의경세자의 건강 때문에 애초부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다 단종폐위사건을 전후해 극심한 죄책감과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한 의경세자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얼마 되지 않아 숨을 거두게 된다. 의경세자는 꿈 속에서 자주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 권씨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에게 의경세자의 혼을 현덕왕후의 귀신이 데리고 갔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이 소문에 격분한 세조는 현덕왕후를 폐위시키고 그녀의 무덤을 파헤치는 패륜을 저질렀는데, 이는 시동생이 형수의 무덤을 파헤친 것으로 강상과 윤리를 치도의 근본으로 삼는 조선의 예법상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를 사료해볼 때 당시 세조가 의경세자의 죽음에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헤아려 볼 수 있다. 의경세자의 부인은 그 유명한 인수대비(소혜왕후) 한씨이며, 그의 둘째 아들은 성종이다. 그는 훗날 덕종임금으로 추존된다.


세조의 둘째 아들은 예종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의경세자와 마찬가지로 잩은 병치레로 세조 부부의 애간장을 태웠던 그는 재위 1년만에 19살의 나이로 갑자기 승하했다. 모후인 정희왕후 윤씨조차 "주상의 병이 이토록 심각한지 몰랐다"고 경악할 정도로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허나 그가 재위 시절 내내 발바닥과 엉덩이에 난 종기로 크게 고생했고, 마땅한 치료법이 없어 밤잠을 설치는 일이 많았던 것으로 볼 때 예종의 승하는 어느 정도 예견되어 있었던 일이 아닌가 싶다.


예종이 너무 이른 나이에 흉서하자 많은 백성들은 또 다시 "세조의 업보를 자식들이 대신 받는다"며 두려워했다. 당시 백성들의 인식과 달리 최근 몇몇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예종을 둘러싼 정치역학관계를 두고 예종 독살설 또한 주목을 받고 있다. 예종의 형수이자 의경세자의 부인이었던 수빈(훗날의 인수대비)한씨는 사돈이었던 한명회, 대훈신 신숙주와 결탁해 자신의 둘째아들인 자을산군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종의 죽음은 필수적이었다. 결국 수빈은 훈구파를 움직여 예종을 정치적으로 압박하는 한편, 시어머니 정희왕후를 제 편으로 포섭해 든든한 왕실세력의 뒷받침을 얻어냈다. 끊임없는 정치 공격과 남이-귀성군으로 대표되는 신진세력의 몰락 등으로 큰 충격을 받은 예종은 가뜩이나 좋지 않았던 건강이 더 악화되었고 곧 숨을 거뒀다.


이를 두고 김인호 교수는 "결국 예종의 세력은 훈구세력을 등에 업은 인수대비의 세력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리하여 예종은 '암살'이라는 여운을 남기며 요절하였고, 자신의 아들이 아닌 인수대비의 둘째아들 성종에게 왕위를 넘길 수 밖에 없었다" 고 평가했다. 어찌되었든 예종 역시 열 아홉이라는 짧디짧은 생애를 마치고 간 비운의 임금인 셈이다.


세조의 두 아들과 달리 유일한 딸이었던 의숙공주는 비교적 오래 살았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일 뿐, 의숙공주가 숨을 거둘 당시 그녀의 나이는 고작 33살이었다. 정인지의 아들인 정현조의 부인으로 들어갔던 의숙공주는 결혼 이 후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되어 오랜 시간동안 병치레를 하다 숨을 거두었다. 게다가 그녀는 여자로서 단 한명의 아이도 생산하지 못한 석녀였다. 여성으로선 불행하기 짝이 없는 운명이었다.


후궁인 근빈 박씨에게서 얻은 두 아들 역시 요절한 것은 마찬가지다. 형인 덕원군의 생몰년은 미상이나, 둘째인 창원군은 28살 한창 나이에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로써 세조의 아들들은 30살이 되기 이전 모두 세상을 떠난 셈이 됐고, 특히 정비인 정희왕후 윤씨에게 얻은 두 아들은 모두 20살을 넘기지 못하고 요절했다. 단종을 죽인 업보요, 현덕왕후의 복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이른 죽음이었다.


