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인기드라마 [뿌리깊은 나무]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25.4%라는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며 유종의 미를 거운 [뿌리깊은 나무]는 한글창제를 둘러싼 살인과 음모를 긴장감 있게 그려내 시청자들의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


특히 마지막 방송에선 지금껏 '한가놈'이라 불리던 인물, 한명회의 정체가 밝혀지며 마지막까지 소름끼치는 반전을 선사하기도 했다.


시청자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 모은 한명회. 그는 과연 누구인가. 또한 드라마처럼 한명회와 성삼문은 정말 악연이었을까.


[뿌리깊은 나무] 마지막 회에서 밀본 4대 본원자리에 오른 심종수는 지금껏 '한가놈'이라 불린 한명회에게 "반드시 수양대군의 마음을 사로잡아라. 나는 밀본 수장으로서 역사의 뒤편을 걸을 것이다. 자네는 역사의 전면에서 재상총재제의 길을 가야한다"고 당부했다. 이 이야기를 듣고 길거리에 나선 한명회는 성삼문-박팽년과 어깨를 부딪힌 뒤 "집현전을 박살내겠다"고 다짐한다. 성삼문 역시 한명회를 보고나선 이유를 알 수 없는 좋지 않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이처럼 팩트와 픽션을 교묘하게 섞어 놓으며 시청자들의 흥미를 자극한 [뿌리깊은 나무]의 마지막 방송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그렇다면 실제 역사 속에서 한명회와 성삼문은 어떤 길을 걸었을까. 드라마에서 채 표현되진 않았지만 한명회와 성삼문의 '악연'은 실상 조선 왕조의 역사를 바꿔놨다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심각한 측면이 있었다.


심종수의 당부처럼 실제 한명회는 수양대군의 마음을 사로잡고 기습 쿠데타인 '계유정난'을 주도한 핵심 인물이었다. 수양대군이 "나의 자방"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모사에 능했던 그는 당대의 권신이었던 김종서를 제거하고, 단종을 폐위시키는 등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훗날 세조가 된 수양대군이 "한명회가 없었으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세조가 부당한 방법으로 왕위를 차지하게 되자 성삼문-박팽년을 위시한 집현적 학사들은 단종의 복위를 획책하게 된다. 성삼문이 보기에 세조의 왕위 찬탈은 명분 없는 쿠데타에 불과했으며, 왕실의 정통을 이어나가기 위해선 단종이 왕위에 있는 것이 맞다고 판단한 것이다. 또한 그는 세종이 살아있을 당시 "단종을 잘 부탁한다"는 유훈을 받은 몇 안되는 인물이기도 했다. 성삼문에게 '단종복위'는 세종의 유훈을 지키는 것이요, 왕실의 정통을 계승하는 작업이었던 셈이다.


세조의 밑에서 단종 복위 계획을 세우던 성삼문과 박팽년 등은 1456년 2월, 세조가 중국의 사신을 맞아 창덕궁 연회장에서 잔치를 벌이는 때를 틈타 세조 부자와 한명회를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연회를 하게 되면 임금의 뒤에는 '보디가드' 격인 운검이 서게 되는데, 이 운검은 연회장에서 유일하게 칼을 소지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절묘하게도 당시 운검에 성삼문의 아비인 성승과 단종복위파인 유응부가 지목된 것이다.


성삼문은 성승과 유응부를 시켜 연회가 시작되자마자 세조와 의경세자를 살해하라고 명령하고, 나머지 암살조에게는 차례로 한명회와 신숙주 등을 제거하라는 주문을 한다. 마치 하늘이 도운 것처럼 성삼문의 단종 복위 계획은 한치의 오류도 없이 착착 맞아떨어졌다. 이대로라면 한명회는 물론이요, 세조의 목숨마저 위태롭게 된 것이다.


그런데 연회 전날 예상치 못한 '변수'가 터져 나왔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세자는 연회에 참석하지 않고 궁을 지키는 한편, 연회 장소 역시 보다 드넓은 곳으로 변경된 것이다. 성삼문의 계획에 일정부분 차질이 생긴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일까. 이 사태의 중심에는 바로 한명회가 존재하고 있었다.


당시 임금의 비서관 격인 우승지로서 국정 전반을 관장하고 있었던 한명회는 연회장소가 너무 좁고, 운검과 세조의 거리가 가까운 것을 매우 꺼림칙해 했다. 꺼림칙한 기분을 감추지 못한 그는 연회 당일 운검의 명단을 파악하곤 소스라치게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세조에게 적대적이라 알려진 성삼문의 아비 성승과 유응부가 운검 명단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한명회는 밤늦게 세조를 찾아가 연회장소를 변경하고, 세자는 궁궐에 남길 것을 요청했다. 갑작스런 요청에 세조는 "이 무슨 예의없는 망발인가" 라며 한명회를 꾸짖었지만, 한명회는 부득불 계획 변경을 요구해 이를 관철시켰다. 허나 이 때에 한명회는 차마 운검마저 들이지 말라는 요쳥까진 할 수 없었다. 중국 사신을 모시는 자리에 '보디가드'가 없다는 것은 국제적 결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계획이 다소 틀어지긴 했으나 이 소식을 들은 성삼문은 "운검이 들어갈 수 있다면 된다"고 위안 삼았다. 운검만 들여보낼 수 있다면 세조의 목을 따는 건 시간문제라 봤기 때문이다. 허나 이건 너무 순진한 생각이었다. 연회 당일 운검의 자격으로서 연회장에 들어가려던 성승과 유응부 앞을 한명회가 가로막은 것이다. 성승과 유응부로선 한명회의 돌발행동에 크게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한명회는 "연회장소가 비좁고 더우니 운검은 들어가지 않는게 좋겠소" 라고 말했고, 성승이 "난 그런 어명을 받은 적이 없소이다. 들어가게 해주시오."라고 쏘아 붙이자 한명회는 "나중에 명령이 있을 것이오. 당장 물러가시오." 라며 그들을 연회장에서 쫓아냈다. 이는 세조의 명령과 관계없이 순전히 한명회 개인의 자의적인 판단으로 행해진 행동이었다. 성삼문으로선 한명회 때문에 야심차게 진행한 세조 제거 계획이 허무하게 무산된 것이다.


당시 유응부는 "이렇게 된 이상 바로 쳐들어가서 세조를 죽이자"고 주장했지만, 성삼문은 "경거망동하지 말고 다음 기회를 노리는 것이 좋겠다"며 작전상 후퇴를 명령했다. 이 말을 듣고 유응부는 "하늘이 주신 기회를 버리는구나! 이래서 학문만 하던 선비들과는 일을 꾸미지 말아야한다!"고 탄식했다. 실제로 유응부의 말처럼 성삼문을 비롯한 단종 복위파는 연회 다음날 한명회에 의해 모두 체포되고 만다. 집현전 학사로서 평생 학문만을 연구해 온 성삼문에게 권모술수에 능하고 상황판단이 재빠른 한명회는 감당하기 힘든 상대였던 것이다.


집현전 학사들이 무더기로 체포되면서 세조는 "성삼문 등이 나를 임금으로 인정해준다면 살려주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했다. 허나 한명회는 세조의 이런 생각을 원천적으로 반대했다. 한명회는 성삼문, 박팽년 등의 주살을 끈질기게 주장하는 한편 조정 대소신료들을 움직여 단종 복위파를 모조리 제거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결국 세조는 한명회의 주장을 받아들여 성삼문, 박팽년 등을 살해하기에 이른다.


또한 한명회는 "집현전이 이제 학문의 기관이 아닌 정치를 논하는 기관이 됐으니 그 뜻이 요망합니다. 당장 혁파하소서." 라고 간청하여 집현전을 혁파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뿌리깊은 나무] 속 한명회의 대사처럼 실제 한명회 역시 집현전을 '박살'냈던 것이다. 성삼문, 박팽년 등을 모조리 제거하고 집현전마저 혁파했던 한명회는 세조를 위시한 집권세력의 위치를 더욱 공고히하고 권력을 독점하는 등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막강한 '공신세력'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역사 속 한명회와 성삼문은 서로의 목숨을 걸고 싸운 최대의 정적이었다. 결국 한명회는 성삼문의 목숨을 앗아갔을 뿐 아니라 그의 정치 근간이었던 집현전마저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하는 것을 통해 성삼문과의 질긴 악연을 끝낼 수 있었다. 역사에서 가정이란 것은 부질 없는 일이지만 만약 성삼문이 이 대결에서 승리했다면 조선 왕조의 역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됐을 것이다.


다만, 실제 한명회와 드라마 속 한명회의 차이가 있다면 실제 역사 속 한명회는 '재상총재제'가 아니라 '왕권강화'에 더 치중한 인물이었단 것이다. 네 번의 공신책봉, 두 번의 영의정 재임, 원상제를 통한 국정운영 등 한명회의 권력은 왕권을 능가한다 할만큼 강력한 것이었으나 그는 단 한번도 왕권에 도전한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오히려 자신의 딸을 왕실에 바치는 등 왕실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말년에는 전재산을 왕실에 기부하는 등 철저한 왕권 신봉주의자로서 제 소임을 다했다. "재상총재제의 길을 가라"던 드라마 속 심종수의 당부는 실상 한명회에겐 어울리지 않는 성질의 것이다.


어찌되었든 [뿌리깊은 나무]는 '한명회'라는 실제 인물을 교묘히 가공하여 반전의 묘를 살리는 한편, 시청자들의 흥미를 자극함으로써 올 한해 가장 재미있었던 드라마로 대중의 머리 속에 남았다. 치밀한 각본과 뛰어난 연기를 통해 시청자들을 즐겁게 했던 [뿌리깊은 나무] 제작진 모두의 노고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박수를 보낸다. 그들로 인해 지난 몇 달간 시청자들은 지루하지 않았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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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orealand.tistory.com BlogIcon 국토지킴이 2011.12.23 11: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뿌리깊은 나무가 이제 종영을 바라보고 있네요
    그동안 재밌게 봤었는데 아쉬워요
    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

  2. Favicon of http://smilejulia.tistory.com BlogIcon 줄리아, 2011.12.23 13: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밌게 읽었습니다.
    지루하지 않게 잘 풀어주신 듯하네요.^^

  3. 2011.12.25 01: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공주의 남자]가 클라이막스를 향해 치달아 가고 있다.


사육신의 반란과 세령의 반항에 점점 더 평정심을 잃어가고 있는 세조의 모습과 그에 대항하는 김승유 집단의 단종복위계획이 구체화 되면서 갈등이 고조 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22일 방송분에서는 세조의 맏아들인 의경세자가 병에 걸려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장면이 방송됐다.


세령은 이를 두고 아버지인 세조에게 "당신의 업보를 자식들이 받아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라고 일갈한다. 그렇다면 세령의 말처럼 세조의 자식들은 정말 일찍 죽었을까?


세조는 정비인 정희왕후 윤씨에게 2남 1녀를, 후궁인 근빈 박씨에게 2남을 두어 총 4남 1녀를 두었다. 여기서 세령 캐릭터의 모티브가 된 세희공주까지 합치면 4남 2녀다. 그렇다면 생몰년이 미상인데다가 여전히 실존 여부를 두고 말이 많은 세희 공주를 제외한 나머지 세조의 자식들은 몇 살에 세상을 떠났을까.


