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한에게 복수의 이유는 무엇일까. 버림받은 상처 때문에 받은 감당할 수 없는 고통? 자신의 오빠를 외면하여 사고가나는 원인을 제공하고도 뻔뻔하게 그 사실을 부인한 엄마에 대한 배신감? 아니면 그 둘 다 일까?

 

 

 

어느 쪽이든 백야(박하나 분)의 복수는 참으로 쩨쩨하고 옹졸하기 그지없다. 엄마는 자식을 버렸고, 오빠가 죽고, 결혼을 약속한 남편마저 목숨을 잃었다. 이 모든 사건들이 일어나는 방식에 대한 논란은 차치하고라도 이런 큼직한 사건들 속에서 백야의 복수는 오로지 음식 지적 뿐이다.

 

 

 

 

조미료가 음식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나름의 논리를 펴지만 그것은 등장인물의 목소리 라기 보다는 작가의 목소리에 가까워 소름이 끼친다. 철분제를 부작용 때문에 복용하지 않는다는 등장인물의 목소리에는 근거도 논리도 없다. 다분히 작가 개인적인 상식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드라마 속의 인물들은 이 ‘조미료’ 하나 만으로 너무도 쉽게 무너진다. “그동안 조미료를 넣으면서 음식을 해 온 것이냐”며 그동안 잉꼬부부의 금술을 자랑해 온 부인에게 화를 내는 조장훈(한진희 분)의 발언에는 실소가 터진다. 그렇다면 그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조미료를 넣었는지 안 넣었는지도 몰랐다는 것일까. 요리실력이 마음에 안 든다면 도우미를 불러 요리를 시키면 될 일이다. 그 정도의 재력에 그 정도의 연륜에도 조미료 하나 넣었냐 안넣었냐, 출장 뷔페를 불렀느냐 안 불렀냐로 볼썽사납게 화를 내는 그의 모습에는 공감이 하나도 가지를 않는다.

 

 

 

이 와중에 주인공인 백야는 점점 밉상이 되어간다. 결혼하자마자 남편이 죽은 상황에서도 시댁에 붙어 있겠다는 황당한 설정도 설정이지만 어느 순간 백야의 복수에 대한 당위성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인물들이 죽어나가는 큼지막한 사건들 속에서 백야의 복수는 그깟 ‘조미료’를 넣었냐 안넣었냐로 서은하(이보희)를 쥐어짜는 일일 뿐이다. 남편의 죽음이라는 거대한 사건 앞에서 그까짓 조미료 운운하는 백야는 너무나도 한심스럽기만 하다.

 

 

 

이런 사태는 왜 생겨난 것일까. 작가의 전작 <인어아가씨>를 보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다. <인어아가씨>와 <압구정 백야>는 너무도 닮아있다. 단지 복수의 대상이 아버지에서 어머니로 바뀌었다고 해서 이 두 드라마의 유사성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나마 <인어아가씨>는 복수를 하는 과정만큼은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자신을 버리고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린 아버지에 대한 분노는 이해 할만한 것이었다. 아버지가 다른 여자와 낳은 딸의 남자를 빼앗는 것은 전형적이기는 해도 그럴듯한 이야기는 만들어졌다.

 

 

 

그러나 문제는 복수를 하고 나서부터였다. 진정한 사랑을 깨닫고 복수를 마친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과 결혼하여 만들어간 이야기는 오로지 다음 밥 반찬으로 무엇을 어떻게 먹을까에 관한 것이었다. 결국 <인어아가씨>는 여주인공의 이름을 따 ‘아리영의 요리교실’이라는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인어아가씨>가 종영한 후 13년이 지난 후, 작가의 작품에는 복수를 마치기도 전에 ‘백야의 요리교실’이 등장했다. 다른 이유는 없다. 이것은 단순히 작가의 오기와 아집으로 이루어진 결과다. 오로지 요리가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지에 관한 백야의 일장연설은 백야의 캐릭터만 훼손하고 있다. 처음부터 호감형 캐릭터는 아니었던 까닭에 백야가 여주인공으로서 가지는 가치는 추락했다. 대체 백야가 왜 주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지에 관한 설정이나 설명은 없다. 단순히 ‘여주인공이니까’ 가능한 설정이다. 작가의 세계관은 더욱 확실해졌지만 그만큼 문제점은 증가했다.

 

 

 

이런 문제점은 앞 뒤 없이 그날 눈이 가는 장면만 방영되는 임성한 스타일 때문이다. 그날 그날 눈길이 가는 소재를 쓰다보니 작가 스스로도 등장인물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조나단이 살아있는 편이 나았다. 조나단이 죽음으로써 백야의 시댁 살이에 대한 이야기가 어그러지고 등장인물들의 행동에 대한 당위성이 사라진다.