신기한 것은 세조와 함께 계유정난-단종폐위를 주도했던 1등공신 한명회의 자식들 역시 대부분 빨리 요절했단 사실이다. 한명회는 셋째 딸과 넷째 딸을 각각 예종과 성종에게 시집 보내 두번이나 자신의 집안에서 왕비를 탄생시켰지만 그녀들은 모두 채 스물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운명이었다. 예종비 장순왕후는 17세의 나이에 산후병에 걸려 승하했고, 그가 낳은 해양대군도 14개월 만에 운명을 달리했다. 성종비 공혜왕후 역시 19세의 나이로 후사 없이 승하했으니 한명회로선 통탄할만한 노릇이었다. 그야말로 '천벌'이라 할 만했다.


신숙주 역시 생전에 자식을 잃는 슬픔을 겪었다. [공주의 남자]에서 세령-승유와 삼각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신면이 바로 그다. 신면은 세조조의 대표적인 반란이었던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다 반란 세력에게 무참히 살해당했다. 당시 신숙주는 이시애가 퍼뜨린 헛소문 때문에 반란세력으로 지목당해 옥살이를 하던 중이었다. 말 그대로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자식을 잃은 것이다.


이처럼 세조와 측근들의 자식들은 정말 부모의 '업보'를 떠맡은 냥 너무 빨리, 너무 비참하게 세상을 떠났다. 세조가 말년에 정신병에 걸리고 건강이 악화되는 등 고생을 한 것도 자식들의 요절에 의한 상처가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김종서, 안평대군, 금성대군 등 희대의 권신과 왕족들을 모두 죽이고 피로써 차지한 왕위였지만 세조 역시 인간적인 죄책감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었던 셈이다.


세조와 그 자식들은 정말 [공주의 남자] 속 세령의 말처럼 "세조의 업보를 지고" 저승으로 끌려간 것일까. 문득 하늘의 지엄함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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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공주의 남자 2011.09.23 15: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피로 흥한자 피로 망하리라(제 생각입니다)

  2. 1234 2011.10.05 08: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단종은 덕종이 죽은 후에 죽었는데.



[공주의 남자]가 날이 갈수록 재밌어지고 있다.


문종 승하와 함께 수양대군과 김종서의 2라운드가 시작된 가운데 김승유와 세령, 그리고 신숙주의 아들인 신면이 삼각관계를 형성할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


극 중 수양대군은 신면을 가리켜 자신의 딸인 세령에게 너와 정혼을 할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이 쯤에서 궁금해진다. 과연 실제 역사 속 수양대군은 신숙주와 사돈을 맺었을까
.



수양대군과 신숙주의
사돈관계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실이 아니다. 이는 드라마의 픽션일 뿐, 실제 역사 속 수양대군의 딸이 신숙주의 아들에게 시집간 일은 없다. 수양대군의 딸은 의숙공주 하나 뿐 이었는데 의숙공주는 신숙주의 아들이 아닌 정인지의 아들인 정현조에게 시집갔다가 후사 없이 요절했다. 의숙공주 뿐 아니라 수양대군의 자식들은 대부분 요절했는데 도원군(훗날 추존왕 덕종)과 예종이 그러했다.


아마 [공주의 남자]에는 나오지 않을 것 같지만 수양대군의 진짜 사돈은 신숙주가 아닌 최측근 한명회였다. 훗날 세조가 된 수양대군은 자신의 손자인 자을산군과 한명회의 막내 딸을 혼인 시켰고 공식적인 사돈관계가 됐다. 자신을 왕위로 밀어올린 공신들을 가족처럼 대했던 세조이지만 실질적으로 진짜 인척관계를 맺은 것은 장자방 한명회가 유일했다. 한명회에 대한 세조의 신임이 어땠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부분이다
.


한명회의 막내 딸과 결혼했던 세조의 손자 자을산군은 훗날 성종이 되었으니 한명회는 세조와 사돈관계를 맺음으로써 임금의 장인이라는 명예로운 자리까지 확보하게 된 셈이다. 그의 막내 딸 공혜왕후 한씨는 후사 하나 없이 어린 나이에 요절했으나, 한명회를 신임했던 성종은 그를 오랜시간 중용했고 성종의 할머니와 어머니인 정희왕후와 인수대비 역시 그에 대한 신뢰를 져버리지 않았다
.


