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한반도]까지 무너졌다.


TV 조선의 야심작이자, 종편 최고의 기대작이라 일컬어지던 드라마 [한반도]가 결국 낮은 시청률을 견디지 못하고 조기종영을 결정한 것이다.


[한반도]를 통해 자신있게 TV 복귀를 선언한 황정민과 김정은 역시 꼴이 말이 아니게 됐다. 마의 2% 시청률은 물론이고 1%대 시청률도 지켜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 때, 대한민국 미디어 사업을 획기적으로 바꿔 놓을 것이라며 자신만만해 하던 종편의 장밋빛 구상은 불과 3개월만에 휴지조각이 되어 버렸다. 전체 평균 시청률은 0.5% 대를 벗어나지 못했고, 기대작들은 줄줄이 1%대 시청률을 기록하며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다. 시청자들이 유입되지 않으니 광고 사업 역시 원활하지 못하다. 종편 4개사는 지난 100일동안 무려 1000억원의 적자를 본 것으로 알려져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악순환은 계속되고 적자폭은 더 커져간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최근에는 '종편 매각설' 까지 돌고 있다. TV 조선이 CJ 측에 7000억 매각제의를 했다가 단번에 거절 당했다는 소리가 들린다. 저조한 시청률에 벌써부터 백기를 들고 항복하는 모양새다. 항간에는 "노무현도 하지 못한 조중동의 패망을 이명박이 종편 하나로 해결했다" 는 우스갯 소리까지 나온다. '방통대군' 최시중을 움직여 미디어 장악의 일환으로 시작한 종편 사업이 오히려 '같은 편' 조중동의 애물단지로 전락시키고 말았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종편 출범과 함께 종편 드라마 및 시트콤 등에 출연 계약을 맺은 스타들 역시 사면초가의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네티즌들의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어렵사리 결정한 종편 출연인데 시청률, 작품성 뭐 하나 제대로 건진 것 없이 자존심만 구기게 됐다. 잘해봤자 1%, 못하면 0% 시청률이 나오는 종편 드라마 성적은 공중파 시청률에 익숙한 톱스타들에겐 받아들이기 힘든 성적표다. 그야말로 '종편의 저주' 라고 할만큼 처참한 결과인 셈이다.


그렇다면 '종편의 저주'를 받은 톱스타들은 과연 누가 있을까.


우선은 JTBC [빠담빠담]의 정우성, 한지민, 김범 등을 들수 있다. JTBC가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빠담빠담]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종편 4개사 중 그나마 '선방'했다는 것이지 절대적인 수치가 만족스럽다는 건 아니다. 톱스타 정우성, 한지민, 김범 등을 캐스팅 해 놓고 고작 1%대 시청률을 기록했다는 건 창피하기 그지 없는 일이다. 이지아 파문을 견뎌내고 의욕적으로 드라마에 출연한 정우성은 물론이거니와 [꽃보다 남자] 이 후, 하염없이 슬럼프를 겪은 김범에게조차 [빠담빠담] 출연은 그리 좋은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사극 [인수대비]의 채시라, 함은정, 김영호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사극 [인수대비]는 JTBC가 [빠담빠담]과 함께 '야심작'으로 만들었던 작품 중 하나로 만고불변의 흥행 소재인 세조와 인수대비의 이야기를 다룬 정통사극이다. 특히 1999년 KBS [왕과 비]에서 인수대비로 열연했던 채시라가 다시 인수대비 역을 맡았고, [왕과 비]의 작가 정하연 씨가 그대로 극본을 맡으면서 기대감을 한껏 높이기도 했다. 당시 [왕과 비]는 최고 시청률 44.4%를 기록한 최고 인기 드라마였고 채시라는 이 드라마를 통해 연기대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채시라-정하연 콤비조차 종편의 저주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인수대비]의 시청률은 1% 언저리를 맴돌고 있을 뿐 하등 반전의 기회조차 마련하고 있지 못하다. 채시라가 전면에 등장해 극을 이끌어가고 있지만 시청자들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하다. '흥행불패' 채시라가 이럴 정도니 채시라의 아역을 맡았던 함은정, 세조로 열연한 김영호는 오죽 했겠는가. 그들은 별반 큰 활약조차 하지 못한채 머쓱하게 퇴장하는 굴욕을 당했다. 안좋은 소리를 무릅쓰고 13년만에 인수대비로 리턴한 채시라의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 갈만 하다.


JTBC [아내의 자격] 김희애, 이성재의 상황 또한 심각하긴 마찬가지다. 김희애가 누군가. 자타공인 브라운관 최고의 흥행 메이커 아닌가. [폭풍의 계절][사랑과 결혼][아내][완전한 사랑][부모님 전상서][내 남자의 여자][마이더스] 등 김희애가 출연한 작품 중 실패한 작품을 찾는게 더 빠를 정도로 그녀의 드라마그래피는 화려하다 못해 휘황찬란할 지경이다. 그런데 '천하의' 김희애도 종편에서는 힘을 못 쓰고 있다. 흥행 불패라는 말이 부끄러워질 지경이다.


종편 최초의 불륜 드라마라는 이슈에도 불구하고 [아내의 자격]은 마의 2%대 시청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재방에 삼방까지 거듭하고 있지만 1% 중반 시청률에서 지지부진이다. 김희애 연기 인생에서 이 정도로 최악의 시청률을 기록한 작품은 찾기 힘들 정도다. 김희애도 김희애지만 이성재의 입장은 더 불쌍하다. 최근에 흥행작이 전무할만큼 흥행 슬럼프를 겪고 있는 이성재는 [아내의 자격] 출연으로 아예 바닥을 찍은 모양새다. 종편 출연에 큰 기대를 걸었던 이성재는 예상외의 낮은 시청률에 크게 실망 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남동생' 유승호 역시 종편의 저주를 벗어나진 못했다. 작년 한해 [무사 백동수]로 성인 연기자로서 성공적인 데뷔 신고식을 치룬 그는 차기작으로 TV 조선 [프로포즈 대작전]을 선택하는 모험을 했지만 받아 든 성적표는 형편이 없다. 1% 시청률은 고사하고 0% 시청률 언저리에서 답보상태에 머무르고 있다. 성인 연기자로서 좋은 커리어를 쌓아야 하는 유승호로선 하루 빨리 [프로포즈 대작전]을 끝내고 좋은 공중파 드라마로 컴백해야 할 것이다.


국민남동생도 무너진 마당에 '국민 엄마'라고 무사할까. JTBC [청담동 살아요]로 생애 최초 시트콤 출연을 결정한 김혜자는 저조한 시청률로 의기소침해 있을 뿐 아니라, 드라마 출연 도중 터진 세금 탈루 혐의로 큰 곤욕을 겪었다. [엄마가 뿔났다]로 40%대 시청률을 기록하며 '엄뿔 신드롬'을 일으켰던 과거의 영광은 잿빛 현실로 뒤바껴 버렸다. "좋은 작품이니까 종편이니 뭐니 생각안하고 출연했다" 던 김혜자의 공언이 무색해져 버리는 순간이다.