우선 세조의 맏아들인 의경세자(훗날 추존왕 덕종)은 20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해서에 능하고 영민하다 알려졌으나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던 그는 계유정난 이 후, 더욱 건강이 나빠져 병상에 눕는 일이 잦았다. [공주의 남자]에서는 의경세자가 아팠다는 사실을 세조가 뒤늦게 알게 되는 것으로 그렸는데, 사실 세조 부부는 맏아들인 의경세자의 건강 때문에 애초부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다 단종폐위사건을 전후해 극심한 죄책감과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한 의경세자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얼마 되지 않아 숨을 거두게 된다. 의경세자는 꿈 속에서 자주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 권씨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에게 의경세자의 혼을 현덕왕후의 귀신이 데리고 갔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이 소문에 격분한 세조는 현덕왕후를 폐위시키고 그녀의 무덤을 파헤치는 패륜을 저질렀는데, 이는 시동생이 형수의 무덤을 파헤친 것으로 강상과 윤리를 치도의 근본으로 삼는 조선의 예법상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를 사료해볼 때 당시 세조가 의경세자의 죽음에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헤아려 볼 수 있다. 의경세자의 부인은 그 유명한 인수대비(소혜왕후) 한씨이며, 그의 둘째 아들은 성종이다. 그는 훗날 덕종임금으로 추존된다.


세조의 둘째 아들은 예종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의경세자와 마찬가지로 잩은 병치레로 세조 부부의 애간장을 태웠던 그는 재위 1년만에 19살의 나이로 갑자기 승하했다. 모후인 정희왕후 윤씨조차 "주상의 병이 이토록 심각한지 몰랐다"고 경악할 정도로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허나 그가 재위 시절 내내 발바닥과 엉덩이에 난 종기로 크게 고생했고, 마땅한 치료법이 없어 밤잠을 설치는 일이 많았던 것으로 볼 때 예종의 승하는 어느 정도 예견되어 있었던 일이 아닌가 싶다.


예종이 너무 이른 나이에 흉서하자 많은 백성들은 또 다시 "세조의 업보를 자식들이 대신 받는다"며 두려워했다. 당시 백성들의 인식과 달리 최근 몇몇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예종을 둘러싼 정치역학관계를 두고 예종 독살설 또한 주목을 받고 있다. 예종의 형수이자 의경세자의 부인이었던 수빈(훗날의 인수대비)한씨는 사돈이었던 한명회, 대훈신 신숙주와 결탁해 자신의 둘째아들인 자을산군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종의 죽음은 필수적이었다. 결국 수빈은 훈구파를 움직여 예종을 정치적으로 압박하는 한편, 시어머니 정희왕후를 제 편으로 포섭해 든든한 왕실세력의 뒷받침을 얻어냈다. 끊임없는 정치 공격과 남이-귀성군으로 대표되는 신진세력의 몰락 등으로 큰 충격을 받은 예종은 가뜩이나 좋지 않았던 건강이 더 악화되었고 곧 숨을 거뒀다.


이를 두고 김인호 교수는 "결국 예종의 세력은 훈구세력을 등에 업은 인수대비의 세력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리하여 예종은 '암살'이라는 여운을 남기며 요절하였고, 자신의 아들이 아닌 인수대비의 둘째아들 성종에게 왕위를 넘길 수 밖에 없었다" 고 평가했다. 어찌되었든 예종 역시 열 아홉이라는 짧디짧은 생애를 마치고 간 비운의 임금인 셈이다.


세조의 두 아들과 달리 유일한 딸이었던 의숙공주는 비교적 오래 살았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일 뿐, 의숙공주가 숨을 거둘 당시 그녀의 나이는 고작 33살이었다. 정인지의 아들인 정현조의 부인으로 들어갔던 의숙공주는 결혼 이 후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되어 오랜 시간동안 병치레를 하다 숨을 거두었다. 게다가 그녀는 여자로서 단 한명의 아이도 생산하지 못한 석녀였다. 여성으로선 불행하기 짝이 없는 운명이었다.


후궁인 근빈 박씨에게서 얻은 두 아들 역시 요절한 것은 마찬가지다. 형인 덕원군의 생몰년은 미상이나, 둘째인 창원군은 28살 한창 나이에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로써 세조의 아들들은 30살이 되기 이전 모두 세상을 떠난 셈이 됐고, 특히 정비인 정희왕후 윤씨에게 얻은 두 아들은 모두 20살을 넘기지 못하고 요절했다. 단종을 죽인 업보요, 현덕왕후의 복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이른 죽음이었다.


신기한 것은 세조와 함께 계유정난-단종폐위를 주도했던 1등공신 한명회의 자식들 역시 대부분 빨리 요절했단 사실이다. 한명회는 셋째 딸과 넷째 딸을 각각 예종과 성종에게 시집 보내 두번이나 자신의 집안에서 왕비를 탄생시켰지만 그녀들은 모두 채 스물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운명이었다. 예종비 장순왕후는 17세의 나이에 산후병에 걸려 승하했고, 그가 낳은 해양대군도 14개월 만에 운명을 달리했다. 성종비 공혜왕후 역시 19세의 나이로 후사 없이 승하했으니 한명회로선 통탄할만한 노릇이었다. 그야말로 '천벌'이라 할 만했다.


신숙주 역시 생전에 자식을 잃는 슬픔을 겪었다. [공주의 남자]에서 세령-승유와 삼각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신면이 바로 그다. 신면은 세조조의 대표적인 반란이었던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다 반란 세력에게 무참히 살해당했다. 당시 신숙주는 이시애가 퍼뜨린 헛소문 때문에 반란세력으로 지목당해 옥살이를 하던 중이었다. 말 그대로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자식을 잃은 것이다.


이처럼 세조와 측근들의 자식들은 정말 부모의 '업보'를 떠맡은 냥 너무 빨리, 너무 비참하게 세상을 떠났다. 세조가 말년에 정신병에 걸리고 건강이 악화되는 등 고생을 한 것도 자식들의 요절에 의한 상처가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김종서, 안평대군, 금성대군 등 희대의 권신과 왕족들을 모두 죽이고 피로써 차지한 왕위였지만 세조 역시 인간적인 죄책감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었던 셈이다.


세조와 그 자식들은 정말 [공주의 남자] 속 세령의 말처럼 "세조의 업보를 지고" 저승으로 끌려간 것일까. 문득 하늘의 지엄함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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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공주의 남자 2011.09.23 15: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피로 흥한자 피로 망하리라(제 생각입니다)

  2. 1234 2011.10.05 08: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단종은 덕종이 죽은 후에 죽었는데.




[공주의 남자]가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단종시대의 최고 비극인 '계유정난'이 마무리 되며 거목 김종서가 역사의 한 페이지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특히 17일 방송에선 김종서가 생존해 있단 걸 안 수양대군이 그를 다시 한 번 제거하는 내용이 방송됐다.


그렇다면 실제 역사 속에서도 철퇴를 맞은 김종서는 살아 있었을까? 수양대군은 정녕 김종서를 두 번 죽였을까? 수양대군을 경악케 한 김종서의 생존은 진짜 있었던 일이었을까?


계유정난이 일어나던 밤, 상황은 예상보다 훨씬 급박하게 돌아갔다. 김종서의 집에 불시에 찾아간 수양대군은 김종서가 잠시 방심하던 틈을 타 철퇴로 그의 머리를 내리쳤다. '백두산 대호'라 불리던 김종서는 그 자리에 쓰러졌고, 수양대군은 다시 한 번 철퇴로 김종서를 내리쳤다. 그러나 이번에는 김종서 대신 그의 맏아들인 김승규가 맞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김종서 부자가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진 것을 확인한 수양대군과 그 일파는 서둘러 궁궐로 향했다. 궁궐로 향한 수양대군은 일거에 권력을 장악했다. 수양대군으로부터 김종서의 죽음을 전해들은 한명회 역시 분주하게 움직엿다. 그는 김종서 일파를 궁궐로 불러들여 살생부에 따라 차례로 살해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있었던 영의정 황보인이 제거됐고 민신, 조극관 등 단종에게 충성을 맹세한 인물들 또한 모두 목이 날아갔다. 말 그대로 하룻밤 새에 세상이 뒤집어 진 것이다.


수양대군 일파는 승리감에 도취됐다. '금상 위에 좌상'이라 불리던 김종서 가문을 하루 아침에 멸족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단종을 떠받들던 신료집단을 한번에 쓸어낸 것에 대한 만족감이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수양대군을 경악하게 하는 일이 벌어진다. 바로 김종서의 시신이 없어진 것이다. 김종서의 시신을 수습하러 갔다가 그의 시신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홍윤성은 기함할 수 밖에 없었다.


홍윤성은 수양대군 일파의 컨트롤 타워인 한명회에게 김종서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소식을 전했고, 한명회는 직감적으로 김종서가 생존해 있음을 깨달았다. 용의주도하고 냉철한 판단력으로 계유정난의 모든 것을 진두지휘했던 한명회였으나 이 때만큼은 다소 당황했는지 수양대군과 수양대군의 보디가드격인 임운, 양정에게 "김종서가 죽은 것을 확인하셨소이까?" 라고 몇 번이나 캐물었다 한다.


한명회의 직감처럼 김종서는 철퇴를 맞고 쓰러진 뒤에도 숨이 붙어 있었다. 4군 6진을 개척하며 '백두산 호랑이'라 불리던 천하장사 김종서였다. 철퇴 한 번으로 제거하기엔 너무나 강한 상대였던 셈이다. 김종서는 급한대로 철퇴를 맞은 부분에 응급처치를 하고 서둘러 입궐하고자 했다. 수양대군이 궁궐을 장악하기 전에 먼저 단종의 신변을 보호해야만 수양대군의 쿠데타를 막을 수 있단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김종서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도성의 8대문은 모두 수양대군에게 장악됐고, 김종서가 입궐할 수 있는 방법은 모두 차단되었다. 김종서를 태운 가마가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돈의문이었다. "환자가 있으니 문을 열어주시오" 라며 간청하는 김종서의 하인에게 돈의문 수문 갑사는 "수양대군의 명이 있을 때까진 누구도 들어올 수 없다"는 차가운 답변만을 내놓았다.


돈의문이 차단되었음을 확인한 김종서는 급히 가마를 돌려 서소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환자가 있으니 문을 열어달라는 김종서의 하인에게 "수양대군의 명이 없이는 성문을 열지 못한다" 는 답변만이 되풀이 되었다. 이 때, 김종서는 노기를 참지 못하고 "내가 일국의 좌상 김종서니라! 당장 문을 열거라!" 라고 일갈했다. 허나 문은 굳게 잠겨 열리지 않았다.


일이 틀어진 것을 직감한 김종서는 아들 김승벽의 처가에 몸을 숨겼다. 환부를 치료한 뒤 차후의 일을 도모할 생각이었다. 허나 김종서를 가만히 둘 한명회가 아니었다. 김종서의 생존을 확인한 한명회는 도성 전반을 샅샅이 뒤져 김종서의 은신처를 확보했고 양정, 이흥적, 이흥상으로 이뤄진 자객단을 보내 김종서의 주살을 명령했다. 김종서로선 수양대군 일파에 의해 '두 번' 죽게 된 셈이었다.


결국 김종서는 끝끝내 단종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수양대군 일파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됐다. 세종에게 "육진의 개척은 내가 있어도 종서가 없으면 되지 않았을 일이며, 종서가 있어도 내가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야" 라며 총애받았던 인물, 명재상 황희에게 "내 뒤를 이을 인물은 단 하나, 종서 뿐이다" 라고 극찬받았던 인물, 두만강변을 평정하고 육진을 개척하며 고려사를 개수했던, 문무에 모두 능통했던 충신 중의 충신 김종서는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절재 김종서.


그의 생애는 장중하면서도 화려했다. 충절, 거목, 원훈 등의 찬사를 받기에도 모자람이 없는 인품이었다. 그는 고려 왕조가 망하기 2년 전인 공양왕 2년 도총 김제추의 아들로 태어나, 조선조 태종 5년 약관 16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고 관직에 등용된 엘리트였다. 그는 말 그대로 문무를 겸비한 준재였고, 태종-세종-문종-단종 네 임금을 지척에서 모신 명재상이었다.