특히 성종조 초기에 어린 성종을 대신에 수렴청정을 한 정희왕후는 자신의 수렴청정을 뒷받침 할 제도적 방법으로 원상제를 도입해 한명회, 신숙주 등에게 국가 권력의 대부분을 의지했으니 한명회로선 왕실에 딸을 바치고, 권력을 얻은 셈이 됐다. 모르긴 몰라도 공혜왕후가 천수를 누리며 자식까지 낳았더라면 한명회의 부귀영화는 대대손손 계속 되었을 것이다
.


그렇다면 과연 신숙주의 사돈은 누구였을까. 재밌게도 신숙주 역시 한명회와 사돈을 맺었다.


신숙주는 여덟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 맏아들인 신주가 한명회의 첫째 딸과 혼인했다. 이 결혼 또한 세조가 적극적으로 나서 성사된 것이다. 세조는 당대 최고 권신이자 참모들이었던 한명회와 신숙주를 혈연으로 맺어둠으로써 혹여 자신도 모르게 벌어질 반란의 싹을 애초에 잘라버리려 했다. 이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한명회와 신숙주는 죽는 그 날까지 세조 일족에 충성을 다했다
.


사돈관계로 맺어진 신숙주와 한명회는 부귀영화와 정치적 고비를 함께 겪어 넘으면서 둘도 없는 친구사이로 발전했다. 세종조부터 집현적 학자로서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던 신숙주와 칠삭둥이 경덕궁지기 였다가 벼락 출세길을 걷게 된 한명회는 얼핏 보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으나 세조를 위시한 쿠데타 세력이라는 명분은 그들을 운명공동체로 만들었다. 신숙주와 한명회가 주고받은 여러 편지에는 개인적인 친분 관계를 넘어 혈맹에 가까운 우정이 느껴진다
.


[공주의 남자]와는 달리 실제 역사 속 세조와 신숙주는 직접적인 사돈관계를 맺진 않았다. 그러나 한명회를 중심으로 한 그들의 관계는 사돈관계 그 이상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세조는 신숙주에게 항상 나와 자준(한명회)이 사돈이고, 자준과 범옹(신숙주)이 사돈이니, 나와 범옹 또한 사돈이 아닌가.” 라고 말하곤 했다. 세조는 비대해진 공신 세력을 항상 두려워했고, 이 두려움을 공신 세력의 컨트롤 타워인 한명회와 신숙주와의 사돈관계를 통해 제거하고자 한 것이다
.


과연 드라마 [공주의 남자]는 실제 역사 속 이들의 미묘한 관계를 어떤 식으로 풀어나가게 될까.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니 김승유와 세령, 신면이 만들어 내는 비극적인 삼각관계에도 주목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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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박팬 2011.08.05 17: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연히 지나다 정말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왜? 이렇게 수준 높은 문화연예글은 소외되고 자극적이고 초딩감상문 수준의 글만 메인에 뜰까요?
    이러니 다음블로그에 대한 인식이 수준 이하라는 지적이 많아지는 상황이죠.
    드라마 리뷰도 이 정도는 되어야 독자들께 읽혀도 부끄럽지 않을 듯 합니다.

    • 버들 2011.08.05 22: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동감입니다. 날이 갈소록 사극이 픽션화 되고 있어 이런그들이 더 빛을 발하면 좋겠네요..

  2. 미소 2011.08.05 21: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종-세조의 둘째 아들-의 첫째 정비인 장순왕후가 한명회의 셋째 딸 입니다. 이걸 먼저 써야 하지 않을까요?

  3. 아령아 2011.08.19 01: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글 잘읽고 갑니다~

  4. 조이아 2011.09.09 03: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조의 좌장이자, 한명회의 절친 권람도 사사로이는 한명회와 사돈관계...권람의 여동생이 한명회의 제수씨죠. 진짜 세조-한명회-신숙주-권람은 형제나 다름없는 운명공동체!!!