채널 A [불후의 명작]에 출연한 박선영, 한재석 역시 시청률에서 고배를 마셨다. 작품성 면에서 상당한 호평을 받고 있지만 시청률은 고작 0.6%. 채널 A는 물론이거니와 박선영, 한재석 역시 시청률을 보고 아연실색 할만 하다. 박선영, 한재석 뿐 아니라 지난 시간동안 당대의 연기파 배우로 군림한 고두심 역시 고개를 들 수 없게 됐다. 시청률 저조 때문인지 채널 A는 이 드라마의 처우를 놓고 매우 고민하고 있다고 한다.


허나 가장 큰 곤욕을 치룬 것은 역시 종편 최초 드라마 '조기종영'의 오욕을 쓰고 만 [한반도]의 황정민, 김정은일 것이다. 연기파 황정민과 드라마의 여왕 김정은을 데려다 놓고 기록한 시청률은 고작 1%. 게다가 6회나 줄여 조기종영을 통보하니 큰 마음 먹고 종편에 출연한 황정민-김정은 모두 자존심을 '팍' 구겼다. 공중파 드라마에 출연했다면 못해도 10% 중반의 시청률은 자력으로 낼 수 있는 배우들이 종편이라는 벽에 가로막혀 제대로 힘 한 번 쓰지 못하고 무너져 버린 셈이다.


이처럼 지금의 종편 드라마는 톱스타들의 '무덤'이라고 불릴 정도로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출범 할때만 해도 막강한 자금력으로 톱스타들을 끌어들일 수 있었지만,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스타들의 종편 기피 현상은 날이 갈수록 심각해 질 것으로 보인다. 스타들의 출연 기피가 계속되고 광고 역시 떨어져 나가기 시작하면 종편의 앞날은 더더욱 '암울'해 질 것이다. 그야말로 설상가상, 엎친 데 덮친 격, 사면초가의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출범 100일만에 종편 4개사는 '부도설'에 시달릴만큼 최악의 상태에 내몰리고 있다. 아무런 준비없이 성급하게 시작한 방송사업이 오히려 부메랑이 되어 날라오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 방법은 하나다. 소수점 셋째자리까지 세어야 겨우 시청률을 계산할 수 있는 '아무도 안 보는' 방송사가 무슨 이유로 필요하겠는가. 조중동은 당장 종편 사업에 손을 떼고, 매경 역시 본분의 뉴스채널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일 것이다.


그렇게 하기 싫다면? 부도처리 될 때까지 막대한 부채를 떠안으며 망하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게다가 2012년 총선과 대선으로 정권까지 바뀌어 버리면 믿음직한 정부의 지원마저 끊기게 될 것이니 참으로 그 모습이 볼 만 할 듯 싶다. 종편이 스스로 백기 투항을 하든, 패망의 길로 들어서든 그 어느 쪽도 상관없다. 어차피 결론은 정해져 있다. 종편의 실험은 '실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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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편이 본격적으로 '드라마 승부수'를 띄운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성과를 내고 있는 작품이 바로 드라마 [인수대비]다.


일찌감치 채시라의 차기작으로 주목을 받은 이 드라마는 [왕과 비]의 정하연 작가가 극본을 맡고,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의 이태곤 PD가 연출을 맡아 jTBC의 '간판 드라마'로 그 입지를 확고히 굳히는 중이다.


허나 이 드라마의 의도적인 '역사 왜곡'은 불편하다 못해 속이 상할 지경이다. 특히 문종에 대한 지나친 폄하는 도가 지나치다는 느낌까지 든다.


드라마 [인수대비] 속 문종은 철저히 나약하고 무능한 군주로 그려진다. 양녕대군이 면전에 대고 "효도 빼놓고 한 게 뭐가 있느냐"며 타박할 정도다. 그 스스로도 동생인 수양대군 앞에서 "임금은 나 말고 수양 네가 되어야 한다"고 하기도 하고, "나는 효도 빼곤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라며 자책하기도 한다. 야심만만하고 진중한 수양대군과 비교하면 문종의 이미지는 더욱 초라하고 보잘 것 없어진다.


허나 이건 명백한 왜곡이다. [인수대비]가 수양대군을 위시한 계유정난 세력 즉, 쿠데타 세력에 더 우호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라 할지라도 문종의 캐릭터를 이런 식으로 형편없이 그리는 건 그 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문종이 그토록 무기력하고 무능한 왕이었다면 2년 3개월의 짧은 치세에 백성들이 혀를 깨물고 죽을 정도로 비통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종은 조선 왕조 역사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능력을 지닌 성군이었다. 아버지 세종대왕의 치세를 지척에서 지켜봤던 그는 왕세자 시절부터 철저한 '군왕교육'을 받으며 임금이 갖춰야 할 기량과 자세를 배워나갔다. 아버지인 세종대왕이 "왕세자가 가히 성군의 자질이 있다"고 칭찬할 정도로 문종의 재능은 비범한데가 있었다.


특히 그는 세종 24년부터 병으로 앓아 누운 세종을 도와 '대리청정' 즉, 왕세자로서 섭정을 하기 시작했다. 그 때 문종의 나이 불과 29살이었다. 세종 18년부터 알게 모르게 세종의 정치 활동을 지원했던 문종이 세종 24년에 이르러 드디어 정치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세종 말년의 그 빛나는 업적들은 실상 세종과 문종이 함께 일궈낸 세종-문종 공동정부의 치적이라 할 만하다.


세종은 이 섭정 기간동안 문종으로 하여금 왕처럼 남쪽으로 향해 앉아 조회를 받게 하는 한편, 일부 국가 중대사를 제외한 모든 서무를 모두 문종에게 일임했다. 약 8년여에 걸친 이 대리청정의 기간동안 문종은 모든 일을 빈틈없이 수행하고 꼼꼼하게 처리하여 대소신료들의 찬사를 받았고, 국가의 기틀을 튼튼히 하는 한편 아버지 세종에게도 효도를 다하는 등 완벽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했다.


또한 문종은 아버지인 세종대왕보다 더욱 학문을 좋아했던 '문왕 중의 문왕'이었다. 그는 대소신료들을 모아놓고 토론하기를 좋아했으며, 한 번 손에 잡은 책은 다 읽을 때까지 놓지 않을 정도의 독서광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언론의 자유로운 감시와 비판을 수용하는 등 언관에 관대한 정치를 펴 일을 처리하는데 있어 쓴 소리를 듣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런 그의 숭문적 경향과 친 언론적 자세는 직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았다. 그는 6품 이상의 신하들에 대해 돌아가면서 왕을 만나는 것을 허락했고 삼정승을 비롯한 고위 관료들 뿐 아니라 벼슬이 낮은 신하들의 의견까지 두루 들으려 애썼다. 문종은 신하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즉시 이를 기록하는 습관이 있었고, 대리청정 시절에는 이러한 의견을 종합하여 세종에게 건의하는 등 국가 경영 정책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뿐 아니라 그는 직접 측우기 제작에 뛰어들 정도로 천문, 역수 및 산술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글씨 또한 명필이었다. <동국병감><고려사절요><고려사><대학연 의주석>등의 편찬도 모두 문종의 치세에 이뤄진 일이며 보다 효율적인 군사 활용이 가능한 12사 군제 개혁안을 출범시킨 것도 그의 업적이다. 말 그대로 문종은 세종만큼이나 문무에 모두 능통한 당대의 명군이었던 셈이다.


