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의 남자]가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단종시대의 최고 비극인 '계유정난'이 마무리 되며 거목 김종서가 역사의 한 페이지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특히 17일 방송에선 김종서가 생존해 있단 걸 안 수양대군이 그를 다시 한 번 제거하는 내용이 방송됐다.


그렇다면 실제 역사 속에서도 철퇴를 맞은 김종서는 살아 있었을까? 수양대군은 정녕 김종서를 두 번 죽였을까? 수양대군을 경악케 한 김종서의 생존은 진짜 있었던 일이었을까?


계유정난이 일어나던 밤, 상황은 예상보다 훨씬 급박하게 돌아갔다. 김종서의 집에 불시에 찾아간 수양대군은 김종서가 잠시 방심하던 틈을 타 철퇴로 그의 머리를 내리쳤다. '백두산 대호'라 불리던 김종서는 그 자리에 쓰러졌고, 수양대군은 다시 한 번 철퇴로 김종서를 내리쳤다. 그러나 이번에는 김종서 대신 그의 맏아들인 김승규가 맞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김종서 부자가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진 것을 확인한 수양대군과 그 일파는 서둘러 궁궐로 향했다. 궁궐로 향한 수양대군은 일거에 권력을 장악했다. 수양대군으로부터 김종서의 죽음을 전해들은 한명회 역시 분주하게 움직엿다. 그는 김종서 일파를 궁궐로 불러들여 살생부에 따라 차례로 살해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있었던 영의정 황보인이 제거됐고 민신, 조극관 등 단종에게 충성을 맹세한 인물들 또한 모두 목이 날아갔다. 말 그대로 하룻밤 새에 세상이 뒤집어 진 것이다.


수양대군 일파는 승리감에 도취됐다. '금상 위에 좌상'이라 불리던 김종서 가문을 하루 아침에 멸족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단종을 떠받들던 신료집단을 한번에 쓸어낸 것에 대한 만족감이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수양대군을 경악하게 하는 일이 벌어진다. 바로 김종서의 시신이 없어진 것이다. 김종서의 시신을 수습하러 갔다가 그의 시신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홍윤성은 기함할 수 밖에 없었다.


홍윤성은 수양대군 일파의 컨트롤 타워인 한명회에게 김종서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소식을 전했고, 한명회는 직감적으로 김종서가 생존해 있음을 깨달았다. 용의주도하고 냉철한 판단력으로 계유정난의 모든 것을 진두지휘했던 한명회였으나 이 때만큼은 다소 당황했는지 수양대군과 수양대군의 보디가드격인 임운, 양정에게 "김종서가 죽은 것을 확인하셨소이까?" 라고 몇 번이나 캐물었다 한다.


한명회의 직감처럼 김종서는 철퇴를 맞고 쓰러진 뒤에도 숨이 붙어 있었다. 4군 6진을 개척하며 '백두산 호랑이'라 불리던 천하장사 김종서였다. 철퇴 한 번으로 제거하기엔 너무나 강한 상대였던 셈이다. 김종서는 급한대로 철퇴를 맞은 부분에 응급처치를 하고 서둘러 입궐하고자 했다. 수양대군이 궁궐을 장악하기 전에 먼저 단종의 신변을 보호해야만 수양대군의 쿠데타를 막을 수 있단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김종서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도성의 8대문은 모두 수양대군에게 장악됐고, 김종서가 입궐할 수 있는 방법은 모두 차단되었다. 김종서를 태운 가마가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돈의문이었다. "환자가 있으니 문을 열어주시오" 라며 간청하는 김종서의 하인에게 돈의문 수문 갑사는 "수양대군의 명이 있을 때까진 누구도 들어올 수 없다"는 차가운 답변만을 내놓았다.