  5. 배신자 2011.09.13 21: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는 드라마가 아니고. 진실을 말하여야 한다.




최근 드라마 [대왕세종] 가 본격적인 세종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왕위 계승권이 충녕에게 넘어가면서 권력 구도가 재편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해지는 것이 있다. 셋째 아들이었던 충녕대군이 조선조 4대 임금으로 조선 최고의 '성군' 이 되었을 때, 아버지의 버림을 받고 왕위 계승권을 박탈 당했던 첫째 아들 '양녕대군' 은 어떻게 됐을까. 왕위 계승권을 빼앗긴 형과 본의 아니게 빼앗을 수 밖에 없었던 동생 사이에는 조금의 갈등도 없었을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야사에서는 태종의 첫째 아들이었던 세자가 태종의 마음이 충녕 대군에 있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광증' 을 보여 왕위를 동생에게 양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그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세자에게 '광증' 이 있었던 것은 사실로 보이고, 태종 역시 그런 아들을 탐탁치 않아 한 것 또한 사실이었다. 태종에게 있어서 세자에게 왕위를 넘기는 것은 일종의 자살행위였고 결국 일종의 탄핵 처분을 통해 세자를 폐위하고 셋째 아들 충녕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익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양녕대군' 이고, '세종대왕' 이다.


양녕대군은 처음부터 원자이자 세자의 위치에 줄곧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양녕대군' 으로 불리지는 않았다. 그가 양녕대군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세자의 자리에서 내려왔을 때 부터인데 양녕의 뜻이 사양할 양 (讓), 편안할 녕(寧) 즉, "(세자의 자리를) 양보함으로써 편안하다." 는 뜻임을 살펴 볼 때 '양녕대군' 이라는 호칭은 그의 운명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칭호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그는 세종에게 왕위를 '양보' 했을지언정 '편안' 한 삶을 살지는 못했다. 권력의 정점에서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폐위' 된 세자의 앞날이 가시밭길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광증에 시달리면서 전국을 전전해야 했고, 아버지 태종의 시퍼런 서슬에 질려 왕실의 '맏어른' 으로서도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는 평생을 원하든, 원치 않든 주변의 감시와 관리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그것이 바로 '성군' 세종의 형이 걸을 수 밖에 없는 잿빛 운명이었다.


양녕대군의 운명은 성군으로서 찬란한 영광의 길을 걸었던 세종의 그것과는 정 반대의 길을 걸었다. 그는 철저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통해 동생의 '조선' 을 밝게 빛냈다. 세자에서 대군으로 강등 되며 모든 것이 부정되어 버린 상황에서 그에게는 어떠한 역할도 주어지지 않았다. 양녕대군에게는 왕실 종친으로서의 '권위' 도 '명예' 도 존재하지 않았고, 그토록 원하던 '자유' 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살아가는 것', 그 뿐이었다.


이렇듯 상왕인 아버지와 임금인 동생을 둔 '조선' 이라는 나라에서 양녕대군은 홀로 희대의 불운아로 전락했다. 누구보다 불행한 삶을 산 양녕대군이 불운의 원인 제공자인 세종에게 불만을 품지 않았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이다. 비록 그와 세종의 우애가 깊었다고는 하나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권력 구도' 재편 과정에서 파생된 희생자와 쟁취자로 구분 지어졌다. 그것이 우애 깊은 형제가 겪어버린 권력의 비정함이라면 비정함이었다.


세종은 양녕대군을 '형' 으로 각별하게 모셨지만 단 한번도 '왕실의 어른' 으로 우대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기행을 일삼았던 양녕에게도 원인이 있었지만 한 때 권력의 중심부였던 그를 견제하는 왕실, 조정 세력과 그것을 암묵적으로 인정했던 세종의 영향도 있었다. 세종에게 양녕대군은 언제나 보살펴 드려야 하는 형님이었지 왕실의 대표하는 종친은 아니었다. 이것이 또한 양녕대군의 불운이라면 불운이었다.