임금의 비서격인 대언을 비롯하여 내직은 언제나 문반이었고, 함길도 도절제사와 같은 외직으로 나가면 무반으로서의 책무를 완벽히 수행하여 후진들로부터 끊임없는 존경을 받았다. 단종조에 이르러 권력의 정점에 섬으로써 국정을 전횡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으나 그의 강직한 성품으로 미루어 볼 때 이는 흔들림 없이 국사를 운영하려던 그의 태도를 오해한 것으로 사료된다.


64세. 백두산 대호 김종서는 그렇게 아들 김승규, 김승벽과 함께 일찍이 그 자신이 노래했던 "삭풍은 나무 끝에서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 와 흡사한 늦가을 찬바람 속에서 멸문의 화를 입었다. 그의 부재는 곧 단종시대의 종말을 예고했고, 이로써 조선 왕조는 급격히 난세로 빠져들게 되었다.


임금도 장상도 한번은 죽어야 한다. 생애가 아무리 아름답고 화려했다고 할지라도 그 죽음까지 아름답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죽음은 오로지 비통할 뿐이다. 그러기에 절재 김종서의 죽음이 더더욱 한없는 아쉬움을 남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공주의 남자]는 김종서의 퇴장과 함께 '제 2라운드'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승유와 세령의 사랑은 더욱 비극으로 치달을 것이고, 수양대군 일파의 왕위 찬탈 음모도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과연 [공주의 남자]는 이 역사적 비극을 어떤 식으로 담아낼 것인가. [공주의 남자]의 내용이 자못 궁금해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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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7788dud 2011.08.18 07: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재밌는 드라마 하나 건졌네요. 이렇게 알아 듣기 쉽게 글을 써 주시니 감사합니다 '공주의 남자' 정말 궁굼합니다 기다려지네요.

  2. 2011.08.18 08: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종서에 대한 평이 너무 치우쳐져 있네요
    조선왕조실록을 직접 읽어보셔야 할 듯

  3. 와우 2011.09.02 00: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궁금했었는데, 좋은 자료 올려 주셔서 감사해요! 김종서의 최후는 정말 비극적이고 슬프네요 ㅠㅠㅠ

  4. 으갸갸 2012.01.02 18: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흠~~~
    역사란 진짜 누구의 입장에서 쓰느냐에 따라 해석이 많이 달라질수 있을듯 하네....
    한 나라의 왕은 가장 큰 힘과 이엄을 갖 춰야 국가가 안정될듯함.
    문종이 가장 큰 잘못, 어리석은 짓을 한것 같다...자기 어린 불쌍한 자식을 위해서라도 욕심을
    버리고 동생에게 정당하게 임금자리를 내주었으면, 조선왕조의 많은 피비린내나는 역사를
    접할 필요가 없었을텐데....
    한 나라의 권력을 잡는것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생존권의 문제이니....늬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을수밖에 없는 운명들....이런때는 그저 아주 평범한 가늘고 긴 삶을 살수있는 우리
    민초가 훨씬 낳은것도 같음.



[공주의 남자]가 날이 갈수록 재밌어지고 있다.


문종 승하와 함께 수양대군과 김종서의 2라운드가 시작된 가운데 김승유와 세령, 그리고 신숙주의 아들인 신면이 삼각관계를 형성할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


극 중 수양대군은 신면을 가리켜 자신의 딸인 세령에게 너와 정혼을 할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이 쯤에서 궁금해진다. 과연 실제 역사 속 수양대군은 신숙주와 사돈을 맺었을까
.



수양대군과 신숙주의
사돈관계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실이 아니다. 이는 드라마의 픽션일 뿐, 실제 역사 속 수양대군의 딸이 신숙주의 아들에게 시집간 일은 없다. 수양대군의 딸은 의숙공주 하나 뿐 이었는데 의숙공주는 신숙주의 아들이 아닌 정인지의 아들인 정현조에게 시집갔다가 후사 없이 요절했다. 의숙공주 뿐 아니라 수양대군의 자식들은 대부분 요절했는데 도원군(훗날 추존왕 덕종)과 예종이 그러했다.


아마 [공주의 남자]에는 나오지 않을 것 같지만 수양대군의 진짜 사돈은 신숙주가 아닌 최측근 한명회였다. 훗날 세조가 된 수양대군은 자신의 손자인 자을산군과 한명회의 막내 딸을 혼인 시켰고 공식적인 사돈관계가 됐다. 자신을 왕위로 밀어올린 공신들을 가족처럼 대했던 세조이지만 실질적으로 진짜 인척관계를 맺은 것은 장자방 한명회가 유일했다. 한명회에 대한 세조의 신임이 어땠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부분이다
.


한명회의 막내 딸과 결혼했던 세조의 손자 자을산군은 훗날 성종이 되었으니 한명회는 세조와 사돈관계를 맺음으로써 임금의 장인이라는 명예로운 자리까지 확보하게 된 셈이다. 그의 막내 딸 공혜왕후 한씨는 후사 하나 없이 어린 나이에 요절했으나, 한명회를 신임했던 성종은 그를 오랜시간 중용했고 성종의 할머니와 어머니인 정희왕후와 인수대비 역시 그에 대한 신뢰를 져버리지 않았다
.


특히 성종조 초기에 어린 성종을 대신에 수렴청정을 한 정희왕후는 자신의 수렴청정을 뒷받침 할 제도적 방법으로 원상제를 도입해 한명회, 신숙주 등에게 국가 권력의 대부분을 의지했으니 한명회로선 왕실에 딸을 바치고, 권력을 얻은 셈이 됐다. 모르긴 몰라도 공혜왕후가 천수를 누리며 자식까지 낳았더라면 한명회의 부귀영화는 대대손손 계속 되었을 것이다
.


그렇다면 과연 신숙주의 사돈은 누구였을까. 재밌게도 신숙주 역시 한명회와 사돈을 맺었다.


신숙주는 여덟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 맏아들인 신주가 한명회의 첫째 딸과 혼인했다. 이 결혼 또한 세조가 적극적으로 나서 성사된 것이다. 세조는 당대 최고 권신이자 참모들이었던 한명회와 신숙주를 혈연으로 맺어둠으로써 혹여 자신도 모르게 벌어질 반란의 싹을 애초에 잘라버리려 했다. 이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한명회와 신숙주는 죽는 그 날까지 세조 일족에 충성을 다했다
.


사돈관계로 맺어진 신숙주와 한명회는 부귀영화와 정치적 고비를 함께 겪어 넘으면서 둘도 없는 친구사이로 발전했다. 세종조부터 집현적 학자로서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던 신숙주와 칠삭둥이 경덕궁지기 였다가 벼락 출세길을 걷게 된 한명회는 얼핏 보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으나 세조를 위시한 쿠데타 세력이라는 명분은 그들을 운명공동체로 만들었다. 신숙주와 한명회가 주고받은 여러 편지에는 개인적인 친분 관계를 넘어 혈맹에 가까운 우정이 느껴진다
.


[공주의 남자]와는 달리 실제 역사 속 세조와 신숙주는 직접적인 사돈관계를 맺진 않았다. 그러나 한명회를 중심으로 한 그들의 관계는 사돈관계 그 이상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세조는 신숙주에게 항상 나와 자준(한명회)이 사돈이고, 자준과 범옹(신숙주)이 사돈이니, 나와 범옹 또한 사돈이 아닌가.” 라고 말하곤 했다. 세조는 비대해진 공신 세력을 항상 두려워했고, 이 두려움을 공신 세력의 컨트롤 타워인 한명회와 신숙주와의 사돈관계를 통해 제거하고자 한 것이다
.


과연 드라마 [공주의 남자]는 실제 역사 속 이들의 미묘한 관계를 어떤 식으로 풀어나가게 될까.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니 김승유와 세령, 신면이 만들어 내는 비극적인 삼각관계에도 주목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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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박팬 2011.08.05 17: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연히 지나다 정말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왜? 이렇게 수준 높은 문화연예글은 소외되고 자극적이고 초딩감상문 수준의 글만 메인에 뜰까요?
    이러니 다음블로그에 대한 인식이 수준 이하라는 지적이 많아지는 상황이죠.
    드라마 리뷰도 이 정도는 되어야 독자들께 읽혀도 부끄럽지 않을 듯 합니다.

    • 버들 2011.08.05 22: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동감입니다. 날이 갈소록 사극이 픽션화 되고 있어 이런그들이 더 빛을 발하면 좋겠네요..

  2. 미소 2011.08.05 21: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종-세조의 둘째 아들-의 첫째 정비인 장순왕후가 한명회의 셋째 딸 입니다. 이걸 먼저 써야 하지 않을까요?

  3. 아령아 2011.08.19 01: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글 잘읽고 갑니다~

  4. 조이아 2011.09.09 03: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조의 좌장이자, 한명회의 절친 권람도 사사로이는 한명회와 사돈관계...권람의 여동생이 한명회의 제수씨죠. 진짜 세조-한명회-신숙주-권람은 형제나 다름없는 운명공동체!!!

  5. 배신자 2011.09.13 21: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는 드라마가 아니고. 진실을 말하여야 한다.



[공주의 남자]의 시청률이 폭등했다.


9~10%대에 맴돌던 시청률이 [시티헌터] 종영과 함께 무려 8% 가까이 오른 것이다.


이로써 [공주의 남자]는 [시티헌터] 종영의 최대 수혜자이자, 수목 드라마 전쟁에서 값진 1승을 거두게 됐다.


그런데 [공주의 남자]를 보다보면 다소 아쉬운 부분이 눈에 띠는데, 그 중 가장 불편한 것이 바로 '깡패두목'처럼 그려지는 한명회의 모습이다.


[공주의 남자]에서 이희도가 연기하고 있는 '한명회'의 모습은 천박하고 경망스럽기 그지 없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저잣거리 깡패들을 끌고 가 대신들을 협박하는 건 물론이요, 비열한 웃음을 지으면서 온갖 악행은 다 저지르고 다닌다. 마치 조폭 집단의 '행동대장'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수양을 둘러싼 대부분의 인물이 그렇지만 한명회의 모습은 특히나 극악무도한 인간성 상실의 냄새를 뿜어낸다.


그런데 아무리 '작가의 재창조'라고 해도 이건 너무 과한 것 아닌가 싶다. 이효정이 연기하는 신숙주가 진중하면서도 출세지향적인 양면성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에 반해, 한명회 캐릭터는 너무 1차원 적인데다가 그에 대한 폄훼가 도를 지나칠 정도로 심하다. 수양대군이 "나의 자방" 이라고까지 칭했던 한명회가 이런 식으로 단선적으로 그려지는 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공주의 남자]는 수양대군의 '브레인'을 신숙주로 설정하고 있지만, 실상 수양대군의 최측근이자 최고참모는 누가뭐래도 한명회였다. 절친한 친구였던 권람의 소개로 수양대군과 운명적으로 조우한 뒤,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수양대군과 그 일족을 지척에서 보필했던 그는 조선 역사를 통틀어 가장 도드라진 길을 걸은 대훈신이요, 지략가였다.