다만, 그의 약점 한 가지는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너무 빨리 세상을 떴다는 점이다. 어린 아들인 단종을 홀로 남기고 서른 아홉의 젊은 나이에 승하하는 바람에 조선조는 골육상쟁의 피바람에 휩싸이게 됐고 결국은 계유정난, 단종폐위 같은 역사의 비극 또한 벌어졌다. 문종이 10년만 더 살아 있었더라도 아마 단종은 안정적으로 국가 운영의 바통을 이어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허나 '빨리 세상을 떴다'는 죄목 하나 때문에 문종이 이토록 유약하고 무능하게 그려지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실제 문종은 드라마 [인수대비]처럼 무기력한 임금이 아니었을 뿐더러, 큰 아버지인 양녕대군에게 "할 줄 아는 건 효도 밖에 없다"고 꾸지람을 들은 적도 없다. 적어도 문종 치세는 조선왕조에서 가장 안정적인 태평성대였고 학문과 과학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은 아름다운 시기였다.


드라마 [인수대비]는 문종의 무능력함을 자꾸만 부각시켜 수양대군 세력의 '쿠데타'를 정당화 하는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다. 드라마 [인수대비]가 궁극적으로 설파하고자 하는 것은 쿠데타 세력의 유능함과 그 속에서 태어난 걸출한 여성정치인의 존재감이다. 이는 마치 현실정치에서의 쿠데타 세력(박정희 정권)과 여성정치인(박근혜)을 빗댄 듯한 뉘앙스를 자아낸다.


허나 세조의 계유정난은 어떤 명분을 갖다 붙여도 명백한 왕위 찬탈이었으며 국가 체제를 뒤집은 쿠데타였다. [인수대비]가 노리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는 바 아니나 이런 식으로 쿠데타를 옹호하는 것은 옳지 않을 뿐더러 하늘에 계신 문종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내가 아마 문종대왕이었다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꾸짖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이제 드라마 [인수대비]가 보기에도 민망하고 부끄러운 역사 왜곡은 제발 그만두길 바란다. 드라마로서 최소한의 품위와 교양은 지키고 있는지, 그대들의 양심에 손을 얹고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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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의 남자]가 클라이막스를 향해 치달아 가고 있다.


사육신의 반란과 세령의 반항에 점점 더 평정심을 잃어가고 있는 세조의 모습과 그에 대항하는 김승유 집단의 단종복위계획이 구체화 되면서 갈등이 고조 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22일 방송분에서는 세조의 맏아들인 의경세자가 병에 걸려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장면이 방송됐다.


세령은 이를 두고 아버지인 세조에게 "당신의 업보를 자식들이 받아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라고 일갈한다. 그렇다면 세령의 말처럼 세조의 자식들은 정말 일찍 죽었을까?


세조는 정비인 정희왕후 윤씨에게 2남 1녀를, 후궁인 근빈 박씨에게 2남을 두어 총 4남 1녀를 두었다. 여기서 세령 캐릭터의 모티브가 된 세희공주까지 합치면 4남 2녀다. 그렇다면 생몰년이 미상인데다가 여전히 실존 여부를 두고 말이 많은 세희 공주를 제외한 나머지 세조의 자식들은 몇 살에 세상을 떠났을까.


우선 세조의 맏아들인 의경세자(훗날 추존왕 덕종)은 20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해서에 능하고 영민하다 알려졌으나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던 그는 계유정난 이 후, 더욱 건강이 나빠져 병상에 눕는 일이 잦았다. [공주의 남자]에서는 의경세자가 아팠다는 사실을 세조가 뒤늦게 알게 되는 것으로 그렸는데, 사실 세조 부부는 맏아들인 의경세자의 건강 때문에 애초부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다 단종폐위사건을 전후해 극심한 죄책감과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한 의경세자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얼마 되지 않아 숨을 거두게 된다. 의경세자는 꿈 속에서 자주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 권씨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에게 의경세자의 혼을 현덕왕후의 귀신이 데리고 갔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이 소문에 격분한 세조는 현덕왕후를 폐위시키고 그녀의 무덤을 파헤치는 패륜을 저질렀는데, 이는 시동생이 형수의 무덤을 파헤친 것으로 강상과 윤리를 치도의 근본으로 삼는 조선의 예법상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를 사료해볼 때 당시 세조가 의경세자의 죽음에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헤아려 볼 수 있다. 의경세자의 부인은 그 유명한 인수대비(소혜왕후) 한씨이며, 그의 둘째 아들은 성종이다. 그는 훗날 덕종임금으로 추존된다.


세조의 둘째 아들은 예종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의경세자와 마찬가지로 잩은 병치레로 세조 부부의 애간장을 태웠던 그는 재위 1년만에 19살의 나이로 갑자기 승하했다. 모후인 정희왕후 윤씨조차 "주상의 병이 이토록 심각한지 몰랐다"고 경악할 정도로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허나 그가 재위 시절 내내 발바닥과 엉덩이에 난 종기로 크게 고생했고, 마땅한 치료법이 없어 밤잠을 설치는 일이 많았던 것으로 볼 때 예종의 승하는 어느 정도 예견되어 있었던 일이 아닌가 싶다.


예종이 너무 이른 나이에 흉서하자 많은 백성들은 또 다시 "세조의 업보를 자식들이 대신 받는다"며 두려워했다. 당시 백성들의 인식과 달리 최근 몇몇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예종을 둘러싼 정치역학관계를 두고 예종 독살설 또한 주목을 받고 있다. 예종의 형수이자 의경세자의 부인이었던 수빈(훗날의 인수대비)한씨는 사돈이었던 한명회, 대훈신 신숙주와 결탁해 자신의 둘째아들인 자을산군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종의 죽음은 필수적이었다. 결국 수빈은 훈구파를 움직여 예종을 정치적으로 압박하는 한편, 시어머니 정희왕후를 제 편으로 포섭해 든든한 왕실세력의 뒷받침을 얻어냈다. 끊임없는 정치 공격과 남이-귀성군으로 대표되는 신진세력의 몰락 등으로 큰 충격을 받은 예종은 가뜩이나 좋지 않았던 건강이 더 악화되었고 곧 숨을 거뒀다.


이를 두고 김인호 교수는 "결국 예종의 세력은 훈구세력을 등에 업은 인수대비의 세력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리하여 예종은 '암살'이라는 여운을 남기며 요절하였고, 자신의 아들이 아닌 인수대비의 둘째아들 성종에게 왕위를 넘길 수 밖에 없었다" 고 평가했다. 어찌되었든 예종 역시 열 아홉이라는 짧디짧은 생애를 마치고 간 비운의 임금인 셈이다.


세조의 두 아들과 달리 유일한 딸이었던 의숙공주는 비교적 오래 살았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일 뿐, 의숙공주가 숨을 거둘 당시 그녀의 나이는 고작 33살이었다. 정인지의 아들인 정현조의 부인으로 들어갔던 의숙공주는 결혼 이 후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되어 오랜 시간동안 병치레를 하다 숨을 거두었다. 게다가 그녀는 여자로서 단 한명의 아이도 생산하지 못한 석녀였다. 여성으로선 불행하기 짝이 없는 운명이었다.