양녕대군은 자신의 명예 회복과 복권을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세종의 죽음' 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간파하고 있었다. 세종의 뒤를 이어 임금의 자리에 올랐던 문종이 오래지 않아 승하하고 12살 어린 임금인 단종이 즉위했을 때, 양녕대군은 비로소 자신의 '복권' 을 희망할 수 있게 됐다. 태종도, 세종도, 대비도, 대왕대비도 없는 왕실에서 '왕실의 최고 어른' 이라는 상징적 지위를 쟁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간의 명예 회복을 위해 양녕대군의 움직임은 대단히 적극적이고 치열하게 전개됐다.


양녕대군은 자신의 명예를 회복시켜 줄 인물로 어린 임금 단종이 아닌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으로 점찍었다. 양녕대군은 수양에게서 젊은 시절 권력의 주변부로 밀려나 좌절하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는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수양대군을 임금의 자리로 밀기 시작했다. 계유정난으로 시작 된 수양대군의 권력 장악 과정 속에서 양녕대군은 언제나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했다.


양녕대군은 계유정난을 통해 '영의정' 의 자리에 오른 수양대군에게 '즉위' 할 것을 간접적으로 종용했다. 양녕대군은 수양대군을 제외한 나머지 종친들, 특히 수양대군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안평대군의 사살에 동조했고 더 나아가 세종의 유일한 직계 후손인 단종의 제거에도 앞장 섰다. 가깝기로 따지면 단종과 양녕만한 관계도 없었지만 '명예회복' 을 향한 복권의 한(恨)은 그렇게 세종의 손자에게 칼날을 겨누었다. 복수로 따지자면 한없이 잔인한 복수였다.


세종이 무릎에 올려 놓고 성삼문과 신숙주 등에게 친히 "내가 죽더라도 잘 부탁한다." 며 어여뻐 했던 단종은 불과 10여년의 세월 만에 '큰 할아버지' 양녕대군의 '공세' 속에 죽음의 문턱에 다다르게 된다. 물론 단종을 폐위시키고 영월에서 죽이고 만 것은 세조(수양대군)와 그의 장자방이었던 한명회, 그리고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던 신숙주였지만 뒷배경에는 그 모든 것에 침묵했던 왕실 종친과 그를 위시한 양녕대군이 존재했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발한 금성대군, 혜빈 양씨와 같은 왕실 사람들은 모두 조용히 역사 속으로 사라질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양녕대군은 세종의 세 아들과 손자의 죽음을 목도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명예를 회복했다.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세조에게 묵묵히 뒷배를 봐주며 아낌없는 후원을 해준 양녕대군은 큰아버지의 이상의 존재였고 비로소 양녕대군은 왕실 최고 어른으로서 권위와 존경을 회복했다. 세자였던 형의 자리를 대신해 왕위에 올랐던 동생과 그런 동생을 바라보며 울분을 토할 수 밖에 없었던 형의 운명은 40여년 만에 그 후손들의 '죽음' 을 제물로 제자리를 찾게됐다.


이것이 바로 조선 최고의 성군 '세종대왕' 과 그의 형 '양녕대군' 이 맞이할 수 밖에 없는 역사의 비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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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홍균 2008.05.19 09: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단종폐위에 앞장섯던사람은 성삼문이 아니라 신숙주겠지요

  2. ㅡㅡ;; 2008.05.19 09: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알기로는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세종과 양녕대군은 지극히 우애가 깊어서 심지어 세종이 몰래 궁을 나가서 함께 술을 마실 정도였고 수십번의 양녕에 대한 탄핵이 있었지만 세종은 한번도 이를 수용하지 않았는데요... 제가 보기엔 님은 역사적 근거 보다는 상황을 보고 혼자 생각하시는 듯...

