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백]이 그야말로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이야기의 중심도 없고, 줄기도 없고, 줏대도 없다. 써 갈기는대로 만드는 느낌까지 든다.
그나마 사택비 오연수가 살아있을 때는 선악구도의 갈등이라도 살리더니 오연수 하차 이후에는 보잘 것 없는 스토리만 난무하고 있다.
그 중에 가장 어이없는 것이 바로 은고와 계백에 대한 의자왕의 질투다. 이해를 하고 싶어도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지금껏 [계백]이 그려온 의자왕은 야심가 중의 야심가였다. 굉장히 정치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었고, 때를 잡기 위해서 몸을 수그릴 줄도 아는 야망이 있는 사내였다. 오연수의 핍박과 괴롭힘 속에서도 때로는 바보처럼, 때로는 호색한처럼 살아온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상대방이 방심하고 있는 틈을 적재적소에 파고들어 무너뜨리려 했던 의자왕은 그래서 [계백]에서 가장 입체적인 인물이자, 정치적인 인물일 수 있었다.
그런데 사택비 퇴장 이 후, 의자왕의 캐릭터가 근간부터 흔들리고 있다. 그야말로 뜬금이 없다 할 정도로 정체성조차 가늠하기 힘들만큼 추락에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 그 대단한 야심가, 그 대단한 정치가는 어디가고 사랑에 흔들리고 여자 때문에 형제같은 계백을 질투하는 의자왕의 모습만이 그려지고 있다. 이야기의 중심을 도대체 어디에 둬야 하는지 모를 정도로 혼란 일색이다. 이런식으로 가다간 드라마고, 캐릭터고 모두 산으로 갈 지경이다.
의자왕이 은고에게 연정을 품는다는 설정 자체부터가 뜬금없지만, 그가 은고와 계백 사이를 질투하고 은근히 계백을 견제하고 있다는 설정도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의자는 지금껏 계백과 형제의 의를 맺어왔다. 계백이라면 목숨까지 내어줄 정도로 총애했고, 모든 신뢰를 다 쏟아부었다. 여기에는 계백의 아버지인 무진을 죽였다는 죄책감과 미안함이 묻어있었고 또한 계백의 뛰어난 능력에 대한 강력한 믿음 역시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토록 견고하게 그려졌던 의자와 계백의 사이가 고작 은고 하나 때문에 송두리째 흔들린다는 것 자체가 코미디 중 코미디다. 지금껏 그들 사이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사택비가 퇴장한 시점부터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의자-계백-은고의 삼각 관계가 시작됐다는 건 이야기를 끌고 가기 위한 제작진의 무리수라고 밖엔 생각되지 않는다. 갈등을 위한 갈등, 스토리를 위한 스토리는 드라마 제작에 있어 가장 경계해야 할 요소다.
물론 역사적으로 거사에 성공한 군주가 자신을 도운 공신들을 제거한 예는 수도 없이 많다. 한고조 유방이 한신을 죽인 일이나, 태종 이방원이 민무구 형제를 제거한 것이 바로 그것이라 하겠다. 허나 이들이 자신의 수족과 같은 공신들을 제거할 때는 그에 합당한 대의 명분이 존재했다. 왕권강화, 국가존립, 권력확보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계백]의 의자와 계백은 전혀 그런 관계가 아니다. 계백을 제거한다고해서 왕권이 강화되는 것도 아니고 국가를 확고히 존립시키는 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자멸 중의 자멸이다. 도대체가 왜 무왕이 계백 제거에 열을 올리고, 의자가 이에 동조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계백이 큰 전투에 승리하면서 백성들 사이에서 영웅이 됐기 때문에 무왕이 계백을 두려워했다는 설정도 우습기 짝이 없다. 애초부터 전투는 임금이 아닌 장군이 하는 것이다. 장군이 전투에서 이기는 것은 상찬의 대상이지 결코 처벌의 대상이 될 수 없을 뿐더러 이런 전투 하나로 흔들릴 왕위라면 차라리 깔끔하게 포기하는 게 낫다. 역사적으로 살펴봐도 임란과 같은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전쟁영웅의 등장은 오히려 왕권의 강화를 갖고 왔다. 세종 조 김종서 등이 4군 6진을 개척했을 때, 세종의 왕권은 가히 최고조에 달했다. 하물며 고구려-신라와 팽팽한 군사적 긴장감을 유지하던 삼국시대는 말할 것도 없다.
[계백] 제작진이 의자와 계백의 갈등과 반목을 극의 중심 스토리로 끌어올리고 싶었다면 적어도 시청자가 이 스토리를 이해할만한 명분은 만들어 내야 했다. 그런데 고작 그들이 한 것이라곤 은고에 대한 의자의 이해할 수 없는 소유욕과 질투가 계백을 경계하게 만들었고, 결국 무왕의 정치논리학적인 설득에 말려 들어가 계백과 점점 멀어지고 있다고만 이야기하고 있다. 이건 초등학생도 생각하지 않을 아주 유치하고 치졸한 구조다. MBC 대형 사극의 품위에 걸맞지 않다.
지금 [계백]에선 일관성 있게 그려지는 캐릭터가 단 하나도 없다. 무진과 계백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던 무왕은 어느새 아들인 의자에게 "계백을 제거하라!"며 소리치는 미치광이가 되어 있고, 대단한 야심가이자 정치가였던 의자는 여자 하나 때문에 국사를 그르칠 정도의 편협한 인간이 되어 있으며, 재능많고 용기 있던 계백은 줏대도 생각도 없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답답한 캐릭터에 머물러 있다. 매력있는 캐릭터가 하나도 없으니 드라마를 즐겁게 볼 기분이 나질 않는다.
지금껏 MBC 월화 사극은 나름의 탄탄한 스토리라인과 정체성을 지키며 높은 시청률을 기록해 온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다. [허준]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상도][대장금][주몽][이산][동이] 등이 모두 그러했다. 완성도의 높고 낮음은 있었을지언정 졸작은 없었고, 시청자 사이의 호불호는 있었을지언정 드라마의 중심이 흔들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2011년 [계백]만큼은 MBC 월화 사극 라인의 최대 오점을 남기고 있다. 변명의 여지조차 없는 참패 중의 참패다.
최근 MBC는 [계백] 후속작의 준비를 위해 [계백]을 10회나 연장한다는 방안을 발표했다. 캐릭터도, 스토리도 없는 이 드라마를 무슨 수로 10회나 더 연장한다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10회를 늘리는게 아니라 10회를 빨리 끝내는 한이 있더라도 이 형편없는 사극이 당장 TV에서 떠나게 하는 것이 시청자를 진정으로 위하는 길일터다. 어이없는 의자왕과 줏대없는 계백, 갈팡질팡 은고와 미치광이 무왕 사이에서 시청자는 방황하고 있다. 이제 그들 스스로 마침표를 찍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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