 

 

 

임성한 드라마는 앞뒤가 없고 치밀하지 못하기 때문에 거부감이 생긴다. 그 순간의 몰입력 만큼은 인정할만 하지만 과연 백야의 복수는 시청자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대답은 작가를 제외한 그 누구나 알고 있다. 단지, 시청률을 무기삼은 작가의 권력에 눈과 귀를 닫고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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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구정 백야>의 주인공 조나단(김민수)가 죽음을 맞이하면서 임성한의 이른바 데스노트가 시작되었다. 주연급이었던 그의 죽음에 시청자들은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다. <압구정 백야>에서는 그동안 숱하게 장화엄(강은탁 분)과 백야(박하나 분)의 연결고리를 강조하며 서로가 운명적 상대임을 암시해왔다. 그러나 복수를 포기할 수 없는 백야는 조나단과의 결혼을 강행했고 결국 결과는 조나단의 죽음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문제는 이 죽음의 과정이었다. 장화엄과 백야를 연결하려는 작가의 욕심에 죽음은 다소 황당한 형태로 나타나고 만 것이다. 백야의 친어머니이자 조나단의 양어머니인 서은하(이보희 분)가 병원에 입원하자 병원으로 향한 백야와 조나단은 갑자기 심기가 불편한 조직 폭력배와 시비가 붙는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조직 폭력배는 이전에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고 단순히 주인공을 죽이기 위해 등장했다. 그들에게 시비를 거는 과정역시 전혀 개연성이 없었다. ‘여기가 너네 집 안방이냐’는 전형적인 대사로 신혼부부에게 시비를 걸던 폭력배들은 결국 주인공을 죽이면서 자신의 역할을 모두 해낸다.

 

 

 

 

이 장면에 대한 앞뒤 상황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죽음을 위한 죽음’에 지나지 않는 장면이었다. CCTV까지 구비되어있을 대형병원 주차장에서 아무리 조폭이라도 저런 말도 안되는 시비를 걸까 하는 의구심은 뒷전이다. 백번 양보해서 현실에서야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쳐도 드라마는 시청자들이 이해될만한 앞뒤 정황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죽음에 그런 개연성 따위는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임성한 작가는 그동안도 이런 말도 안되는 죽음으로 시청자들을 충격과 공포에 몰아넣었다. 임성한 작가의 이른바 ‘데스노트’가 그 맹위를 떨친 것은 2005년 <하늘이시여>부터다. <하늘이시여>의 소피아(이숙 분)은 무려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며 깔깔대고 웃다가 갑자기 숨이 넘어가 죽음을 맞이하며 시청자들을 황당하게 했다. 나중에야 ‘뇌암’으로 죽은 것이라는 해명이 등장했지만 그 전후 상황을 고려해 보아도 참으로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소피아가 죽은 이유는 단순하다. 바로 여주인공이 시어머니의 친딸이라는 비밀을 알고 있기 때문. 이 비밀을 알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작가는 이 캐릭터를 ‘웃다가 죽게’ 만든다.

 

 

 

이후에도 <아현동 마님>에서는 여주인공의 결혼식 당시 아버지가 신부입장을 하다가 죽거나 <보석비빔밥>에서는 택시를 타고 결혼식장으로 향하는 와중에 치매에 걸렸던 어머니가 죽는 등, 황당한 죽음은 이어져왔다.

 

 

 

<오로라 공주>에서 ‘데스노트’라는 말은 본격적으로 작가를 비아냥 거리기 위해 등장했다. 그간의 죽음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인물들이 죽거나 하차했다. 작가는 여주인공의 아버지를 죽인 것으로 모자랐는지 이야기에서 등장인물들이 필요없어지자 갑자기 해외로 쫒아내는 등 황당한 전개를 일삼는다. 이에 갑작스럽게 하차를 통보받은 출연배우들은 ‘스케줄 조정까지 했는데 어이없고 황당하다’고 성토에 나서기도 했다.

 

 

 

더 어이가 없는 것은 주인공 중 하나인 설설희(서하준 분)이 뜬금없이 암에 걸린 것도 모자라 ‘암세포도 생명’이라는 말도 안되는 대사가 등장한 것이다. 종종 문학작품이나 대체 의학에서 암세포를 하나의 생명체로 보는 시각이 있기도 하지만 문제는 이 대사가 맥락과 상황에 전혀 맞지 않는 대사였다는 점이다. 문학적이지도, 의학적이지도 않은 상황에서 갑자기 등장한 대사는 작가의 자질을 의심케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대사가 논란이 된 것은 암세포로 고통받는 환자들에게 있어 마치 암세포를 죽여서는 안된다고 옹호하는 발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 표현이 있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사용해서는 안된다.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는 일들은 그만큼 섬세하고 조심스럽게 다뤄져야 한다. 그러나 작가는 그런 모든 개연성을 깡그리 무시한채 제 고집을 내세운다.

 

 

 

드라마에서 죽음만큼 한 캐릭터를 없애기 용이한 장치는 없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것이 드라마속에 그려지는 것은 그만한 이유와 개연성을 수반해야 한다. 단순히 캐릭터를 없애기 용이하기 위해 ‘이용’되는 죽음은 작가가 죽음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줄줄이 죽거나 하차하는 주인공들의 모습 속에 죽음이라는 문제를 가볍고 제멋대로 다루는 작가의 황당한 세계관이 그대로 그려져 보는 시청자들은 허탈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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