  3. 강원희 2008.05.19 09: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성삼문은 아니죠 애들이 보면 어쩌시려구 ^^

  4. JEN 2008.05.19 09: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를 볼때는 누구나 상황-fact-를 보고 유추하는 것이겠지요,, 어떤 일이든 마찬가지구요. 단, 당사자에게 확인을 못할 뿐.. 저도 글쓴 분과 비슷한 견해이긴 합니다. 아무리 양녕과 충녕이 사이가 좋았기로서니,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폐위되었다면 울분이 컸겠지요. 물론 세종에게 복수를 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지만 윗글처럼 종친으로서의 대접이 없었다면 그럴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그렇지만 세조를 즉위시키는데 힘을 쓴 이유는 복수라기보다는 조선을 위하는 마음이 더 컸을거라 봅니다. ㅎㅎㅎ

  5. 강철 2008.05.19 09: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맞습니다. 왕이라고해서 모든걸 할수 있는 조선시대가 아니였기에 수십번의 탄핵을 거부한것만도 그당시엔 정적에게 베풀수있는 아량이 아니지요. 게다가 세조시대엔 단종이 너무어려 왕권약화를 염려한 양녕의 행보가 세종에 대한 반감이라고 해석되기엔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왕실 최고의 어른으로써 그만한 정치적 결정은 당연하다고 보는데요. 다른성씨가 왕이되는것 보다는 그당시 가장 정치적입지가 탄탄했던 세조를 선택해서 왕권을 강화시키는건이 시급했던 거겠죠.

  6. 수양대군이나 단종이나 2008.05.19 11: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깝기로치면 수양대군이 더 가까운데요
    수양대군도 '대군' 이듯이 세종의 아들인데...

  7. 그닥... 2008.05.19 13: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양녕대군이 계유정란때 영향력을 행사했다는건 사실이지만, 그건 힘없는 어린 단종을 앞세워 정권을 휘두르려는 김종서랑...음...생각이 안나네요...힘있는 대신들한테 정권이 휘둘려 왕권이 유명무실해져서 였다고 알고있습니다..동생에게 왕위를 양보해서라도 일으킨 조선왕조인데 그렇게서라도 지키고 싶었겠죠...후에 수양대군(세조)는 단종을 죽인 일때문에 많이 괴로워했다고 하네요..자꾸 꿈에 단종이 나타나고 해서...물론 이것도 야사겠죠^^...그래서 일시적으로 불교를 중흥시켰다 하기도 합니다...암튼 양녕대군은 무척 똑똑했던 사람인것 같아요

  8. 치우 2008.05.19 14: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충분히 가능한 가설입니다.



    단종을 사사시키라 강력하게 주장한사람이 양녕대군이라고 합니다.

    더불어 말하면 글쓰신분의 펙트가 야사에 나오는 미담보다 더 역사적인사실에 더 맞을수도 있습니다.

    양녕의 양위미담은는 실록에 나오지 않고 후대의 야사에 나오는 것입니다.


    역사는 승자가 기록하는것 이므로 승자에게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부풀려지기 마련입니다. 단종 폐위사건이 그렇고 여러번의 사화와 광해군 폐위사건이 그렇습니다. 집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실권자들이 잘못했다거나 도전하는 세력이 역도였다고 기술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들이 실권할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세종으로 세자가 바뀌는 과정에서 극적인 정통성 부풀리기는 없습니다.



    그리고 세종대는 아직 성리학이 제대로 정착되어진 시기가 아닙니다.

    이제서야 중국에서 성리학이 들어와 조선사회에 뿌리내리기 시작하려한 시기입니다. 신권에 의해서 왕권이 좌지우지한 시기가 아닙니다. 후대인 조광조가 중앙정계에 진출하는 중종때 비로소 성리학의 나라로서 시작일 뿐입니다. 사대부의 대표가 왕이다라는 의식은 조광조 이후 좀더 성리학이 뿌리를 확실하게 내린 후대였습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명종의 후사를 직계가 아닌 중종대왕의 방계(직계는 왕비소생의 왕자들, 방계는 후궁소생을 일컬음.)인 영양군의 셋째아들인 하성군을 왕위에 올리면서부터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 수 있었습니다. 말그대로 왕을 선택하여 옹립한 모양세이기 때문입니다.

    이시기는 4번의 사화를 거치면서 사림의 세력이 중앙정계까지 진출한 시기입니다. 슬슬 붕당이 생겨나기 위한 토대도 마련된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미 왕의 혈통이 직계가 한번 끊긴 상황이고 왕인 선조조차도 자신의 방계혈통에 대해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습니다. 그결과가 변덕스러운 정치적 결정으로 나타났고요.