후궁인 근빈 박씨에게서 얻은 두 아들 역시 요절한 것은 마찬가지다. 형인 덕원군의 생몰년은 미상이나, 둘째인 창원군은 28살 한창 나이에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로써 세조의 아들들은 30살이 되기 이전 모두 세상을 떠난 셈이 됐고, 특히 정비인 정희왕후 윤씨에게 얻은 두 아들은 모두 20살을 넘기지 못하고 요절했다. 단종을 죽인 업보요, 현덕왕후의 복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이른 죽음이었다.


신기한 것은 세조와 함께 계유정난-단종폐위를 주도했던 1등공신 한명회의 자식들 역시 대부분 빨리 요절했단 사실이다. 한명회는 셋째 딸과 넷째 딸을 각각 예종과 성종에게 시집 보내 두번이나 자신의 집안에서 왕비를 탄생시켰지만 그녀들은 모두 채 스물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운명이었다. 예종비 장순왕후는 17세의 나이에 산후병에 걸려 승하했고, 그가 낳은 해양대군도 14개월 만에 운명을 달리했다. 성종비 공혜왕후 역시 19세의 나이로 후사 없이 승하했으니 한명회로선 통탄할만한 노릇이었다. 그야말로 '천벌'이라 할 만했다.


신숙주 역시 생전에 자식을 잃는 슬픔을 겪었다. [공주의 남자]에서 세령-승유와 삼각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신면이 바로 그다. 신면은 세조조의 대표적인 반란이었던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다 반란 세력에게 무참히 살해당했다. 당시 신숙주는 이시애가 퍼뜨린 헛소문 때문에 반란세력으로 지목당해 옥살이를 하던 중이었다. 말 그대로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자식을 잃은 것이다.


이처럼 세조와 측근들의 자식들은 정말 부모의 '업보'를 떠맡은 냥 너무 빨리, 너무 비참하게 세상을 떠났다. 세조가 말년에 정신병에 걸리고 건강이 악화되는 등 고생을 한 것도 자식들의 요절에 의한 상처가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김종서, 안평대군, 금성대군 등 희대의 권신과 왕족들을 모두 죽이고 피로써 차지한 왕위였지만 세조 역시 인간적인 죄책감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었던 셈이다.


세조와 그 자식들은 정말 [공주의 남자] 속 세령의 말처럼 "세조의 업보를 지고" 저승으로 끌려간 것일까. 문득 하늘의 지엄함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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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의 남자]가 날이 갈수록 재밌어지고 있다.


문종 승하와 함께 수양대군과 김종서의 2라운드가 시작된 가운데 김승유와 세령, 그리고 신숙주의 아들인 신면이 삼각관계를 형성할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


극 중 수양대군은 신면을 가리켜 자신의 딸인 세령에게 너와 정혼을 할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이 쯤에서 궁금해진다. 과연 실제 역사 속 수양대군은 신숙주와 사돈을 맺었을까
.



수양대군과 신숙주의
사돈관계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실이 아니다. 이는 드라마의 픽션일 뿐, 실제 역사 속 수양대군의 딸이 신숙주의 아들에게 시집간 일은 없다. 수양대군의 딸은 의숙공주 하나 뿐 이었는데 의숙공주는 신숙주의 아들이 아닌 정인지의 아들인 정현조에게 시집갔다가 후사 없이 요절했다. 의숙공주 뿐 아니라 수양대군의 자식들은 대부분 요절했는데 도원군(훗날 추존왕 덕종)과 예종이 그러했다.


아마 [공주의 남자]에는 나오지 않을 것 같지만 수양대군의 진짜 사돈은 신숙주가 아닌 최측근 한명회였다. 훗날 세조가 된 수양대군은 자신의 손자인 자을산군과 한명회의 막내 딸을 혼인 시켰고 공식적인 사돈관계가 됐다. 자신을 왕위로 밀어올린 공신들을 가족처럼 대했던 세조이지만 실질적으로 진짜 인척관계를 맺은 것은 장자방 한명회가 유일했다. 한명회에 대한 세조의 신임이 어땠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부분이다
.


한명회의 막내 딸과 결혼했던 세조의 손자 자을산군은 훗날 성종이 되었으니 한명회는 세조와 사돈관계를 맺음으로써 임금의 장인이라는 명예로운 자리까지 확보하게 된 셈이다. 그의 막내 딸 공혜왕후 한씨는 후사 하나 없이 어린 나이에 요절했으나, 한명회를 신임했던 성종은 그를 오랜시간 중용했고 성종의 할머니와 어머니인 정희왕후와 인수대비 역시 그에 대한 신뢰를 져버리지 않았다
.


특히 성종조 초기에 어린 성종을 대신에 수렴청정을 한 정희왕후는 자신의 수렴청정을 뒷받침 할 제도적 방법으로 원상제를 도입해 한명회, 신숙주 등에게 국가 권력의 대부분을 의지했으니 한명회로선 왕실에 딸을 바치고, 권력을 얻은 셈이 됐다. 모르긴 몰라도 공혜왕후가 천수를 누리며 자식까지 낳았더라면 한명회의 부귀영화는 대대손손 계속 되었을 것이다
.


그렇다면 과연 신숙주의 사돈은 누구였을까. 재밌게도 신숙주 역시 한명회와 사돈을 맺었다.


신숙주는 여덟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 맏아들인 신주가 한명회의 첫째 딸과 혼인했다. 이 결혼 또한 세조가 적극적으로 나서 성사된 것이다. 세조는 당대 최고 권신이자 참모들이었던 한명회와 신숙주를 혈연으로 맺어둠으로써 혹여 자신도 모르게 벌어질 반란의 싹을 애초에 잘라버리려 했다. 이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한명회와 신숙주는 죽는 그 날까지 세조 일족에 충성을 다했다
.


사돈관계로 맺어진 신숙주와 한명회는 부귀영화와 정치적 고비를 함께 겪어 넘으면서 둘도 없는 친구사이로 발전했다. 세종조부터 집현적 학자로서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던 신숙주와 칠삭둥이 경덕궁지기 였다가 벼락 출세길을 걷게 된 한명회는 얼핏 보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으나 세조를 위시한 쿠데타 세력이라는 명분은 그들을 운명공동체로 만들었다. 신숙주와 한명회가 주고받은 여러 편지에는 개인적인 친분 관계를 넘어 혈맹에 가까운 우정이 느껴진다
.


[공주의 남자]와는 달리 실제 역사 속 세조와 신숙주는 직접적인 사돈관계를 맺진 않았다. 그러나 한명회를 중심으로 한 그들의 관계는 사돈관계 그 이상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세조는 신숙주에게 항상 나와 자준(한명회)이 사돈이고, 자준과 범옹(신숙주)이 사돈이니, 나와 범옹 또한 사돈이 아닌가.” 라고 말하곤 했다. 세조는 비대해진 공신 세력을 항상 두려워했고, 이 두려움을 공신 세력의 컨트롤 타워인 한명회와 신숙주와의 사돈관계를 통해 제거하고자 한 것이다
.


과연 드라마 [공주의 남자]는 실제 역사 속 이들의 미묘한 관계를 어떤 식으로 풀어나가게 될까.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니 김승유와 세령, 신면이 만들어 내는 비극적인 삼각관계에도 주목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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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추태후] 가 휘청 휘청거리고 있다.


2008년 12월 말부터 KBS가 사활을 걸었다고 할 정도로 열심히 '홍보' 한 보람도 없이 시청자 층이 이탈하고 있다.