한명회는 수양대군파의 '컨트롤 타워'였다. 김종서 제거, 단종 제거, 세조 즉위 등이 모두 한명회의 머릿속에서 구상됐고 이는 그대로 피 비린내 나는 조선의 역사가 됐다. 수양의 측근 가운데 그는 가장 적극적인 인물이었다. 김종서 제거를 다소 망설이는 수양을 '계유정난' 의 역사 한 복판으로 밀어 넣은 것도 그였고, 살생부를 직접 작성해 김종서와 함께 단종 사수파의 최고 권신이었던 황보인 등을 주살한 것도 그였다. 수양대군이 한명회를 일컬어 "나의 자방" 이라고 한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한명회는 수양대군을 왕위로 옹립하는 데도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숙부와 조카 사이였던 세조와 단종 사이에서 세조가 단종을 폐위하고 이어 사사하는데 가장 혁혁한 공을 세웠다. 단종을 지지하는 파에서 보면 한명회만한 '역적'이 없었으나, 세조 입장에서 보면 한명회만한 '공신'이 없었다. 훗날 사육신이 된 성삼문이 "모두 다 죽일필요도 없이 한명회만 죽이면 일은 끝나게 되어 있다" 고 이야기 한 것도 한명회가 차지하는 비중이 그 어떤 측근들보다도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한명회는 '권력욕의 화신'이었다. 정상적인 방법으론 쉽게 출세할 수 없었던 그는 왕위에 야욕을 가진 수양대군을 보필하며 국가 체제를 완전히 전복시키는 것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180도 바꿔 버렸다. 그는 말년을 제외하곤 언제나 국가 권력의 최정상에 올라가 있었다. 3번의 공신책봉, 2번의 영의정 재임에도 모자라 자신의 딸을 왕비로 올리고, 사돈이었던 정희왕후-인수대비와 결탁해 국정 전반을 총괄했던 그의 존재감은 조선조 어떤 대훈신보다도 묵직한 무게감을 선보이고 있다.


허나 아이러니하게도 한명회는 대단한 '권력가'였으나, 역사에 길이 남을 '간신'은 아니었다. 특히나 [공주의 남자]에서 보여지듯 악행만을 저지른 인물은 더더욱 아니었다. 물론 단종의 입장에서 보자면 한명회가 간신일수도 있겠다. 하지만 단종 이 후, 세조-예종-성종을 보필했던 한명회의 모습은 간신배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한명회는 세조 재위 시절 함경도, 평안도 등의 북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지방을 전전하는 일이 가장 많은 사람이었다. 희대의 권신이었지만 그가 재물축적에만 열을 올리고, 국정을 전횡하는 등의 간신배는 아니었단 이야기다. 한명회는 자진해서 불안정한 지방을 안정화 시키기 위해 도성을 비우는 일이 잦았고, 또 한 번 맡은 일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최선의 결과를 뽑아내는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는 동시에 성삼문 등 사육신들이 일으킨 '단종 복위 계획'을 무산시키고, 반대파를 제거함으로써 체제 안정을 꾀하는 과단성을 선보였던 그는 예종조와 성종조에는 정승의 자리에 올라 국정 전반에 대해 임금에게 고언을 아끼지 않는 역량있는 원로였다. 특히 성종조에 내탕금이 바닥나는 등 왕실의 재정 상태가 심각해지자 자신의 전 재산을 문서 편찬과 왕실 안정을 위해 바치는 등 조선 왕조와 체제 안정에 대한 한명회의 열망은 거의 절대적인 것이었다.


사실 조선왕조의 역사에서 한명회만큼 극단의 평가를 받는 이도 드물 것이다. 악행만큼 공도 많고, 과실만큼 업적도 많은 그의 행보는 이렇다 저렇다 하는 흑백논리로 평가하기에는 다소 어려운 성질의 것이다. 그렇기에 [공주의 남자]처럼 한명회를 극단적이면서 단편적인 '악인'으로 몰고가는 건 조금 지양할 필요가 있다. 특히나 한명회처럼 역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실존인물이라면 그 존재감에 맞는 합당한 인물 설명과 성격 묘사를 하는 것이 옳다.


이제 [공주의 남자]는 수양과 김종서의 대결이 격화되며 훨씬 비극적인 상황에 치닫게 될 것이다. 이 가운데에서 지금까지 '깡패두목'처럼만 보여졌던 한명회가 어떤 매력으로 극 중에 등장하는지 살펴보는 것도 나름의 관전포인트가 될 듯 싶다. [공주의 남자]의 고군분투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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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헐... 2011.08.07 04: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희도씨 역이 한명회라고요?? 제가 알고 있던 사실과 너무 달라 생각도 못했네요..드라마를 즐겨 보는게 아니고 대충 채널 돌릴때 하면 보는 타입인지라..
    헐... 작가 완전 역사의식 없나봐요 ;;

  3. 역적 때려잡기 2011.08.07 11: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명회는 자기 딸들를 마치 포주 처럼 이놈저놈주고 자기가 출세한 포주놈 같은 행실도 있다.

    • 어리석기는.. 2011.09.22 03:59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시절에는 다만 한명회만 딸을 정략결혼했을까?
      이미 당신은 작가가 보여주는 연출의도에 흘러들어간 사람일뿐

  4. 간적한명회 2011.08.09 23: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왕권강화를 명분으로 거병했으나 정작 유생.학식있는 신하들의 지지를 받지못하고 정권자체가 정통성이 없었기에 능력있는 학자들을 처형한 반역자요 한명회같은 계유정난 꼴통공신들에게 철저히 의지하여 자기 스스로 자기거병의 명분을 배신한 인물이 세조요... 세조사후 계유정난공신들이 판치는 시스템을 물려준게 세조임다 왕권강화? 풉..지나가는 개가 웃을 노릇... 한명회를 부관참시한게 연산군의 유일할 업적아닌가 그생각까지 들게 만드빈다

  5. 2011.08.11 17: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전에 한명회라는 드라마에 주인공이 이덕화씨였었나 인상 깊었는데 말이죠. 그 이미지가 파격적이면서 지략가였던 것 같아요. 주인공으로 다룬거니까 당연하긴 하겠지만 근데 정말 오래 산단 느낌도... 연산군 나오는데에서도 한명회 묘비를 파헤친다던가 이런 식으로 언급됬던 것 같은데..

  6. 시대에 따라 인물을 보는 눈 2011.08.11 23: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명회가 대단한 지략가로서 역사극에서 멋지게 그려졌던 시대가 바로 전두환 노태우 정권때였죠.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시대.... 아마 서로 비슷한 점들이 많아서??? 한명회를 마치 대단한 위인처럼 그렸던 것은 아닐지... 님은 그 시선에 너무 동화되어있었던게 아닐까요?
    역사를 바라보는 눈을 기르셔야할 듯... 개인의 권력욕과 야망이 한 사람의 목숨보다도 더 소중한 것인지? 세조의 반정과 현대의 쿠데타가 과연 국가와 국민의 번영을 위한 것이었을까요? 개인의 영달과 부귀영화를 향한 권력욕의 결과였을까요?

  7. 유현수 2011.08.16 21: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혹시...이 글 쓰신 분 한씨신가요? 역사관이 지나치게 주관적이신듯 보입니다. 다른분들 댓글 내용대로 한명회의 지략이란 것이 깡패와 다를것이 무엇입니까? 상기 드라마에서 작가의 설정이 약간 치우친 점은 인정되나 실망스러울 정도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 정도는 창작의 묘 정도에서 인정되어 보여집니다.

  8. 유현수 2011.08.16 21: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혹시...이 글 쓰신 분 한씨신가요? 역사관이 지나치게 주관적이신듯 보입니다. 다른분들 댓글 내용대로 한명회의 지략이란 것이 깡패와 다를것이 무엇입니까? 상기 드라마에서 작가의 설정이 약간 치우친 점은 인정되나 실망스러울 정도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 정도는 창작의 묘 정도에서 인정되어 보여집니다.

  9. 역사관이 왜 그따구냐 2011.08.26 16: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명회는 권신 그 이상 이하도 아님 오늘날로 치면 독재자에게 빌붙어 착취하던 자를 훌륭하다 칭송하는꼴.. 한명회의 공? 자기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온갖 악행을 저지른 것도 공이라 봐야하나? 한명회는 그런 공도 얼마 없음. 오히려 훈구척신들을 양성해서 훗날 조선의 정치를 혼란에 빠뜨리게 한 놈인데 얼어죽을.. 역사관이 왜 그따위임 헛공부했네 제대로 좀 하길

    • 역사관? 2011.09.22 04: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당신이나 똑바로 공부하시오.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니..
      글쓴이 말대로 정말 1차원적이군요!!!!
      드라마보고 좀 감정잡으시는것같은데. '한명회'라는
      드라마도 한번 보시지요. 드라마보고만 믿는거 같으니까..ㅋㅋ

    • Urchin's Dad 2011.09.30 17:11  댓글주소  수정/삭제

      싸우지 마로.여의도 바보들처럼^.^ 국사공부를 하는 셈치고 사극을 보시라구요. 명태라는 울 가곡은 어떠하오? 그 곡은 한 때 금지곡이었다오.

  10. 주동현 2011.08.31 23: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본문도 잘 읽었고 덧글도 더더욱 잘 읽었네요.나름대로의 균형잡힌 사고를 하게 되었지만 한명회가 벌인 피바람을 그이후에 약간의 치적으로 덮을순 없다고 생각되네요

  11. 시리우스 2011.09.09 16: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공주의 남자를 매번 보지는 않아서 이희도씨가 한명회역이었다는 건 몰랐지만요. 님의 역사관은 좀 더 성숙해져야 할 것 같네요.
    역사관이 주관적이신 것 같아요. 위의 유현수님 말씀처럼 혹시 글 쓰신 분이 청주 한씨인게 아닌지 궁금하군요...- -

  12. 윤아름 2011.09.15 09: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님같은분이 조선시대에 태어나셨다면 신숙주 한명회 김질 이되는거임ㅋ

  13. 한기영 2011.09.15 14: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주 공감되는 내용입니다 회사에서 요즘 공주의 남자 때문에 핍박 당하고 있었는데..ㅜ,ㅜ

  14. 한명회는 역적 맞습니다 2011.09.18 16: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객관적으로 역사공부를 한다면 한명회는 조선 최악의 패륜적인 인물입니다
    지략가? 책략가? 말도안됩니다. 공주의남자가 픽션이라고 하는데 오히려
    역사인물에 대한 묘사는 잘 하고 있는것 같습니다만..

    • Urchin's Dad 2011.09.30 17: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비목이란 울 가곡을 아시오? 초연이 쓸고간 깊은 계곡~
      그러면 그네라는 울 가곡은?

  15. 박종건 2011.09.19 07: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 시대 안 살아본분들 아갈 다물^^
    저도 다물고 있으니^^

  16. 2011.09.30 17: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17. Urchin's Dad 2011.09.30 17: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컨트롤 타워가 아니고 쉽게, 우리말로, 책사, 안평대군의 책사는 이현로임.
    삼국지를 한 번이라도 읽어 보시고. 공명, 제갈공명은 죽어서도 사마중달을 혼내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뭔말인줄 아시죠? 책과 벗하기 좋은 철입니다.

  18. 에휴 2011.10.07 10: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Urchin's dad 꼭 어딜가나 이런사람들이 있죠 남들보다 그까지거 좀 더안다고 깝죽대고 자기랑 다른의견이면 개무시하고 비꼬고 딱봐도 친구없을타입 그깟 습자지식 별것도 아닌거가지고 대단한거 안다는냥 나대지마세요 ㅋ

  19. 만약 당신이라면? 2011.10.28 20: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명회이든.. 사육신의 성삼문이든..

    그 누구던간에.. 당신이 바로 그였다면...

    누구나 시대적인 상황이 있는것이고.. 그 상황을 이해하고 행동했을것입니다.

    역사를 두고.. 옳고 그름을 논하다 보면.. 명확히 밝힐수 있는것도 있지만..

    더욱 더 혼란스러워지는것도 있지요...

    그 시대의 상황을 이해하고 인물을 평가하세요..

    만약 당신이 그들이였다면....????