    이처럼 후대상황에서야 신권이 강화된 시기 이지만 세종조시대는 왕권이 신권에 압선 시기입니다. 그리고 세자의 자리에서 물러난이후 양녕대군은 정치와, 권력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엇습니다. 태종의 사후전이기에 태종의 의도적인 상황연출일수도 있습니다.

    후대의 세조의 종친의 등용에서 보더라도 철저한 외면에 가까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성씨가 왕이 되려는 움직임은 세종의 업적에 의해서 시도차제가 불가능했습니다. 왕조가 성이 바뀌는가장 큰 이유가 민심을 잃고 실정을 해야 가능한 상황에서 세종이 죽은지 겨우 5년이 지났을 뿐입니다.
    문종이 세종의 치세말년 중 10년 가까이 대리청정을 했고 임금의 역활을 잘 수행했습니다. 또한 세종의 많은 업적중에 문종의 세자시절 이룩한것도 많았습니다. 단지 몸이 병약하여 세종의 근심이 있었을 뿐입니다. 게다가 단종도 어려서부터 영특하기 이를데 없어서 세종이 많이 아꼈다고 합니다. 이런상황에서 다른 성씨의 반란은 생각할수도 없었습니다. 그런 시도자체가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미친짓에 지나지 않을 사건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세종의 형제들에 대한 지극 정성은 단지 양녕대군뿐 아니라 경녕군에게 까지 미쳐있습니다. 경녕군에 대한 세종의 극진함은 양녕대군보다 더하면 더해지 모자르지 않앗습니다. 임종전에는 특별히 경녕군 사후 대한 장례를 언급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후에 경녕군이 사망하면 대군에 버금가는 후한 장례를 치러주라는 유지까지 내렸을 정도입니다. 단지 우애가 아니라 부왕의 즉위과정에서 숙부들의 죽음을 접해왔고 왕권강화를 위해 외척을 모두 쓸어버리는 독한 모습 또한 보였기에 그런 모습이 안타까웠을 수도 있었습니다. 세종의 외가인 민씨일가 외숙부들이 모두 귀양가거나 사사되어 죽었고 세종자신의 처가 또한 부왕에 의해 멸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습니다.

    굳이 병약한 맏아들을 세자로 앉힌거에 대해서는 자신이 겪었던 상황과 오버랩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자신이 왕위에 오르기 전 세자의 교체에 있어서 조정이 분열되는 모습과 나라의 기틀이 잡힌 이상 이것을 이어가야 한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엇을 겁니다.

    더욱이 세자의 능력의 출중함이 병약함을 덮어버릴 정도였기에 뒤어나기도 했고, 문종이 그렇게 세상을 빨리 떠날줄은 상상도 못했을거라 봅니다. 둘째아들이 첫째아들에 뒤지지 않게 가지고 있는 왕제로써의 자질까지 생각한다면 우려스러운 부분이지만 둘째아들의 기질이 부왕인 태종의 기질에 닮아 있어서 혼란스러운 나라상황에서는 나라의 혼란을 정리할수 있을지 언정 안정된 나라에서는 혼란을 부추길수 있다는 측면도 고려되었을 겁니다.


    게다가 손자인 단종이 어려서 영특함을 보였기에 문종이 단종이 정치를 직접할 수 있는 나이(18세정도의 연령대)까지는 무난하게 자리를 보존할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문치중심의 정치적 안정과 장자로 연결되는 왕의 정통성등으로 충분히 왕권의 강화로 연결되는 것은 눈감고도 알수있는 상황이니 말입니다. 부왕인 아버지가 장자에게 왕위계승을 하려던 목적과도 부합되는 일이기도 하구요.



    단지 문종의 병약함이 세종의 예상을 뛰어넘었고, 둘째아들의 권력에 대한 욕심이 자신의 예상보다는 훨씬 위였다는 점. 그리고 문종이 관과한 사실은 왕권강화를 위해서는 왕실의 근간인 종친들의 흔들림이 없어야 하는데 그것을 사전에 신경쓰고 조정하지 못한 결과가 세조의 왕위찬탈이 아닌가 합니다.