첫 주 20%대에 가까운 시청률을 기록한 '거품' 이 빠지면서 채시라 투입 이후에도 시청률은 하락세만을 걷고 있다.


이 정도면 이제는 '국민배우' 급에 다다른 채시라의 선택치고는 실망스럽다 할 것이다.




사실상 배우 채시라는 '불패' 의 배우였다.


그래서 채시라하면 항상 따라 붙는 말은 "완벽함을 추구하는 흥행 불패의 배우" 라는 영광스런 꼬릿말이었다.


그만큼 채시라는 연기자로서 단 한 번도 대중과의 교감에 실패한 적 없는 불패의 배우였다. 몇 번의 삐걱거림은 있었어도 그것이 채시라의 드라마 그래피를, 더 나아가 채시라의 커리어에 상처를 주지는 못했고 그 삐걱거림조차 연이은 후속타의 대 성공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은폐하는 것이 바로 채시라였다. 채시라는 배우로서 자신을 어떻게 만들어 가야 하는지를 가장 잘 아는 천상 배우다.


시청률 '불패' 의 배우답게 채시라는 장르를 불문하고 항상 최선의 노력으로 최고의 결과를 이끌어냈다. 사극이면 사극, 시대극이면 시대극, 트렌디면 트렌디, 멜로면 멜로 채시라에게 불가능한 작품이나 영역은 없었고 작품 자체의 장르적 결함자체도 채시라를 만나게 되면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면서 채시라는 성장했다. 어떤 빈틈도 허용치 않는 완전무결한 청정함을 자랑하면서.


채시라는 '사랑스러운 배우' 는 아니었으나 '멋진 배우' 였다. 채시라의 등장은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채시라의 말 한마디는 사람들의 귀를 쫑긋 세우게 만든다. 좌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와 한 순간에 폭발시켜 버리는 과잉된 감정의 자의식을 채시라는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로, 배우로서 자신의 가장 큰 장점으로 사람들에게 각인시켰다.


[여명의 눈동자][아들과 딸][아들의 여자][아파트][애정만세] 등의 현대극을 거쳐 [왕과 비][해신][천추태후] 로 이어지는 사극에 이르기까지 채시라의 움직임은 언제나 대중과 언론의 관심을 받아 왔다. 그녀가 출연하는 드라마가 족족 신화가 되고 전설이 되는 것을 지켜 본 대중문화의 눈길은, 그래서 채시라에게 언제나 유별나게 주목했다. 


그런데 이번 [천추태후] 에 대한 대중의 사랑은 다소 냉담하다. 이것이 채시라 주연의 드라마 맞나 싶을 정도로 반응이 싱겁다. 방송 시작부터 스페셜 방송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연말 시상식에까지 등장시키는 노골적 홍보 활동에도 불구하고 [천추태후] 를 보는 시청자들은 그리 많지 않다. 어마어마한 제작비에 채시라라는 거물급 배우의 존재감도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기에는 역부족인 셈이다.


그렇다면 왜 [천추태후] 는 지금과 같은 삐걱거림을 지속하고 있는 것일까.


가장 큰 문제는 제대로 된 고증도 되지 못한 어설픈 역사의식과 그 역사 의식을 섣부르게 포장하려는 제작진들의 무모한 도전에 있지만 주연을 맡은 채시라에게도 적지 않은 문제가 있는 듯 싶다. 가장 실망스러운 것은 기존의 이미지를 극복하거나 전복시키는 도전이 발견 되지 않은채 현실 안주에 머물러 있는 '뛰어난 배우' 채시라의 현실이다.


지금껏 채시라가 성공가도를 달려 올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이미지를 매번 부정하고 전복시키는 도전을 망설임 없이 해 왔기 때문이다. [여명의 눈동자] 의 비극적 순정은 [아들의 여자] 에서의 팜므파탈로 변신했고, 그 팜므파탈은 [왕과 비] 에서 머리에 분칠을 하고 60대의 노역으로 변화했다.


위엄있고 고상하던 인수대비가 남편을 잃고 맞바람을 피는 [애정의 조건] 의 금파로 변하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답답하기만 했던 금파가 세상을 호령하는 [해신] 의 자미부인으로 변신하는데도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 뿐인가. 세상을 호령하는 독한 자미부인이 남편 때문에 오열하는 [투명인간 최장수] 의 부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본 대중은 그녀와 함께 눈물 흘렸다.


그런데 이번 [천추태후] 에는 그런 변신이 없다.


채시라 연기 인생 최초의 '무술연기' 가 가미 되었다고는 하지만 미미한 수준이고 [왕과 비] [해신] 에서 보여준 만큼의 열정적이고 강렬한 캐릭터도 발견하기 어렵다. 천추태후 자체가 시청자들에게 그리 매력있는 역사적 인물이 아니기도 하겠지만 캐릭터의 매력을 200% 발산해도 모자랄 판에 채시라는 기존의 이미지를 반복 재생산 하며 제자리 걸음만 반복하고 있다.


이 정도면 '흥행불패' '국민배우' 라는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채시라조차 마땅히 비판 받아야 한다. 변화해야 할 때 정확히 변화하지 못하고, 보여줘야 할 때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연기를 어찌 연기라고 하랴. 인수대비, 자미부인이라는 사극 역사 상 놀라운 여성 캐릭터를 창조해 낸 채시라가 겨우 이 것밖에 하지 못한다는 것은 매우 실망스러운 일이다.


이제는 채시라도 '알' 을 깨고 나와야 한다. 지금껏 '사극 전문' 이라고 할 정도로 파격적 연기를 선 보인 채시라지만 천추태후는 거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여걸이라는 캐릭터라는 것에서 진일보 하여 모성성과 남성성을 함께 가미한 새로운 캐릭터로 창출시켜야 한다. 채시라, 이제는 변해야 한다. 변하지 않은 배우는 퇴보할 뿐이다. 지금 [천추태후] 는 채시라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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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주에 방송 된 [전설의 고향] '귀서' 편이 아직까지도 시청자들의 찬사를 받고 있다.


[전설의 고향] 특유의 색깔을 포기하면서도 작품성과 재미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는 평인데 개인적인 생각으로도 지금까지 방영 된 [전설의 고향] 에피소드 중 스토리의 촘촘함으로 따지자면 이만한 작품이 없다고 본다.


특히 '귀서' 는 조선조 12대 임금인 인종의 독살설을 소재로 해 큰 관심을 받기도 했는데 인종 독살의 주인공이 계모 문정왕후 라는 사실은 더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과연 조선 왕조 500년 역사 상 왕실 여성에 의한 임금의 '독살' 은 실제로 있었던 것일까? 임금의 목숨줄을 움켜 쥐고 때로는 임금의 죽음을 진두지휘하고, 때로는 임금의 죽음을 기도하고 원했던 조선 왕조의 여인들. 왜 그녀들은 임금을 죽여야만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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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비가 되기 위해 시동생의 죽음을 기도한 여인, 소혜왕후 한씨



순종적인 며느리, 엄격한 어머니, 잔인한 할머니라는 세 가지 운명을 타고 난 소혜왕후 한씨는 성종조 '윤비 폐출 사건' 으로 연산군의 비극을 만들어 낸 격랑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여성이다. 우리에게는 '인수대비' 라는 이름으로 더욱 친숙한 그녀는 젊은 나이에 중전의 자리를 목전에 두고 세자였던 남편의 죽음 때문에 궐 밖으로 쫒겨 나와야만 했던 비운의 삶을 산 여인이기도 하다.