돈의문이 차단되었음을 확인한 김종서는 급히 가마를 돌려 서소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환자가 있으니 문을 열어달라는 김종서의 하인에게 "수양대군의 명이 없이는 성문을 열지 못한다" 는 답변만이 되풀이 되었다. 이 때, 김종서는 노기를 참지 못하고 "내가 일국의 좌상 김종서니라! 당장 문을 열거라!" 라고 일갈했다. 허나 문은 굳게 잠겨 열리지 않았다.


일이 틀어진 것을 직감한 김종서는 아들 김승벽의 처가에 몸을 숨겼다. 환부를 치료한 뒤 차후의 일을 도모할 생각이었다. 허나 김종서를 가만히 둘 한명회가 아니었다. 김종서의 생존을 확인한 한명회는 도성 전반을 샅샅이 뒤져 김종서의 은신처를 확보했고 양정, 이흥적, 이흥상으로 이뤄진 자객단을 보내 김종서의 주살을 명령했다. 김종서로선 수양대군 일파에 의해 '두 번' 죽게 된 셈이었다.


결국 김종서는 끝끝내 단종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수양대군 일파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됐다. 세종에게 "육진의 개척은 내가 있어도 종서가 없으면 되지 않았을 일이며, 종서가 있어도 내가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야" 라며 총애받았던 인물, 명재상 황희에게 "내 뒤를 이을 인물은 단 하나, 종서 뿐이다" 라고 극찬받았던 인물, 두만강변을 평정하고 육진을 개척하며 고려사를 개수했던, 문무에 모두 능통했던 충신 중의 충신 김종서는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절재 김종서.


그의 생애는 장중하면서도 화려했다. 충절, 거목, 원훈 등의 찬사를 받기에도 모자람이 없는 인품이었다. 그는 고려 왕조가 망하기 2년 전인 공양왕 2년 도총 김제추의 아들로 태어나, 조선조 태종 5년 약관 16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고 관직에 등용된 엘리트였다. 그는 말 그대로 문무를 겸비한 준재였고, 태종-세종-문종-단종 네 임금을 지척에서 모신 명재상이었다.


임금의 비서격인 대언을 비롯하여 내직은 언제나 문반이었고, 함길도 도절제사와 같은 외직으로 나가면 무반으로서의 책무를 완벽히 수행하여 후진들로부터 끊임없는 존경을 받았다. 단종조에 이르러 권력의 정점에 섬으로써 국정을 전횡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으나 그의 강직한 성품으로 미루어 볼 때 이는 흔들림 없이 국사를 운영하려던 그의 태도를 오해한 것으로 사료된다.


64세. 백두산 대호 김종서는 그렇게 아들 김승규, 김승벽과 함께 일찍이 그 자신이 노래했던 "삭풍은 나무 끝에서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 와 흡사한 늦가을 찬바람 속에서 멸문의 화를 입었다. 그의 부재는 곧 단종시대의 종말을 예고했고, 이로써 조선 왕조는 급격히 난세로 빠져들게 되었다.


임금도 장상도 한번은 죽어야 한다. 생애가 아무리 아름답고 화려했다고 할지라도 그 죽음까지 아름답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죽음은 오로지 비통할 뿐이다. 그러기에 절재 김종서의 죽음이 더더욱 한없는 아쉬움을 남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공주의 남자]는 김종서의 퇴장과 함께 '제 2라운드'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승유와 세령의 사랑은 더욱 비극으로 치달을 것이고, 수양대군 일파의 왕위 찬탈 음모도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과연 [공주의 남자]는 이 역사적 비극을 어떤 식으로 담아낼 것인가. [공주의 남자]의 내용이 자못 궁금해지는 이유다.

Posted by 비회원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7788dud 2011.08.18 07: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재밌는 드라마 하나 건졌네요. 이렇게 알아 듣기 쉽게 글을 써 주시니 감사합니다 '공주의 남자' 정말 궁굼합니다 기다려지네요.