    더불어 생각해보자면 세조가 단종의 완제로서의 능력의 표출을 기다리지 못하고 신하들에게 휘들리는 모습만을 보고 섣불리 양녕대군의 말만을 듣고 양위를 받은게 하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양녕대군이 복수하려고 한것은 아니겠지만 당시의 실권자들중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폐위때 젊은 관료들로 적극 찬동했던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에 자극을 받지 않았나 합니다.

  9. 작은인연 2008.05.19 15: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성삼문에 대한 코멘트가 자꾸 달리는데.. 내용을 제대로 읽어 보세요..
    단종을 무릎에 앉히고 부탁했던 신하가 성삼문, 신숙주고..
    배신했던게 신숙주죠..
    성삼문은 나중에 세조를 죽이려고 했던 사육신에 포함된 분이구요..

    글 쓰신분이 제대로 적으신거 맞습니다..

    성삼문..
    5살때인가 똑똑하다고 소문나서 세종이 불렀는데..
    상으로 무거운 비단을 주면서 어찌하나 보았는데..
    허리춤에 감고 끌고 갔다죠..
    엄청난 천재로 소문이 자자 했다는..
    삼문이라는 이름은..
    태어날때, 하늘이 낳았느냐, 낳았느냐, 낳았느냐 3번 물었다고 해서 삼문이랍니다...

    어릴때 읽었던 위인전이 생생하네요....

    • 나그네 2008.05.19 16:08  댓글주소  수정/삭제

      김시습이 어릴때 세종에게 불려가서 테스트 받았습니다. 성삼문은 아니예요,^^;;

  10. 지나가다 2008.05.19 16: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태종이 양녕대군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성격과 비슷하다는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과거에 했던 일을 또 일으킬까봐 걱정해서 물러나게 했다는 이야기인데요. 결국 같은 집안사람끼리 또 피를 불렀죠...
    뭐 양녕대군이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한 원인의 하나는 신하들에 대한 증오심 때문이란 이야기도 있습니다. 세종대왕이 즉위하고 양녕대군이 야인 생활을 할때 신하들이 양녕대군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여러번 건의 했다는 겁니다. 세종대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걸 안 양녕대군이 신하들을 무지 미워했고 너무 신하들에게 왕권이 흔들린다고 생각했다 합니다. 그래서 왕실을 강하게 만들 사람으로 수양대군을 생각해서 밀었다는 이야기인데 자신의 성격과도 비슷한데가 있어서 더 호감을 갖게 되었다 하죠.

  11. 글세요 2008.05.19 16: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깝기로 따지면 단종과 양녕만한 관계도 없었지만 '명예회복' 을 향한 복권의 한(恨)은 그렇게 세종의 손자에게 칼날을 겨누었다. 복수로 따지자면 한없이 잔인한 복수였다."
    는 표현에 동의하기 어렵군요

    가깝기로 따지면(촌수로 따져봐도) 수양이 더 가깝지, 결코 단종이 가까울수는 없구요
    왕실의 어른역할은 양녕보다 더 어른이 생존하지 않았기때문에 자연스럽게 왕실의 최고어른이 된 것이지, 의도적으로 복권을 노려 결국 왕실의 어른 역할을 하게되었다는 논리는 넘 비약인 것 같습니다.

  12. 2008.05.19 16: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느정도 신빙성이 있다고 봅니다. 계유정난 뒤에 양녕이있었다는 건 어느정도 사실이기도

    하구요.. 자기 명예회복이니 뭔지는 모르겠지만 양녕대군이 가장 사랑한 조카는 자기와

    거의 흡사한(다른게 말하자면 자기 아버지 태종과 흡사한) 수양대군이였다고 하죠. 단종

    즉위와 신권의 강성화로 인한 혼란을 보고 아마 수양대군을 뒤에서 밀었겠죠.... 복수라고

    하긴 뭐하지만 가장사랑한 조카에게 왕위를 주고 싶은 마음이였을지도 모르죠

  13. 멍멍 2011.08.12 05: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른 건 모르겠으나 우선 세조실록에 양녕이 단종을 처단하라고 세 번이나 건의한 항목이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