사실상 원론적으로 따지자면 남편을 잃은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궐 안으로 돌아올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둘째 아들을 임금의 자리에 올리고, 스스로 대비의 자리를 쟁취함으로써 궐 밖으로 나간지 불과 10여년 만에 화려하게 정치적 일선에 복귀했다. 그리고 그 험난한 '정치적 복귀' 의 뒷면에는 시동생 예종의 죽음을 싸늘하게 지켜봐야만 했던, 냉정하고 섬뜩한 정치적 함수관계가 숨겨져 있었다.


세조의 죽음 뒤, 당시 수빈이었던 인수대비는 자력으로 자신이 정치 일선에 복귀하는 것은 '불가' 하다고 생각했다. "중전은 못 되어도 대비는 되고자 했던" 그녀에게 남아있는 것은 바로 병약한 시동생 예종의 요절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허약했던 예종을 오랜 시간 지켜 본 그녀는 예종의 장수를 빌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죽음을 기도하고 재촉했다. 예종의 죽음이 곧 자신의 '부활' 임을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수빈(인수대비)는 사돈이었던 한명회, 대훈신 신숙주와 결탁해 예종을 정치적으로 압박했다. 그 결과 '세조 능묘 파문' (세조의 능묘를 석실로 하자는 수빈의 의견이 받아들여진 사건)이 일어났고 이것이 수빈에게는 결정적으로 정치적 일선에 복귀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수빈의 부활은 곧 예종의 추락이었다. 예종의 왕권은 궐 밖에 나가있는 형수에게조차 무시당하는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추락했고, 이런 정치적 타격은 그의 건강을 더욱 악화시켰다.


결국 건강이 갈수록 악화일로로 치달았던 예종은 크고 작은 정치적 상처들 속에 큰 소리 한 번 내보지도 못하고 재위 1년만에 죽음을 맞이했다. 예종의 모후였던 정희왕후조차 "주상의 병이 이토록 심했는지 감히 짐작조차 못했다." 고 할 정도로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김인호 교수는 예종의 죽음에 대해 "결국 예종의 세력은 훈구 세력을 등에 업은 수빈(인수대비)의 세력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리하여 예종은 '암살' 이라는 여운을 남기며 요절하였고, 자신의 아들이 아닌 수빈의 둘째 아들에게 왕위를 넘길 수 밖에는 없었다." 고 평가했다.


어쨌든 예종의 죽음은 수빈의 부활이었고, 곧 '궁궐의 제왕' 인수대비의 등장을 알리는 서막에 불과했다. 훈구세력을 등에 업고 시동생 예종의 죽음을 재촉했으며, 암살이라는 여운까지 남기며 자신의 둘째 아들을 왕위에 올렸던 그녀의 정치적 결단은 이렇게 시어머니 정희왕후의 권력욕과 사돈 한명회의 정치적 야심과 결탁하여 최선의 선택으로 자리했다.


'충효' 가 강요되던 조선 왕조에서 시동생이자 한 나라의 임금인 예종의 죽음을 바라보며 어쩌면 인수대비는 그 누구보다도 기뻐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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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비정한 계모, 문정왕후 윤씨



조선 왕조 두번째로 수렴청정을 하면서 그 어떤 왕실 여인들보다 막강한 위세를 누렸던 문정왕후 윤씨의 그 대단한 '권력' 의 이면에는 아들을 죽이고 권력을 쟁취해야만 했던 어머니의 무서운 야욕이 숨겨져 있다. 물론 문정왕후에게 죽임을 당한 인종은 문정왕후의 '친아들' 은 아니었지만 법적 관계로만 따지자면 인종과 문정왕후 만큼 가까운 사이도 없었기에 문정왕후에 의한 '인종 독살' 은 더더욱 충격적인 사건으로 받아 들여진다.



중종의 죽음과 함께 인종이 즉위하고, 인종을 위시한 '대윤' 이 정치판을 장악하자 대비였던 문정왕후는 인종을 죽이는 것을 통해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대윤 세력을 일거에 제거했다. 인종이 세자에 있을 때부터 동궁전에 불을 지르는 등 예종 암살에 열을 올렸던 문정왕후는 끝끝내 윤리와 강상이 치도의 근본이었던 조선 왕실의 한 복판에서 임금에게 독이 든 떡을 먹이는 것으로 자신의 위치를 보장 받을 수 있었다.



'인종 독살' 은 아직까지 확인된 바 없는 '설' 정도로만 전해지고 있지만 정황 상 문정왕후가 인종을 독살할 이유는 충분하다고 보여진다. 인종의 죽음은 그녀에게 궐 안에서 대적할 수 없는 왕실 최고의 어른임을 확인시켜 주는 동시에 수렴청정이라는 막강한 권력까지 안겨다 줄 수 있는 최고의 시나리오였다. 그리고 결국 문정왕후는 무시무시한 독살 계획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스스로 거행함으로써 일종의 정치적 쿠데타를 내부적으로 확실하게 매듭지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여걸의 자질이라 할 만 했다.



그러나 그 담대한 자질이 조선 왕조를 위한 대승적 결단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과 친아들의 지위 보장을 향한 '그릇된 모정' 에서 시작 되었다는 것은 대단히 아쉬운 일이다. 천수를 누린 문정왕후의 죽음 뒤에 훗날 사관들은



"문정왕후는 천성이 엄의嚴毅(엄격하여 굳세고 사나움)하여 비록 상(명종)을 대하는 때라도 말과 얼굴을 부드럽게 하지 않았고 수렴청정한 이래로 무릇 설시設施(임금이 정사를 돌보는것)하는것도 모두 상이 마음대로 하지 못하였다. 불교에 마음이 고혹되고 환관을 신임하여 나라의 재정을 다 기울게 했고, 승도僧徒(스님들)들을 봉양하고 남의 전지와 노복을 빼앗아..... 게다가 권세가 외척으로 돌아가 정사가 사문私門 에서 나오고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지며 기강이 문난해지고 국세가 무너져서 장차 구언하지 못하게 되었다."



라고 혹평했으니 비정하고도 치열했던 권력에의 집착은 결국 이러한 비극만을 나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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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목대비가 지목한 '선조 독살' 의 주범, 김개시.



조선 왕조에서 임금의 '수라' 는 언제나 독살의 위험이 천만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많은 임금은 독살을 방지하기 위해 여러가지 대비를 하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살설에 대한 의문은 풀리지 않고 계속 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선조의 독살이다. 변덕 많고 의심 많았던 아버지 선조에게 끊임없이 시달림을 받았던 아들 광해군이 서둘러 왕위에 즉위하기 위해서 아버지를 독살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독살설의 한 가운데에는 선조와 광해의 총애를 동시에 받았던 상궁 김개시(김개똥) 이 존재한다.