  20. 나도1500억원 2011.11.20 01: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500억원만 투척하면 자연스레 대통령직에 다가설텐데.
    수양처럼 한명회처럼 피뿌리지않고...
    1천500억원만 뿌릴 수 있다면...정치에 문외한이고 도와주는 정치인들 주변에 별로 없어도...대통령으로 뽑아줄 10대 20대 30대 많으니 될 수 있을텐데.
    인상도 선하고 말도 제법 잘 하고 은근히 신뢰감도 가는 타입인데...사회에 환원할 1500억원이 없네 ㅠ.ㅠ

    아니 그럼 암에 걸렸어도 의사한테 가지말고 인상도 선하고 말도 잘하며 기부도 잘하는 김장훈에게 가서 수술해달라고하지 왜...

    나라경영같은 중차대한 일도 인상선하고 생각참신할것같은 정치초보자에게 맡길거면...
    그나저나 난 황금어장보고 황금을 돌같이 보며 참신하고 진취적인 사고로 하루하루를 열심히 사는 뛰어난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정말 좋아했더니...
    하기야 3천억원이 넘는 돈을 가지고 이자와 배당금만으로 사회1%의 삶을 살고 있으니 그렇게 여유로웠겠지 ㅠ.ㅠ

    그것도 대선의 유혹이 현실에 가까워지니 반 뚝떼서 투척하는 과감함도 가진 야망인이었네 ㅠ.ㅠ

    아 진짜 실망아닌 실망이다.

  21. 안티 Urchin's Dad 2011.12.23 04: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Urchin's Dad 이분.. 글쓰는거 정신분열증 환자같다.. ㄷㄷ
    지 정신세계를 표현하기전에 남들한테 말하는 화법부터 고쳐야할듯.. 졸라 유식한척하면서 실상 별것도 없는 빛좋은 개살구일뿐인데 유식한척만 쩌는 사람임..




고현정의 컴백작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선덕여왕] 이 처음부터 대박조짐을 보이고 있다.


특히 1회에서 보여준 진흥왕의 죽음과 여걸 미실의 등장 등은 많은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는 상황.


1회에서 미실은 진흥왕을 독살하기 직전까지의 상황에 내몰리며 "내 손으로 당신을 죽이지 않게 한 것에 감사하다." 라고 읊조린다.


그렇다면 과연 이 나라 역사에서 미실과 같이 '임금' 을 독살하고자 했던 여성이 있었을까. 믿기 어렵겠지만 임금을 독살하고자 하는 시도는 삼국시대, 고려왕조 뿐 아니라 조선왕조에서도 비일비재했다. 특히 여성성이 억압되어 있던 조선왕조에서 권력을 차지하고자 몸부림쳤던 여걸들의 임금 독살은 대단히 주도 면밀하게 이루어졌다.


이쯤에서 궁금해진다. 역사 속 임금을 '죽이고자' 했던 역사 속 여인들의 모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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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비가 되기 위해 시동생의 죽음을 기도한 여인, 소혜왕후 한씨



순종적인 며느리, 엄격한 어머니, 잔인한 할머니라는 세 가지 운명을 타고 난 소혜왕후 한씨는 성종조 '윤비 폐출 사건' 으로 연산군의 비극을 만들어 낸 격랑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여성이다. 우리에게는 '인수대비' 라는 이름으로 더욱 친숙한 그녀는 젊은 나이에 중전의 자리를 목전에 두고 세자였던 남편의 죽음 때문에 궐 밖으로 쫒겨 나와야만 했던 비운의 삶을 산 여인이기도 하다.


사실상 원론적으로 따지자면 남편을 잃은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궐 안으로 돌아올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둘째 아들을 임금의 자리에 올리고, 스스로 대비의 자리를 쟁취함으로써 궐 밖으로 나간지 불과 10여년 만에 화려하게 정치적 일선에 복귀했다. 그리고 그 험난한 '정치적 복귀' 의 뒷면에는 시동생 예종의 죽음을 싸늘하게 지켜봐야만 했던, 냉정하고 섬뜩한 정치적 함수관계가 숨겨져 있었다.


세조의 죽음 뒤, 당시 수빈이었던 인수대비는 자력으로 자신이 정치 일선에 복귀하는 것은 '불가' 하다고 생각했다. "중전은 못 되어도 대비는 되고자 했던" 그녀에게 남아있는 것은 바로 병약한 시동생 예종의 요절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허약했던 예종을 오랜 시간 지켜 본 그녀는 예종의 장수를 빌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죽음을 기도하고 재촉했다. 예종의 죽음이 곧 자신의 '부활' 임을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수빈(인수대비)는 사돈이었던 한명회, 대훈신 신숙주와 결탁해 예종을 정치적으로 압박했다. 그 결과 '세조 능묘 파문' (세조의 능묘를 석실로 하자는 수빈의 의견이 받아들여진 사건)이 일어났고 이것이 수빈에게는 결정적으로 정치적 일선에 복귀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수빈의 부활은 곧 예종의 추락이었다. 예종의 왕권은 궐 밖에 나가있는 형수에게조차 무시당하는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추락했고, 이런 정치적 타격은 그의 건강을 더욱 악화시켰다.


결국 건강이 갈수록 악화일로로 치달았던 예종은 크고 작은 정치적 상처들 속에 큰 소리 한 번 내보지도 못하고 재위 1년만에 죽음을 맞이했다. 예종의 모후였던 정희왕후조차 "주상의 병이 이토록 심했는지 감히 짐작조차 못했다." 고 할 정도로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김인호 교수는 예종의 죽음에 대해 "결국 예종의 세력은 훈구 세력을 등에 업은 수빈(인수대비)의 세력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리하여 예종은 '암살' 이라는 여운을 남기며 요절하였고, 자신의 아들이 아닌 수빈의 둘째 아들에게 왕위를 넘길 수 밖에는 없었다." 고 평가했다.


어쨌든 예종의 죽음은 수빈의 부활이었고, 곧 '궁궐의 제왕' 인수대비의 등장을 알리는 서막에 불과했다. 훈구세력을 등에 업고 시동생 예종의 죽음을 재촉했으며, 암살이라는 여운까지 남기며 자신의 둘째 아들을 왕위에 올렸던 그녀의 정치적 결단은 이렇게 시어머니 정희왕후의 권력욕과 사돈 한명회의 정치적 야심과 결탁하여 최선의 선택으로 자리했다.


'충효' 가 강요되던 조선 왕조에서 시동생이자 한 나라의 임금인 예종의 죽음을 바라보며 어쩌면 인수대비는 그 누구보다도 기뻐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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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비정한 계모, 문정왕후 윤씨



조선 왕조 두번째로 수렴청정을 하면서 그 어떤 왕실 여인들보다 막강한 위세를 누렸던 문정왕후 윤씨의 그 대단한 '권력' 의 이면에는 아들을 죽이고 권력을 쟁취해야만 했던 어머니의 무서운 야욕이 숨겨져 있다. 물론 문정왕후에게 죽임을 당한 인종은 문정왕후의 '친아들' 은 아니었지만 법적 관계로만 따지자면 인종과 문정왕후 만큼 가까운 사이도 없었기에 문정왕후에 의한 '인종 독살' 은 더더욱 충격적인 사건으로 받아 들여진다.



중종의 죽음과 함께 인종이 즉위하고, 인종을 위시한 '대윤' 이 정치판을 장악하자 대비였던 문정왕후는 인종을 죽이는 것을 통해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대윤 세력을 일거에 제거했다. 인종이 세자에 있을 때부터 동궁전에 불을 지르는 등 예종 암살에 열을 올렸던 문정왕후는 끝끝내 윤리와 강상이 치도의 근본이었던 조선 왕실의 한 복판에서 임금에게 독이 든 떡을 먹이는 것으로 자신의 위치를 보장 받을 수 있었다.



'인종 독살' 은 아직까지 확인된 바 없는 '설' 정도로만 전해지고 있지만 정황 상 문정왕후가 인종을 독살할 이유는 충분하다고 보여진다. 인종의 죽음은 그녀에게 궐 안에서 대적할 수 없는 왕실 최고의 어른임을 확인시켜 주는 동시에 수렴청정이라는 막강한 권력까지 안겨다 줄 수 있는 최고의 시나리오였다. 그리고 결국 문정왕후는 무시무시한 독살 계획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스스로 거행함으로써 일종의 정치적 쿠데타를 내부적으로 확실하게 매듭지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여걸의 자질이라 할 만 했다.



그러나 그 담대한 자질이 조선 왕조를 위한 대승적 결단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과 친아들의 지위 보장을 향한 '그릇된 모정' 에서 시작 되었다는 것은 대단히 아쉬운 일이다. 천수를 누린 문정왕후의 죽음 뒤에 훗날 사관들은



"문정왕후는 천성이 엄의嚴毅(엄격하여 굳세고 사나움)하여 비록 상(명종)을 대하는 때라도 말과 얼굴을 부드럽게 하지 않았고 수렴청정한 이래로 무릇 설시設施(임금이 정사를 돌보는것)하는것도 모두 상이 마음대로 하지 못하였다. 불교에 마음이 고혹되고 환관을 신임하여 나라의 재정을 다 기울게 했고, 승도僧徒(스님들)들을 봉양하고 남의 전지와 노복을 빼앗아..... 게다가 권세가 외척으로 돌아가 정사가 사문私門 에서 나오고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지며 기강이 문난해지고 국세가 무너져서 장차 구언하지 못하게 되었다."



라고 혹평했으니 비정하고도 치열했던 권력에의 집착은 결국 이러한 비극만을 나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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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목대비가 지목한 '선조 독살' 의 주범, 김개시.



조선 왕조에서 임금의 '수라' 는 언제나 독살의 위험이 천만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많은 임금은 독살을 방지하기 위해 여러가지 대비를 하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살설에 대한 의문은 풀리지 않고 계속 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선조의 독살이다. 변덕 많고 의심 많았던 아버지 선조에게 끊임없이 시달림을 받았던 아들 광해군이 서둘러 왕위에 즉위하기 위해서 아버지를 독살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독살설의 한 가운데에는 선조와 광해의 총애를 동시에 받았던 상궁 김개시(김개똥) 이 존재한다.



조선 후기의 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에서는 "김개시가 어여쁜 외모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광해의 총애를 독차지 했던 것은 선조의 독살이라는 광해 최대의 약점을 움켜 쥐고 있었기 때문" 이라고 했는데, 그만큼 선조의 죽음에는 선조와 김개시, 그리고 광해군의 정치적 함수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던 셈이다. 훗날 광해군에게 폐모 되었다가 복권 되었던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는 광해군과 김개시를 싸잡아서 "부살(父殺)한 것이 과연 광해와 개똥이로다!" 라며 선조 독살을 강력하게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 편에서는 선조의 죽음을 지척에서 바라보았던 인목대비의 이러한 주장은 자신의 아들을 죽인 광해군에 대한 앙갚음의 차원에서 나온 '날조된 사실' 로 치부하기도 한다. 아무리 반정으로 쫒겨 난 왕일지라도 함부로 죽일 수 없었던 조선 왕조의 법도 상 인목대비가 광해를 사지로 몰아 넣기 위해서는 '선조 독살' 이라는 누명을 씌우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인목대비의 정치적 입장은 광해군을 궁지에 몰아넣기에 충분한 사안이었고, 김개시 역시 죽음으로 이끌고 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어쩌면 '선조 독살' 의 가장 큰 수혜자는 광해군과 김개시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한을 풀고자 했던 인목대비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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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빈의 아들을 '제거' 하라, 인원왕후 김씨.



조선 왕조의 500년 역사 중 가장 '치열한' 당쟁을 벌였던 숙종 조에 춘몽처럼 지나갔던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삶과 죽음은 그대로 훗날의 아픔이 됐다. 사약을 받고 쓰러지는 어머니 장희빈의 죽음을 눈 앞에서 똑똑하게 지켜봐야 했던 경종과 그런 경종에게서 '연산군' 의 악몽을 뒤늦게 발견한 노론 세력은 이미 화해할래야 화해할 수 없는 정치적 라이벌로 추락했다. 경종은 노론 세력의 강공을 끊임없이 방어해야 했고, 노론은 숙빈 최씨의 소생 연잉군을 내세워 경종을 압박하는 지루한 싸움을 계속할 수 밖에 없었다.