  2. 2011.08.18 08: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종서에 대한 평이 너무 치우쳐져 있네요
    조선왕조실록을 직접 읽어보셔야 할 듯

  3. 와우 2011.09.02 00: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궁금했었는데, 좋은 자료 올려 주셔서 감사해요! 김종서의 최후는 정말 비극적이고 슬프네요 ㅠㅠㅠ

  4. 으갸갸 2012.01.02 18: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흠~~~
    역사란 진짜 누구의 입장에서 쓰느냐에 따라 해석이 많이 달라질수 있을듯 하네....
    한 나라의 왕은 가장 큰 힘과 이엄을 갖 춰야 국가가 안정될듯함.
    문종이 가장 큰 잘못, 어리석은 짓을 한것 같다...자기 어린 불쌍한 자식을 위해서라도 욕심을
    버리고 동생에게 정당하게 임금자리를 내주었으면, 조선왕조의 많은 피비린내나는 역사를
    접할 필요가 없었을텐데....
    한 나라의 권력을 잡는것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생존권의 문제이니....늬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을수밖에 없는 운명들....이런때는 그저 아주 평범한 가늘고 긴 삶을 살수있는 우리
    민초가 훨씬 낳은것도 같음.




"세종 같은 임금에 황희 같은 정승" 이란 말이 있다. 세종 같은 성군이 나기 위해서는 황희 같은 명재상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황희 같은 명재상이 빛을 발하려면 세종 같은 성군이 필요하다는 소리다. 이 말 한마디에서 볼 수 있듯 세종과 황희가 조선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조합' 이었음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맹사성 같은 인물이 늘그막에도 좌의정에 머물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고령의 황희가 영의정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희는 세종조를 통틀어 가장 오래 재상을 지냈을 뿐 아니라 재물이나 명예에도 욕심이 없어 '청백리' 로도 명망이 높다. 아마 황희가 세종과 더불어 많은 정치인들의 표상이 되는 것도 뛰어난 정치적 능력 뿐 아니라 세속에 물들지 않은 청렴함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청백리' 황희가 사실은 만들어진 허상이라면 어떠할까? 사실 황희는 청백리가 아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태종은 세종에게 황희를 일컬어 "그 만한 인물이 없으니 반드시 중용하라." 고 하였고, 세종은 황희를 일컬어 "그대가 있고 비로소 과인이 있다." 고 했을 정도다. 이만큼 '황희' 라는 이름은 조선 초기 나라의 기틀을 잡아가는 과정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이름이다. 양녕대군 폐위를 반대하다 잠시 쉰 때를 빼고 황희는 태종과 세종시대를 관통하는 가장 노회한 정치인이었다.


24년간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조정의 모든 일을 관장했던 황희는 모든 일을 공평무사하게 처리했음은 물론이고, 세종에게 충성을 다함으로써 조선 최고의 태평성대를 만들어내는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빛이 밝을수록 그림자도 어두운 법. '권력의 중심부' 에 있던 명재상 황희는 그 누구보다 '비리사건' 으로 탄핵을 많이 받은 인물이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황희가 사간원과 사헌부의 단골 '탄핵 대상' 중 한명으로 보일 정도로 자주 황희의 비리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뇌물수수와 관직 알선이었다. 한 지방 수령의 아들이 중앙의 벼슬자리를 황희에게 부탁하자 황희는 그에게 땅을 바칠 것을 요구한 것이 바로 사건의 발단이었다. 한 마디로 땅문서와 벼슬자리를 맞바꾸자는 거래였던 것이다.


황희의 비리를 포착한 사헌부는 그 즉시 황희의 비리 사건을 조정공론으로 확대하여 그를 탄핵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희에 대한 세종의 믿음은 변함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워낙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이 심하자 세종은 마지못해 황희를 벼슬자리에서 물러나게하는 제스추어를 취하다 곧 다시 영의정으로 기용하여 황희의 복권 시나리오를 진두지휘하는 모습까지 보여줬다.