조선 후기의 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에서는 "김개시가 어여쁜 외모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광해의 총애를 독차지 했던 것은 선조의 독살이라는 광해 최대의 약점을 움켜 쥐고 있었기 때문" 이라고 했는데, 그만큼 선조의 죽음에는 선조와 김개시, 그리고 광해군의 정치적 함수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던 셈이다. 훗날 광해군에게 폐모 되었다가 복권 되었던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는 광해군과 김개시를 싸잡아서 "부살(父殺)한 것이 과연 광해와 개똥이로다!" 라며 선조 독살을 강력하게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 편에서는 선조의 죽음을 지척에서 바라보았던 인목대비의 이러한 주장은 자신의 아들을 죽인 광해군에 대한 앙갚음의 차원에서 나온 '날조된 사실' 로 치부하기도 한다. 아무리 반정으로 쫒겨 난 왕일지라도 함부로 죽일 수 없었던 조선 왕조의 법도 상 인목대비가 광해를 사지로 몰아 넣기 위해서는 '선조 독살' 이라는 누명을 씌우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인목대비의 정치적 입장은 광해군을 궁지에 몰아넣기에 충분한 사안이었고, 김개시 역시 죽음으로 이끌고 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어쩌면 '선조 독살' 의 가장 큰 수혜자는 광해군과 김개시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한을 풀고자 했던 인목대비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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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빈의 아들을 '제거' 하라, 인원왕후 김씨.



조선 왕조의 500년 역사 중 가장 '치열한' 당쟁을 벌였던 숙종 조에 춘몽처럼 지나갔던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삶과 죽음은 그대로 훗날의 아픔이 됐다. 사약을 받고 쓰러지는 어머니 장희빈의 죽음을 눈 앞에서 똑똑하게 지켜봐야 했던 경종과 그런 경종에게서 '연산군' 의 악몽을 뒤늦게 발견한 노론 세력은 이미 화해할래야 화해할 수 없는 정치적 라이벌로 추락했다. 경종은 노론 세력의 강공을 끊임없이 방어해야 했고, 노론은 숙빈 최씨의 소생 연잉군을 내세워 경종을 압박하는 지루한 싸움을 계속할 수 밖에 없었다.



경종에게 불행했던 것은 자신의 법적인 '어머니' 인원왕후 김씨가 자신의 편이 아니라 훗날 영조가 되는 연잉군의 편이었다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소론 당파였으나 지아비 숙종을 따라 노론 당파로 자리를 옮긴 뒤 열렬한 '노론주의자' 로 변신했던 인원왕후 김씨는 연잉군과 노론 세력이 궁지에 몰릴 때마다 경종을 압박해 정치적 활로를 뚫어주는 '왕실의 호랑이' 였다. 장희빈이라는 굴레 속에서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었던 경종에게 인원왕후의 차가운 냉대는 감당할 수 없는 정치적 시련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종은 재위 2년이 지나면서 눈에 띄게 왕권을 회복해 가고 있었다. 노론 세력을 침몰시키고 소론을 등용했으며 조정에도 활기를 불어 넣고자 했다. 경종의 이러한 움직임은 연잉군에게나, 노론에게나, 인원왕후에게나 반가운 것이 아니었다. 결국 그들은 '독살' 이라는 최후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원래 몸이 안 좋았던 경종이 환후로 고생하던 때에 연잉군은 평소 경종이 좋아했던 '게장' 을 수라로 올려 기어코 먹게 한다. 경종은 게장을 먹으며 "역시 연잉군이야 말로 내 진정한 형제로다!" 라며 칭찬했다지만 문제는 게장이 그의 환후와는 상극인 '치명적 음식' 이었다는 것이었다.



당시 소론 세력은 연잉군의 '왕권 찬탈' 을 우려하여 연잉군의 대전 출입을 엄격히 감시할 때였지만 왕실의 큰어른이었던 인원왕후는 이러한 소론 세력의 견제 속에서도 연잉군이 올린 문제의 '게장' 을 무사히 경종 앞에 대령할 수 있도록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인원왕후가 게장과 경종의 환후가 상극의 성격을 띠고 있는지 눈치채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녀 역시 경종의 독살에 일조한 주범 중 한명인 것은 분명한 일이다. 각본, 연출이 인원왕후였다면 주연은 연잉군이었다.



결국 경종은 4년여의 재위 기간을 끝으로 연잉군과 어머니 인원왕후에게 '불의의 타격' 하나를 얻어 맞고 그대로 하늘로 떠나고 말았다. 경종의 죽음을 끝으로 연잉군은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왕좌를 얻게 됐고, 인원왕후는 자신이 지지한 당파를 보호할 수 있게 됐다. '조선의 르네상스' 라고 불리며 일대 부흥기를 열었던 조선의 영-정조 시대는 사실 법적인 아들을 버려야만 했던 어머니의 비정함을 거름으로 자라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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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을 위해 남편을 버리다, 혜경궁 홍씨.



영조 20년 1월 9일. 열살의 '세자빈' 을 앞에 두고 장차 임금의 장인이 되는 홍봉한이 입을 열었다. "궁중에 들어가면 3전 섬김을 삼가고 조심해 효성으로 힘쓰고 동궁 섬김을 반드시 옳을 일로 돕고, 말씀을 더욱 삼가해 집과 나라에 복을 닦으소서." 어린 세자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집과 나라에 복을 닦으라." 라는 아버지의 당부를 가슴 깊이 새기고 어린 세자빈은 구중궁궐 속으로 들어갔다. 바로 이 사람이 영조와 정조, 순조의 시대를 관통한 여인, 혜경궁 홍씨였다.


이렇게 '집의 복을 닦으라.' 는 아버지 홍봉한의 말 한마디는 혜경궁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백두의 처지였던 홍봉한이 하루 아침에 세자의 장인이 되고, 숙부인 홍인한이 세도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면서 혜경궁은 자신의 가문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노론 명가로 일어나기 시작한 풍산 홍씨 가문을 위해 혜경궁은 나라와 남편과 자신을 모두 갖다 바쳐야 했다. 그것이 아버지의 성공이자, 숙부의 성공이었고 곧 자신의 성공이기도 했다.


'삼종(효종-현종-숙종)의 혈맥' 을 잇는 단 하나의 혈육, 그리고 장차 왕통을 이어나가야 할 사도세자와 세자빈 홍씨는 겉으로 보기엔 '최고의 결합' 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결합은 조선 최고의 비극을 불러 일으킬 수 밖에 없는 모순된 결합이었다. '소론' 을 지지하는 세자와 '노론' 명가의 세자빈은 섞일래야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 같은 사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남편을 바라보며 혜경궁은 남편을 버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 에서 사도세자와 영조의 사이가 처음부터 좋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사도세자의 정신병이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불편한 몸을 치유하러 나간 온양 행궁에서조차 백성들의 찬사를 받을 정도로 '멀쩡한' 인물이었다. 사도세자가 혜경궁의 말처럼 그저 '미치광이' 에 불과한 정신병자였다면 영조가 10여년 동안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길 생각은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허나 혜경궁은 이상하게도 '일관되게' 사도세자 정신병자설을 고집했다.


혜경궁은 남편의 원대한 꿈을 가장 지척에서 지켜보았다. 사도세자의 꿈은 '노론정권' 을 뒤집어 엎고 새로운 '소론정권' 을 세우는 것이었다. 썩을대로 썩어버린 노론의 뿌리를 뽑아버리고 자신을 지지하는 소론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치 역학구도를 구상하는 사도세자의 꿈은 혜경궁에게 자신과 자신의 가문을 위협하는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결국 그녀는 사도세자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노론의 '스파이' 로 활약하기로 결심했다. 사도세자의 일거수 일투족은 혜경궁의 입을 통해 궐 밖으로 빠져나갔고 노론은 혜경궁의 도움에 힘입어 사도세자 제거라는 무시무시한 음모를 아무렇지도 않게 꾸밀 수 있었다.