경종에게 불행했던 것은 자신의 법적인 '어머니' 인원왕후 김씨가 자신의 편이 아니라 훗날 영조가 되는 연잉군의 편이었다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소론 당파였으나 지아비 숙종을 따라 노론 당파로 자리를 옮긴 뒤 열렬한 '노론주의자' 로 변신했던 인원왕후 김씨는 연잉군과 노론 세력이 궁지에 몰릴 때마다 경종을 압박해 정치적 활로를 뚫어주는 '왕실의 호랑이' 였다. 장희빈이라는 굴레 속에서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었던 경종에게 인원왕후의 차가운 냉대는 감당할 수 없는 정치적 시련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종은 재위 2년이 지나면서 눈에 띄게 왕권을 회복해 가고 있었다. 노론 세력을 침몰시키고 소론을 등용했으며 조정에도 활기를 불어 넣고자 했다. 경종의 이러한 움직임은 연잉군에게나, 노론에게나, 인원왕후에게나 반가운 것이 아니었다. 결국 그들은 '독살' 이라는 최후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원래 몸이 안 좋았던 경종이 환후로 고생하던 때에 연잉군은 평소 경종이 좋아했던 '게장' 을 수라로 올려 기어코 먹게 한다. 경종은 게장을 먹으며 "역시 연잉군이야 말로 내 진정한 형제로다!" 라며 칭찬했다지만 문제는 게장이 그의 환후와는 상극인 '치명적 음식' 이었다는 것이었다.



당시 소론 세력은 연잉군의 '왕권 찬탈' 을 우려하여 연잉군의 대전 출입을 엄격히 감시할 때였지만 왕실의 큰어른이었던 인원왕후는 이러한 소론 세력의 견제 속에서도 연잉군이 올린 문제의 '게장' 을 무사히 경종 앞에 대령할 수 있도록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인원왕후가 게장과 경종의 환후가 상극의 성격을 띠고 있는지 눈치채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녀 역시 경종의 독살에 일조한 주범 중 한명인 것은 분명한 일이다. 각본, 연출이 인원왕후였다면 주연은 연잉군이었다.



결국 경종은 4년여의 재위 기간을 끝으로 연잉군과 어머니 인원왕후에게 '불의의 타격' 하나를 얻어 맞고 그대로 하늘로 떠나고 말았다. 경종의 죽음을 끝으로 연잉군은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왕좌를 얻게 됐고, 인원왕후는 자신이 지지한 당파를 보호할 수 있게 됐다. '조선의 르네상스' 라고 불리며 일대 부흥기를 열었던 조선의 영-정조 시대는 사실 법적인 아들을 버려야만 했던 어머니의 비정함을 거름으로 자라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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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을 위해 남편을 버리다, 혜경궁 홍씨.



영조 20년 1월 9일. 열살의 '세자빈' 을 앞에 두고 장차 임금의 장인이 되는 홍봉한이 입을 열었다. "궁중에 들어가면 3전 섬김을 삼가고 조심해 효성으로 힘쓰고 동궁 섬김을 반드시 옳을 일로 돕고, 말씀을 더욱 삼가해 집과 나라에 복을 닦으소서." 어린 세자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집과 나라에 복을 닦으라." 라는 아버지의 당부를 가슴 깊이 새기고 어린 세자빈은 구중궁궐 속으로 들어갔다. 바로 이 사람이 영조와 정조, 순조의 시대를 관통한 여인, 혜경궁 홍씨였다.


이렇게 '집의 복을 닦으라.' 는 아버지 홍봉한의 말 한마디는 혜경궁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백두의 처지였던 홍봉한이 하루 아침에 세자의 장인이 되고, 숙부인 홍인한이 세도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면서 혜경궁은 자신의 가문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노론 명가로 일어나기 시작한 풍산 홍씨 가문을 위해 혜경궁은 나라와 남편과 자신을 모두 갖다 바쳐야 했다. 그것이 아버지의 성공이자, 숙부의 성공이었고 곧 자신의 성공이기도 했다.


'삼종(효종-현종-숙종)의 혈맥' 을 잇는 단 하나의 혈육, 그리고 장차 왕통을 이어나가야 할 사도세자와 세자빈 홍씨는 겉으로 보기엔 '최고의 결합' 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결합은 조선 최고의 비극을 불러 일으킬 수 밖에 없는 모순된 결합이었다. '소론' 을 지지하는 세자와 '노론' 명가의 세자빈은 섞일래야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 같은 사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남편을 바라보며 혜경궁은 남편을 버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 에서 사도세자와 영조의 사이가 처음부터 좋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사도세자의 정신병이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불편한 몸을 치유하러 나간 온양 행궁에서조차 백성들의 찬사를 받을 정도로 '멀쩡한' 인물이었다. 사도세자가 혜경궁의 말처럼 그저 '미치광이' 에 불과한 정신병자였다면 영조가 10여년 동안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길 생각은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허나 혜경궁은 이상하게도 '일관되게' 사도세자 정신병자설을 고집했다.


혜경궁은 남편의 원대한 꿈을 가장 지척에서 지켜보았다. 사도세자의 꿈은 '노론정권' 을 뒤집어 엎고 새로운 '소론정권' 을 세우는 것이었다. 썩을대로 썩어버린 노론의 뿌리를 뽑아버리고 자신을 지지하는 소론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치 역학구도를 구상하는 사도세자의 꿈은 혜경궁에게 자신과 자신의 가문을 위협하는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결국 그녀는 사도세자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노론의 '스파이' 로 활약하기로 결심했다. 사도세자의 일거수 일투족은 혜경궁의 입을 통해 궐 밖으로 빠져나갔고 노론은 혜경궁의 도움에 힘입어 사도세자 제거라는 무시무시한 음모를 아무렇지도 않게 꾸밀 수 있었다.


사도세자의 가장 큰 비극은 바로 이것이었다. 자신이 가장 믿고 의지해야 할 부인이 자신이 아닌 가문을 택했다는 처참한 상황에 영조의 어린 부인인 정순왕후 김씨가 가세하면서 사도세자의 입지는 더더욱 궁색해졌다. 사도세자는 노론이라는 강적이 밖에서 둘러 싸고 있는 위급한 형국에서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의 아들까지 낳은 부인 혜경궁과 법적인 어머니 정순왕후, 생모인 영빈 이씨 모두 바깥에서 이뤄지는 '사도세자 제거 음모' 에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베겟머리 송사가 송사 중에 으뜸' 이라는 말처럼 그렇게 사도세자는 안에서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바깥과 안에서 함께 이루어지는 공격에 영조와 사도세자는 돌이킬 수 밖에 없는 강을 건넜다. 이것은 혜경궁 역시 마찬가지였다. 운명의 그날, 사도세자는 혜경궁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내 목숨이 그 날 마칠 것도 스스로 염려하여 세손을 경계 부탁하고 왔었는데 동궁(사도세자)께서는 생각과 다르게 나더러 하시는 말씀이 '아무래도 이상하니 자네는 잘 살게 하겠네. 그 뜻들이 무서워." 하시기에 내가 눈물이 드리워 말없이 허황해서 손을 비비고 앉았더니, 이 때 대조(영조)께서 휘령전으로 오셔서 동궁을 부르신다는 전갈이 왔더라.』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혜경궁을 향한 사도세자의 원망어린 발언이다. 지금의 말로 풀자면 "나는 죽는데 이상하게도 너는 살 것 같으니 너의 뜻이 참 무섭다." 는 한탄이었다. 이어서 사도세자는 혜경궁에게 이런 말까지 남긴다. "자네가 참으로 무섭고 흉한 사람일세. 자네는 세손 데리고 오래 살려 하기에 오늘 내가 나가서 죽겠기로 그것을 꺼려 휘향을 내게 안 씌우려는 그 심술을 알겠네."


'나는 죽는데 너는 안 죽으니 이상하다.' '참으로 무섭고 흉하다' '내 아들을 데리고 혼자 오래 사려고 한다' '심술이 가득하다' 는 폭언은 10여년 넘게 자신과 함께 살아 온 부인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서슴없이 혜경궁에게 그런말을 퍼부었다. 운명의 그 날, 사도세자도 혜경궁도 사도세자가 영조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이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편을 제거할 수 밖에 없는 혜경궁과 부인의 가문에 의해 죽임을 당해야만 하는 사도세자, 그들의 만남은 처음부터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는 비극적 결합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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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죽음을 지켰던 단 한명의 여자, 정순왕후 김씨



'경종의 독살' 이라는 혐의와 함께 일어섰던 영조의 업보였을까. 그의 손자였던 정조는 즉위하는 그 순간부터 독살과 암살에 노이로제가 걸릴 정도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임금이었다. 정조 이전에도 여러 임금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의혹에 시달렸지만 정조만큼 생명을 걸고 왕좌를 지킨 임금도 드물었다. 게다가 정조는 그 어떤 임금도 겪지 못했던 '자객의 침입' 까지 받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정조가 더욱 두려워 했던 것은 보이는 '자객' 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독살' 이었다. 갑작스러운 정조의 죽음과 함께 "임금이 독살 당하였다." 는 말이 떠돌고 경상도 인동시 장시경, 장현경 부자가 정조 독살의 배후를 밝히겠다고 반란을 일으켰던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었다. 정조의 죽음 배후에는 거대 당파였던 노론 벽파 세력과 독살을 직접 진두 지휘했던 정순왕후가 존재했다.


놀라운 것은 1800년 정조 24년 6월 28일, 종기로 투병 중이던 정조를 둘러싸고 치료상의 난맥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정조 스스로 의학 지식이 뛰어난 군주였고 궁중 의원들이 즐비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조의 치료는 쉽사리 이뤄지지 못했다. 바로 정조의 최대 정적 중 한명이었던 정순왕후 김씨가 정조의 치료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기 대문이다. 궁중의 한낱 아녀자로서 임금의 치료에까지 간섭하는 것은 불경에 가까운 파격이었으나 노론 대신들은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정순왕후는 정조의 병세가 선조 병술년의 증세와 비슷하니 성향정기산이라는 탕약을 올려야 함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더욱 우스운 것은 정순왕후의 하달을 당시 도제조 이시수가 그대로 따랐다는 것이다. 의학 지식이 없는 아녀자의 말 한마디에 임금의 치료가 우왕좌왕 하는 우스운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여기에 더 나아가 정순왕후는 내시를 데리고 정조의 안색을 살피겠다며 직접 대전에 발을 들여 놓았다.


"내가 직접 받들어 올려드리고 싶으니 경들은 잠시 물러가시오." 라는 명과 함께 방 안에는 정조와 정순왕후, 단 둘이 자리잡았다. 투병 중인 임금과 그 임금을 죽여야만 사는 대비의 운명은 그렇게 결정지어졌다. 잠시 뒤 방안에서는 정순왕후의 곡소리가 들렸고 정조의 임종을 지켜본 것은 정조를 낳은 혜경궁도, 부인인 효의왕후도 아닌 정조의 최대 정적, 정순왕후였다. 이것으로 정조의 시대는 끝이났고 '수렴청정' 의 위세를 누리던 정순왕후의 시대가 열렸다.