또 한번은 황희의 사위 서달이 지방 관아의 아전을 몽둥이로 때려 사망시키는 일이 발생했다. 그 당시의 법도로 따지자면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이 살인사건은 아주 '조용하게' 처리되어 많은 사람들의 의문을 샀다. 이 사건의 수습과정에 좌의정이었던 황희가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알만한 사실로, 여기에는 황희 뿐 아니라 우의정 맹사성, 형조판서 서선, 형조참판 신개, 형조좌랑 안숭선, 대사헌 조계성까지 연루되어 있었다.


지금으로 따지자면 국무총리와 부총리, 법무부 장관과 차관, 감사원장이 모두 비리 사건에 휘말린 '초특급 사건' 인 셈이다.


황희는 자신의 사위를 보호하기 위하여 맹사성과 함께 살인사건의 전말을 축소, 은폐하였으며 직권을 남용해 사건을 조작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당시 조정의 실세라고 불리던 황희-맹사성이 동시에 수습에 나섰으니 그 왜곡과 조작이야 오죽했겠는가. 이 사건은 그렇게 황희와 맹사성의 위엄에 눌려 제대로 거론조차 되지 못하고 묻혀 버리고 말았다.


허나 이런 직권 남용을 곧이 곧대로 볼 사헌부가 아니었다. 이 살인사건에 의문을 품은 사헌부가 사건을 캐나가기 시작하자 그 배후에 여러 지방 관아 수령들 뿐 아니라 형조판서 서선이 직접적으로 관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뒷배를 봐주고 있던 핵심부에는 우의정 맹사성과 좌의정 황희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이 있을 수 없는 조작사건에 격분한 사헌부는 "황희의 간악함이 이와 같다." 며 세종을 흔들었고, 세종은 예의상 황희를 파직했다가 채 1년도 안 되어 다시 기용하는 파격의 은전을 보여줬다. 그러나 같이 사건에 연루됐던 맹사성이 일주일만에 복직한 것을 봤을 때, 조금은 늦은 복권이라는 평가도 있다. 그만큼 황희에 대한 사헌부와 사간원의 감정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비리 사건에 휘말린데다가 황희를 더욱 골치 아프게 했던 것은 박포의 처와 간통을 했다는 소문이었다. 훗날 이 소문은 그 실체가 어디있는 것인지를 놓고 두고두고 문제가 되는데 조선왕조실록의 사관은 황희의 비리와 간통사건을 두고 이런 평가까지 내린바 있다.


"박포의 아내는 정상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하여 도망하여 서울에 들어와 황희의 집 마당 북쪽 토굴 속에 숨어 여러 해 동안 살았는데 황희가 이때 간통하였으며 호의 아내가 일이 무사히 된 것을 알고 돌아갔다. 황희가 장인 양진에게서 노비를 물려받은 것이 단지 3명뿐이었고 아버지에게 물려 받은 것도 많지 않았는데 집안에서 부리는 자와 농막에 흩어져 사는 자가 많았다. 정권을 잡은 여러 해 동안에 매관매직하고 형옥을 팔아 뇌물을 받았으나..."