사도세자의 가장 큰 비극은 바로 이것이었다. 자신이 가장 믿고 의지해야 할 부인이 자신이 아닌 가문을 택했다는 처참한 상황에 영조의 어린 부인인 정순왕후 김씨가 가세하면서 사도세자의 입지는 더더욱 궁색해졌다. 사도세자는 노론이라는 강적이 밖에서 둘러 싸고 있는 위급한 형국에서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의 아들까지 낳은 부인 혜경궁과 법적인 어머니 정순왕후, 생모인 영빈 이씨 모두 바깥에서 이뤄지는 '사도세자 제거 음모' 에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베겟머리 송사가 송사 중에 으뜸' 이라는 말처럼 그렇게 사도세자는 안에서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바깥과 안에서 함께 이루어지는 공격에 영조와 사도세자는 돌이킬 수 밖에 없는 강을 건넜다. 이것은 혜경궁 역시 마찬가지였다. 운명의 그날, 사도세자는 혜경궁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내 목숨이 그 날 마칠 것도 스스로 염려하여 세손을 경계 부탁하고 왔었는데 동궁(사도세자)께서는 생각과 다르게 나더러 하시는 말씀이 '아무래도 이상하니 자네는 잘 살게 하겠네. 그 뜻들이 무서워." 하시기에 내가 눈물이 드리워 말없이 허황해서 손을 비비고 앉았더니, 이 때 대조(영조)께서 휘령전으로 오셔서 동궁을 부르신다는 전갈이 왔더라.』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혜경궁을 향한 사도세자의 원망어린 발언이다. 지금의 말로 풀자면 "나는 죽는데 이상하게도 너는 살 것 같으니 너의 뜻이 참 무섭다." 는 한탄이었다. 이어서 사도세자는 혜경궁에게 이런 말까지 남긴다. "자네가 참으로 무섭고 흉한 사람일세. 자네는 세손 데리고 오래 살려 하기에 오늘 내가 나가서 죽겠기로 그것을 꺼려 휘향을 내게 안 씌우려는 그 심술을 알겠네."


'나는 죽는데 너는 안 죽으니 이상하다.' '참으로 무섭고 흉하다' '내 아들을 데리고 혼자 오래 사려고 한다' '심술이 가득하다' 는 폭언은 10여년 넘게 자신과 함께 살아 온 부인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서슴없이 혜경궁에게 그런말을 퍼부었다. 운명의 그 날, 사도세자도 혜경궁도 사도세자가 영조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이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편을 제거할 수 밖에 없는 혜경궁과 부인의 가문에 의해 죽임을 당해야만 하는 사도세자, 그들의 만남은 처음부터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는 비극적 결합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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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죽음을 지켰던 단 한명의 여자, 정순왕후 김씨



'경종의 독살' 이라는 혐의와 함께 일어섰던 영조의 업보였을까. 그의 손자였던 정조는 즉위하는 그 순간부터 독살과 암살에 노이로제가 걸릴 정도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임금이었다. 정조 이전에도 여러 임금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의혹에 시달렸지만 정조만큼 생명을 걸고 왕좌를 지킨 임금도 드물었다. 게다가 정조는 그 어떤 임금도 겪지 못했던 '자객의 침입' 까지 받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정조가 더욱 두려워 했던 것은 보이는 '자객' 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독살' 이었다. 갑작스러운 정조의 죽음과 함께 "임금이 독살 당하였다." 는 말이 떠돌고 경상도 인동시 장시경, 장현경 부자가 정조 독살의 배후를 밝히겠다고 반란을 일으켰던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었다. 정조의 죽음 배후에는 거대 당파였던 노론 벽파 세력과 독살을 직접 진두 지휘했던 정순왕후가 존재했다.


놀라운 것은 1800년 정조 24년 6월 28일, 종기로 투병 중이던 정조를 둘러싸고 치료상의 난맥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정조 스스로 의학 지식이 뛰어난 군주였고 궁중 의원들이 즐비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조의 치료는 쉽사리 이뤄지지 못했다. 바로 정조의 최대 정적 중 한명이었던 정순왕후 김씨가 정조의 치료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기 대문이다. 궁중의 한낱 아녀자로서 임금의 치료에까지 간섭하는 것은 불경에 가까운 파격이었으나 노론 대신들은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정순왕후는 정조의 병세가 선조 병술년의 증세와 비슷하니 성향정기산이라는 탕약을 올려야 함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더욱 우스운 것은 정순왕후의 하달을 당시 도제조 이시수가 그대로 따랐다는 것이다. 의학 지식이 없는 아녀자의 말 한마디에 임금의 치료가 우왕좌왕 하는 우스운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여기에 더 나아가 정순왕후는 내시를 데리고 정조의 안색을 살피겠다며 직접 대전에 발을 들여 놓았다.


"내가 직접 받들어 올려드리고 싶으니 경들은 잠시 물러가시오." 라는 명과 함께 방 안에는 정조와 정순왕후, 단 둘이 자리잡았다. 투병 중인 임금과 그 임금을 죽여야만 사는 대비의 운명은 그렇게 결정지어졌다. 잠시 뒤 방안에서는 정순왕후의 곡소리가 들렸고 정조의 임종을 지켜본 것은 정조를 낳은 혜경궁도, 부인인 효의왕후도 아닌 정조의 최대 정적, 정순왕후였다. 이것으로 정조의 시대는 끝이났고 '수렴청정' 의 위세를 누리던 정순왕후의 시대가 열렸다.



조선 왕조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린 사건은 바로 이렇게 '허망하게'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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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 한복판에서 조선의 역사를 움직인 여성들



철저한 '남녀차별' 과 '남존여비' 의 사상으로 가득했던 조선 왕조는 누가 뭐래도 '남성들의 사회' 였다. 그러나 구중궁궐 한 복판에서 역사를 움직이고 창조한 것은 여성의 몫이기도 했다. 그들은 소리 없이 조용하게 한 나라의 군주이자 만인지상인 임금의 죽음을 목도하고, 재촉하고, 움직였다. 자신의 이해 관계에 따라, 정치적 함수 관계에 따라, 권력 투쟁의 일상 속에서 임금의 목숨줄을 가장 쉽게 움켜 쥘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임금 바로 옆에 앉아있는 왕실의 여성들이었던 것이다.



왕실 여성들이 존재하는 이상 조선 왕조는 일정부분 여성들의 치맛폭 속에서 끝끝내 벗어나지 못하는 운명이었다. 그 운명이 결국 조선의 역사를 움직였고, 왕실 여성들을 움직이게 했다. 임금의 죽음을 목도하는 것을 통해 인수대비나 인원왕후처럼 '역사적 성공' 을 거둔 인물도 있는 반면, 문정왕후나 정순왕후처럼 혹평을 받는 인물도 있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의 '정치적 선택' 은 어떻게 평가되어야 하는가?



어쩌면 그녀들의 '선택' 역시 역사가 강요했던 어쩔 수 없는 '선택' 은 아니었을까.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여성도, 남성도 아닌 그저 역사 그 자체일테니까.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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