조선 왕조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린 사건은 바로 이렇게 '허망하게'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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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 한복판에서 조선의 역사를 움직인 여성들



철저한 '남녀차별' 과 '남존여비' 의 사상으로 가득했던 조선 왕조는 누가 뭐래도 '남성들의 사회' 였다. 그러나 구중궁궐 한 복판에서 역사를 움직이고 창조한 것은 여성의 몫이기도 했다. 그들은 소리 없이 조용하게 한 나라의 군주이자 만인지상인 임금의 죽음을 목도하고, 재촉하고, 움직였다. 자신의 이해 관계에 따라, 정치적 함수 관계에 따라, 권력 투쟁의 일상 속에서 임금의 목숨줄을 가장 쉽게 움켜 쥘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임금 바로 옆에 앉아있는 왕실의 여성들이었던 것이다.



왕실 여성들이 존재하는 이상 조선 왕조는 일정부분 여성들의 치맛폭 속에서 끝끝내 벗어나지 못하는 운명이었다. 그 운명이 결국 조선의 역사를 움직였고, 왕실 여성들을 움직이게 했다. 임금의 죽음을 목도하는 것을 통해 인수대비나 인원왕후처럼 '역사적 성공' 을 거둔 인물도 있는 반면, 문정왕후나 정순왕후처럼 혹평을 받는 인물도 있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의 '정치적 선택' 은 어떻게 평가되어야 하는가?



어쩌면 그녀들의 '선택' 역시 역사가 강요했던 어쩔 수 없는 '선택' 은 아니었을까.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여성도, 남성도 아닌 그저 역사 그 자체일테니까.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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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궁금@정말.ㅜㅅ BlogIcon 어디서 돈받고 해요? 2009.05.27 01: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가 오버하는지 정확히 집어낸건지... 확신은 못하겠다.
    노대통령의 서거 원인은 현정부의 망신주기에 있다는 것이 여론이다.(여기까지 팩트)
    그런데... 은근히 꼬면서..대통령을 죽음으로 몰고간 원인을 다른곳에서 찾아볼려는 꼼수같은 황당한 뉘앙스를 풍기고 잇는 블로그다.

  2. Favicon of http://궁금@정말.ㅜㅅ BlogIcon 그렇게 살고 싶은가? 2009.05.27 01: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얼마받으면.. 이런글도 써주고.. 얼마주면.. 댓글하나 없는데 대문에 표지로 나오죠?

  3. Favicon of http://궁금@정말.ㅜㅅ BlogIcon 연예가섹션님 2009.05.27 01: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히 가십시오.^^
    전 이만 ...

  4. 글쎄요... 2009.05.27 11: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 잘 읽었습니다.
    본문내용에서 보면 정사로 확실하게 인정받은 부분이 아니라
    하나의 가설에 불과한 부분이 많더군요.
    그런 부분을 그냥 역사적 사실인것처럼 인용하는 것은
    너무 앞서가는 것이 아닐지... 실하게 보자면 역사왜곡입니다.
    요사이 사극들처럼...

  5. 혜경궁 2009.05.27 14: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른 사람은 모르겠고 혜경궁은 좀 그렇네요. 남편이 멀쩡했다고 주장하면 그 멀쩡한 남편을 죽인 시아비를 욕보이는 셈이 됩니다. 시아비를 욕 안보이면서 남편을 멀쩡하게 만드려면 남편이 실로 모반을 꾀했다는 걸 인정할 수 밖에 없죠. 그럼 아들이 문제가 됩니다. 모반자의 아들이 왕이 될 수는 없는 거잖아요. 당연 남편이 정신이상이었다고 주장할 수 밖에 없는 거죠.

  6. 음... 2009.05.27 19: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수대비도 비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물인데... 성종 치세가 워낙 태평천하였다고 평을 받아 그런지 약하네...




최근 드라마 [대왕세종] 가 본격적인 세종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왕위 계승권이 충녕에게 넘어가면서 권력 구도가 재편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해지는 것이 있다. 셋째 아들이었던 충녕대군이 조선조 4대 임금으로 조선 최고의 '성군' 이 되었을 때, 아버지의 버림을 받고 왕위 계승권을 박탈 당했던 첫째 아들 '양녕대군' 은 어떻게 됐을까. 왕위 계승권을 빼앗긴 형과 본의 아니게 빼앗을 수 밖에 없었던 동생 사이에는 조금의 갈등도 없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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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사에서는 태종의 첫째 아들이었던 세자가 태종의 마음이 충녕 대군에 있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광증' 을 보여 왕위를 동생에게 양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그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세자에게 '광증' 이 있었던 것은 사실로 보이고, 태종 역시 그런 아들을 탐탁치 않아 한 것 또한 사실이었다. 태종에게 있어서 세자에게 왕위를 넘기는 것은 일종의 자살행위였고 결국 일종의 탄핵 처분을 통해 세자를 폐위하고 셋째 아들 충녕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익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양녕대군' 이고, '세종대왕' 이다.


양녕대군은 처음부터 원자이자 세자의 위치에 줄곧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양녕대군' 으로 불리지는 않았다. 그가 양녕대군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세자의 자리에서 내려왔을 때 부터인데 양녕의 뜻이 사양할 양 (讓), 편안할 녕(寧) 즉, "(세자의 자리를) 양보함으로써 편안하다." 는 뜻임을 살펴 볼 때 '양녕대군' 이라는 호칭은 그의 운명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칭호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그는 세종에게 왕위를 '양보' 했을지언정 '편안' 한 삶을 살지는 못했다. 권력의 정점에서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폐위' 된 세자의 앞날이 가시밭길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광증에 시달리면서 전국을 전전해야 했고, 아버지 태종의 시퍼런 서슬에 질려 왕실의 '맏어른' 으로서도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는 평생을 원하든, 원치 않든 주변의 감시와 관리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그것이 바로 '성군' 세종의 형이 걸을 수 밖에 없는 잿빛 운명이었다.


양녕대군의 운명은 성군으로서 찬란한 영광의 길을 걸었던 세종의 그것과는 정 반대의 길을 걸었다. 그는 철저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통해 동생의 '조선' 을 밝게 빛냈다. 세자에서 대군으로 강등 되며 모든 것이 부정되어 버린 상황에서 그에게는 어떠한 역할도 주어지지 않았다. 양녕대군에게는 왕실 종친으로서의 '권위' 도 '명예' 도 존재하지 않았고, 그토록 원하던 '자유' 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살아가는 것', 그 뿐이었다.


이렇듯 상왕인 아버지와 임금인 동생을 둔 '조선' 이라는 나라에서 양녕대군은 홀로 희대의 불운아로 전락했다. 누구보다 불행한 삶을 산 양녕대군이 불운의 원인 제공자인 세종에게 불만을 품지 않았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이다. 비록 그와 세종의 우애가 깊었다고는 하나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권력 구도' 재편 과정에서 파생된 희생자와 쟁취자로 구분 지어졌다. 그것이 우애 깊은 형제가 겪어버린 권력의 비정함이라면 비정함이었다.


세종은 양녕대군을 '형' 으로 각별하게 모셨지만 단 한번도 '왕실의 어른' 으로 우대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기행을 일삼았던 양녕에게도 원인이 있었지만 한 때 권력의 중심부였던 그를 견제하는 왕실, 조정 세력과 그것을 암묵적으로 인정했던 세종의 영향도 있었다. 세종에게 양녕대군은 언제나 보살펴 드려야 하는 형님이었지 왕실의 대표하는 종친은 아니었다. 이것이 또한 양녕대군의 불운이라면 불운이었다.


양녕대군은 자신의 명예 회복과 복권을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세종의 죽음' 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간파하고 있었다. 세종의 뒤를 이어 임금의 자리에 올랐던 문종이 오래지 않아 승하하고 12살 어린 임금인 단종이 즉위했을 때, 양녕대군은 비로소 자신의 '복권' 을 희망할 수 있게 됐다. 태종도, 세종도, 대비도, 대왕대비도 없는 왕실에서 '왕실의 최고 어른' 이라는 상징적 지위를 쟁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간의 명예 회복을 위해 양녕대군의 움직임은 대단히 적극적이고 치열하게 전개됐다.


양녕대군은 자신의 명예를 회복시켜 줄 인물로 어린 임금 단종이 아닌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으로 점찍었다. 양녕대군은 수양에게서 젊은 시절 권력의 주변부로 밀려나 좌절하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는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수양대군을 임금의 자리로 밀기 시작했다. 계유정난으로 시작 된 수양대군의 권력 장악 과정 속에서 양녕대군은 언제나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했다.


양녕대군은 계유정난을 통해 '영의정' 의 자리에 오른 수양대군에게 '즉위' 할 것을 간접적으로 종용했다. 양녕대군은 수양대군을 제외한 나머지 종친들, 특히 수양대군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안평대군의 사살에 동조했고 더 나아가 세종의 유일한 직계 후손인 단종의 제거에도 앞장 섰다. 가깝기로 따지면 단종과 양녕만한 관계도 없었지만 '명예회복' 을 향한 복권의 한(恨)은 그렇게 세종의 손자에게 칼날을 겨누었다. 복수로 따지자면 한없이 잔인한 복수였다.


세종이 무릎에 올려 놓고 성삼문과 신숙주 등에게 친히 "내가 죽더라도 잘 부탁한다." 며 어여뻐 했던 단종은 불과 10여년의 세월 만에 '큰 할아버지' 양녕대군의 '공세' 속에 죽음의 문턱에 다다르게 된다. 물론 단종을 폐위시키고 영월에서 죽이고 만 것은 세조(수양대군)와 그의 장자방이었던 한명회, 그리고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던 신숙주였지만 뒷배경에는 그 모든 것에 침묵했던 왕실 종친과 그를 위시한 양녕대군이 존재했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발한 금성대군, 혜빈 양씨와 같은 왕실 사람들은 모두 조용히 역사 속으로 사라질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양녕대군은 세종의 세 아들과 손자의 죽음을 목도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명예를 회복했다.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세조에게 묵묵히 뒷배를 봐주며 아낌없는 후원을 해준 양녕대군은 큰아버지의 이상의 존재였고 비로소 양녕대군은 왕실 최고 어른으로서 권위와 존경을 회복했다. 세자였던 형의 자리를 대신해 왕위에 올랐던 동생과 그런 동생을 바라보며 울분을 토할 수 밖에 없었던 형의 운명은 40여년 만에 그 후손들의 '죽음' 을 제물로 제자리를 찾게됐다.


이것이 바로 조선 최고의 성군 '세종대왕' 과 그의 형 '양녕대군' 이 맞이할 수 밖에 없는 역사의 비극이었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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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홍균 2008.05.19 09: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단종폐위에 앞장섯던사람은 성삼문이 아니라 신숙주겠지요

  2. ㅡㅡ;; 2008.05.19 09: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알기로는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세종과 양녕대군은 지극히 우애가 깊어서 심지어 세종이 몰래 궁을 나가서 함께 술을 마실 정도였고 수십번의 양녕에 대한 탄핵이 있었지만 세종은 한번도 이를 수용하지 않았는데요... 제가 보기엔 님은 역사적 근거 보다는 상황을 보고 혼자 생각하시는 듯...

  3. 강원희 2008.05.19 09: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성삼문은 아니죠 애들이 보면 어쩌시려구 ^^

  4. JEN 2008.05.19 09: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를 볼때는 누구나 상황-fact-를 보고 유추하는 것이겠지요,, 어떤 일이든 마찬가지구요. 단, 당사자에게 확인을 못할 뿐.. 저도 글쓴 분과 비슷한 견해이긴 합니다. 아무리 양녕과 충녕이 사이가 좋았기로서니,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폐위되었다면 울분이 컸겠지요. 물론 세종에게 복수를 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지만 윗글처럼 종친으로서의 대접이 없었다면 그럴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그렇지만 세조를 즉위시키는데 힘을 쓴 이유는 복수라기보다는 조선을 위하는 마음이 더 컸을거라 봅니다. ㅎㅎㅎ

  5. 강철 2008.05.19 09: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맞습니다. 왕이라고해서 모든걸 할수 있는 조선시대가 아니였기에 수십번의 탄핵을 거부한것만도 그당시엔 정적에게 베풀수있는 아량이 아니지요. 게다가 세조시대엔 단종이 너무어려 왕권약화를 염려한 양녕의 행보가 세종에 대한 반감이라고 해석되기엔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왕실 최고의 어른으로써 그만한 정치적 결정은 당연하다고 보는데요. 다른성씨가 왕이되는것 보다는 그당시 가장 정치적입지가 탄탄했던 세조를 선택해서 왕권을 강화시키는건이 시급했던 거겠죠.