조금 과장된 바가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지금껏 생각해 온 '청백리' 황희와는 거리가 먼 평가가 아닐 수 없다. 황희는 이 사건 뿐 아니라 첨절제사 박유에게 뇌물을 받았다가 발각이 되어 구설에 오르기도 했고, 박용이라는 역리에게 말(馬) 여러 필을 선물 받고 청탁성 편지를 썼다가 사헌부에게 꼬리를 밟혀 의금부까지 왔다갔다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이런 수많은 '비리 사건' 에도 불구하고 황희에 대한 세종의 총애는 그치지 않았다. 황희가 파직당했을 때에도 세종은 언제나 모든 사무를 황희에게 물어보고 처리하였으며, 황희가 고개를 흔든 것은 가납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세종시대는 실질적인 세종과 황희의 공동정권이나 다름이 없었다. 황희가 사헌부와 사간원의 '처절한 탄핵' 에도 불구하고 살아 남을 수 있었던데에는 적극적인 세종의 비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세종은 왜 이렇게 황희를 총애했을까. 세종은 누구보다도 황희의 비리사건을 꿰뚫어 보고 있던 핵심 인물이었다. 그러나 황희에게는 '비리사건' 조차 눈 감아 넘겨 버릴 수 있을 정도의 정치력이 있었다. 세종이 필요했던 것은 황희의 청렴결백한 도덕성이 아니라 조선을 움직일 수 있는 탁월한 재능의 정치력이었던 것이다. 결국 세종은 약간의 흠집에도 불구하고 황희를 버리지 못했다. 그러니 사실상 세종이 황희의 청렴함에 감탄하고 탄복했다는 에피소드는 후세사람들의 '각색' 으로 탄생한 픽션이다.


황희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처럼 '청백리' 였다기 보다는 대부분의 정치인과 같이 비리 사건에 자주 연루되었던 평범한 고위 공직자였다. 한 가지 다른 것이 있다면 황희만큼 세종의 안목과 비전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고, 위 아래를 아우르며 정무를 처리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는 것이다. 세종에게 있어서 영의정 황희-좌의정 맹사성 조합이야말로 그 어떤 인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최고의 조합이었다.


정리하자면 황희가 태종과 세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24년 동안 재상의 위세를 떨칠 수 있었던 이유는 부도덕성마저 가릴만큼의 뛰어난 재능과 정치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파직과 복권을 거듭하며 혹독한 세월을 보냈던 황희는 그 후, 세종의 믿음에 보답이라도 하듯 세종의 대업을 보필했다고 전해진다. <세종실록> 에 적혀있는 그 엄청난 스캔들조차 황희의 공적으로 인해 승화되는 것을 보면 정치야말로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생물임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


그래서일까. 황희에 대한 악평을 서슴없이 남겨놨던 사관들도 훗날에 이르러서는 '개과천선' 했던 황희를 두고 이런 평을 내린다.


"성품이 지나치게 관대하여 제가에 단점이 있었으나 일을 처리하는데 있어 생각이 깊고 함부로 나서는 일이 없었다. 한 번 다짐한 일은 위에 반드시 아뢰어 행하였으며 행함에 있어서도 자주 바꾸지 않아 나라 사람들을 안정시켰다. 관후하고 침중하여 재상의 식견과 도량이 있었으며, 풍후한 자질이 크고 훌륭하며 총명이 남보다 뛰어났다.


집을 다스림에는 검소하고, 기쁨과 노여움을 안색에 나타내지 않으며, 일을 의논할 적엔 정대하여 대체를 보존하기에 힘쓰고 번거롭게 변경하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Posted by 비회원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2008.05.26 00: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4년간이나 건국초기 절대 왕정하에서 영의정을 지낸건 정말 대단..

    게다가 황희는 양녕대군의 총명함을 꿰뚫어보고 왕으로 밀던 사람인데도

    세종이 다시 부른걸 보면...ㄷㄷㄷ

  2. g 2008.05.26 08: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후에 뉘우치고 정말 청백ㄹㅣ가 되었다고 하죠

  3. gg 2008.07.31 13: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중국의 명재상 관중도 그리 청렴한 인물은 아니었다고 하죠...

  4. 태조이성계 2010.05.15 00: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쪽의 설을 설명해 놓으셨네요. 황희에 대한 모함으로 볼 수 있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종이 다시 등용한 것이죠. 객관적인 세종과 황희의 글에서 나타난 업적과 당시 사간원들의 업적을 비교해 보면 그 뛰어남이 분명하게 들어날 정도로 대적할 자가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청렴했던 황희에 대하여 모함하였던 설이 유력한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