  6. 수양대군이나 단종이나 2008.05.19 11: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깝기로치면 수양대군이 더 가까운데요
    수양대군도 '대군' 이듯이 세종의 아들인데...

  7. 그닥... 2008.05.19 13: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양녕대군이 계유정란때 영향력을 행사했다는건 사실이지만, 그건 힘없는 어린 단종을 앞세워 정권을 휘두르려는 김종서랑...음...생각이 안나네요...힘있는 대신들한테 정권이 휘둘려 왕권이 유명무실해져서 였다고 알고있습니다..동생에게 왕위를 양보해서라도 일으킨 조선왕조인데 그렇게서라도 지키고 싶었겠죠...후에 수양대군(세조)는 단종을 죽인 일때문에 많이 괴로워했다고 하네요..자꾸 꿈에 단종이 나타나고 해서...물론 이것도 야사겠죠^^...그래서 일시적으로 불교를 중흥시켰다 하기도 합니다...암튼 양녕대군은 무척 똑똑했던 사람인것 같아요

  8. 치우 2008.05.19 14: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충분히 가능한 가설입니다.



    단종을 사사시키라 강력하게 주장한사람이 양녕대군이라고 합니다.

    더불어 말하면 글쓰신분의 펙트가 야사에 나오는 미담보다 더 역사적인사실에 더 맞을수도 있습니다.

    양녕의 양위미담은는 실록에 나오지 않고 후대의 야사에 나오는 것입니다.


    역사는 승자가 기록하는것 이므로 승자에게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부풀려지기 마련입니다. 단종 폐위사건이 그렇고 여러번의 사화와 광해군 폐위사건이 그렇습니다. 집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실권자들이 잘못했다거나 도전하는 세력이 역도였다고 기술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들이 실권할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세종으로 세자가 바뀌는 과정에서 극적인 정통성 부풀리기는 없습니다.



    그리고 세종대는 아직 성리학이 제대로 정착되어진 시기가 아닙니다.

    이제서야 중국에서 성리학이 들어와 조선사회에 뿌리내리기 시작하려한 시기입니다. 신권에 의해서 왕권이 좌지우지한 시기가 아닙니다. 후대인 조광조가 중앙정계에 진출하는 중종때 비로소 성리학의 나라로서 시작일 뿐입니다. 사대부의 대표가 왕이다라는 의식은 조광조 이후 좀더 성리학이 뿌리를 확실하게 내린 후대였습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명종의 후사를 직계가 아닌 중종대왕의 방계(직계는 왕비소생의 왕자들, 방계는 후궁소생을 일컬음.)인 영양군의 셋째아들인 하성군을 왕위에 올리면서부터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 수 있었습니다. 말그대로 왕을 선택하여 옹립한 모양세이기 때문입니다.

    이시기는 4번의 사화를 거치면서 사림의 세력이 중앙정계까지 진출한 시기입니다. 슬슬 붕당이 생겨나기 위한 토대도 마련된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미 왕의 혈통이 직계가 한번 끊긴 상황이고 왕인 선조조차도 자신의 방계혈통에 대해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습니다. 그결과가 변덕스러운 정치적 결정으로 나타났고요.


    이처럼 후대상황에서야 신권이 강화된 시기 이지만 세종조시대는 왕권이 신권에 압선 시기입니다. 그리고 세자의 자리에서 물러난이후 양녕대군은 정치와, 권력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엇습니다. 태종의 사후전이기에 태종의 의도적인 상황연출일수도 있습니다.

    후대의 세조의 종친의 등용에서 보더라도 철저한 외면에 가까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성씨가 왕이 되려는 움직임은 세종의 업적에 의해서 시도차제가 불가능했습니다. 왕조가 성이 바뀌는가장 큰 이유가 민심을 잃고 실정을 해야 가능한 상황에서 세종이 죽은지 겨우 5년이 지났을 뿐입니다.
    문종이 세종의 치세말년 중 10년 가까이 대리청정을 했고 임금의 역활을 잘 수행했습니다. 또한 세종의 많은 업적중에 문종의 세자시절 이룩한것도 많았습니다. 단지 몸이 병약하여 세종의 근심이 있었을 뿐입니다. 게다가 단종도 어려서부터 영특하기 이를데 없어서 세종이 많이 아꼈다고 합니다. 이런상황에서 다른 성씨의 반란은 생각할수도 없었습니다. 그런 시도자체가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미친짓에 지나지 않을 사건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세종의 형제들에 대한 지극 정성은 단지 양녕대군뿐 아니라 경녕군에게 까지 미쳐있습니다. 경녕군에 대한 세종의 극진함은 양녕대군보다 더하면 더해지 모자르지 않앗습니다. 임종전에는 특별히 경녕군 사후 대한 장례를 언급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후에 경녕군이 사망하면 대군에 버금가는 후한 장례를 치러주라는 유지까지 내렸을 정도입니다. 단지 우애가 아니라 부왕의 즉위과정에서 숙부들의 죽음을 접해왔고 왕권강화를 위해 외척을 모두 쓸어버리는 독한 모습 또한 보였기에 그런 모습이 안타까웠을 수도 있었습니다. 세종의 외가인 민씨일가 외숙부들이 모두 귀양가거나 사사되어 죽었고 세종자신의 처가 또한 부왕에 의해 멸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습니다.

    굳이 병약한 맏아들을 세자로 앉힌거에 대해서는 자신이 겪었던 상황과 오버랩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자신이 왕위에 오르기 전 세자의 교체에 있어서 조정이 분열되는 모습과 나라의 기틀이 잡힌 이상 이것을 이어가야 한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엇을 겁니다.

    더욱이 세자의 능력의 출중함이 병약함을 덮어버릴 정도였기에 뒤어나기도 했고, 문종이 그렇게 세상을 빨리 떠날줄은 상상도 못했을거라 봅니다. 둘째아들이 첫째아들에 뒤지지 않게 가지고 있는 왕제로써의 자질까지 생각한다면 우려스러운 부분이지만 둘째아들의 기질이 부왕인 태종의 기질에 닮아 있어서 혼란스러운 나라상황에서는 나라의 혼란을 정리할수 있을지 언정 안정된 나라에서는 혼란을 부추길수 있다는 측면도 고려되었을 겁니다.


    게다가 손자인 단종이 어려서 영특함을 보였기에 문종이 단종이 정치를 직접할 수 있는 나이(18세정도의 연령대)까지는 무난하게 자리를 보존할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문치중심의 정치적 안정과 장자로 연결되는 왕의 정통성등으로 충분히 왕권의 강화로 연결되는 것은 눈감고도 알수있는 상황이니 말입니다. 부왕인 아버지가 장자에게 왕위계승을 하려던 목적과도 부합되는 일이기도 하구요.



    단지 문종의 병약함이 세종의 예상을 뛰어넘었고, 둘째아들의 권력에 대한 욕심이 자신의 예상보다는 훨씬 위였다는 점. 그리고 문종이 관과한 사실은 왕권강화를 위해서는 왕실의 근간인 종친들의 흔들림이 없어야 하는데 그것을 사전에 신경쓰고 조정하지 못한 결과가 세조의 왕위찬탈이 아닌가 합니다.


    더불어 생각해보자면 세조가 단종의 완제로서의 능력의 표출을 기다리지 못하고 신하들에게 휘들리는 모습만을 보고 섣불리 양녕대군의 말만을 듣고 양위를 받은게 하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양녕대군이 복수하려고 한것은 아니겠지만 당시의 실권자들중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폐위때 젊은 관료들로 적극 찬동했던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에 자극을 받지 않았나 합니다.

  9. 작은인연 2008.05.19 15: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성삼문에 대한 코멘트가 자꾸 달리는데.. 내용을 제대로 읽어 보세요..
    단종을 무릎에 앉히고 부탁했던 신하가 성삼문, 신숙주고..
    배신했던게 신숙주죠..
    성삼문은 나중에 세조를 죽이려고 했던 사육신에 포함된 분이구요..

    글 쓰신분이 제대로 적으신거 맞습니다..

    성삼문..
    5살때인가 똑똑하다고 소문나서 세종이 불렀는데..
    상으로 무거운 비단을 주면서 어찌하나 보았는데..
    허리춤에 감고 끌고 갔다죠..
    엄청난 천재로 소문이 자자 했다는..
    삼문이라는 이름은..
    태어날때, 하늘이 낳았느냐, 낳았느냐, 낳았느냐 3번 물었다고 해서 삼문이랍니다...

    어릴때 읽었던 위인전이 생생하네요....

    • 나그네 2008.05.19 16:08  댓글주소  수정/삭제

      김시습이 어릴때 세종에게 불려가서 테스트 받았습니다. 성삼문은 아니예요,^^;;

  10. 지나가다 2008.05.19 16: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태종이 양녕대군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성격과 비슷하다는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과거에 했던 일을 또 일으킬까봐 걱정해서 물러나게 했다는 이야기인데요. 결국 같은 집안사람끼리 또 피를 불렀죠...
    뭐 양녕대군이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한 원인의 하나는 신하들에 대한 증오심 때문이란 이야기도 있습니다. 세종대왕이 즉위하고 양녕대군이 야인 생활을 할때 신하들이 양녕대군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여러번 건의 했다는 겁니다. 세종대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걸 안 양녕대군이 신하들을 무지 미워했고 너무 신하들에게 왕권이 흔들린다고 생각했다 합니다. 그래서 왕실을 강하게 만들 사람으로 수양대군을 생각해서 밀었다는 이야기인데 자신의 성격과도 비슷한데가 있어서 더 호감을 갖게 되었다 하죠.

  11. 글세요 2008.05.19 16: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깝기로 따지면 단종과 양녕만한 관계도 없었지만 '명예회복' 을 향한 복권의 한(恨)은 그렇게 세종의 손자에게 칼날을 겨누었다. 복수로 따지자면 한없이 잔인한 복수였다."
    는 표현에 동의하기 어렵군요

    가깝기로 따지면(촌수로 따져봐도) 수양이 더 가깝지, 결코 단종이 가까울수는 없구요
    왕실의 어른역할은 양녕보다 더 어른이 생존하지 않았기때문에 자연스럽게 왕실의 최고어른이 된 것이지, 의도적으로 복권을 노려 결국 왕실의 어른 역할을 하게되었다는 논리는 넘 비약인 것 같습니다.

  12. 2008.05.19 16: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느정도 신빙성이 있다고 봅니다. 계유정난 뒤에 양녕이있었다는 건 어느정도 사실이기도

    하구요.. 자기 명예회복이니 뭔지는 모르겠지만 양녕대군이 가장 사랑한 조카는 자기와

    거의 흡사한(다른게 말하자면 자기 아버지 태종과 흡사한) 수양대군이였다고 하죠. 단종

    즉위와 신권의 강성화로 인한 혼란을 보고 아마 수양대군을 뒤에서 밀었겠죠.... 복수라고

    하긴 뭐하지만 가장사랑한 조카에게 왕위를 주고 싶은 마음이였을지도 모르죠

  13. 멍멍 2011.08.12 05: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른 건 모르겠으나 우선 세조실록에 양녕이 단종을 처단하라고 세 번이나 건의한 항목이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