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의왕후'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9.05.26 왜 그녀들은 '임금' 을 죽였을까. (7)
  2. 2008.05.07 [이산] 혜경궁은 정말 '의빈 성씨' 를 구박했을까? (19)



고현정의 컴백작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선덕여왕] 이 처음부터 대박조짐을 보이고 있다.


특히 1회에서 보여준 진흥왕의 죽음과 여걸 미실의 등장 등은 많은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는 상황.


1회에서 미실은 진흥왕을 독살하기 직전까지의 상황에 내몰리며 "내 손으로 당신을 죽이지 않게 한 것에 감사하다." 라고 읊조린다.


그렇다면 과연 이 나라 역사에서 미실과 같이 '임금' 을 독살하고자 했던 여성이 있었을까. 믿기 어렵겠지만 임금을 독살하고자 하는 시도는 삼국시대, 고려왕조 뿐 아니라 조선왕조에서도 비일비재했다. 특히 여성성이 억압되어 있던 조선왕조에서 권력을 차지하고자 몸부림쳤던 여걸들의 임금 독살은 대단히 주도 면밀하게 이루어졌다.


이쯤에서 궁금해진다. 역사 속 임금을 '죽이고자' 했던 역사 속 여인들의 모습이.

사용자 삽입 이미지



대비가 되기 위해 시동생의 죽음을 기도한 여인, 소혜왕후 한씨



순종적인 며느리, 엄격한 어머니, 잔인한 할머니라는 세 가지 운명을 타고 난 소혜왕후 한씨는 성종조 '윤비 폐출 사건' 으로 연산군의 비극을 만들어 낸 격랑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여성이다. 우리에게는 '인수대비' 라는 이름으로 더욱 친숙한 그녀는 젊은 나이에 중전의 자리를 목전에 두고 세자였던 남편의 죽음 때문에 궐 밖으로 쫒겨 나와야만 했던 비운의 삶을 산 여인이기도 하다.


사실상 원론적으로 따지자면 남편을 잃은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궐 안으로 돌아올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둘째 아들을 임금의 자리에 올리고, 스스로 대비의 자리를 쟁취함으로써 궐 밖으로 나간지 불과 10여년 만에 화려하게 정치적 일선에 복귀했다. 그리고 그 험난한 '정치적 복귀' 의 뒷면에는 시동생 예종의 죽음을 싸늘하게 지켜봐야만 했던, 냉정하고 섬뜩한 정치적 함수관계가 숨겨져 있었다.


세조의 죽음 뒤, 당시 수빈이었던 인수대비는 자력으로 자신이 정치 일선에 복귀하는 것은 '불가' 하다고 생각했다. "중전은 못 되어도 대비는 되고자 했던" 그녀에게 남아있는 것은 바로 병약한 시동생 예종의 요절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허약했던 예종을 오랜 시간 지켜 본 그녀는 예종의 장수를 빌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죽음을 기도하고 재촉했다. 예종의 죽음이 곧 자신의 '부활' 임을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수빈(인수대비)는 사돈이었던 한명회, 대훈신 신숙주와 결탁해 예종을 정치적으로 압박했다. 그 결과 '세조 능묘 파문' (세조의 능묘를 석실로 하자는 수빈의 의견이 받아들여진 사건)이 일어났고 이것이 수빈에게는 결정적으로 정치적 일선에 복귀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수빈의 부활은 곧 예종의 추락이었다. 예종의 왕권은 궐 밖에 나가있는 형수에게조차 무시당하는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추락했고, 이런 정치적 타격은 그의 건강을 더욱 악화시켰다.


결국 건강이 갈수록 악화일로로 치달았던 예종은 크고 작은 정치적 상처들 속에 큰 소리 한 번 내보지도 못하고 재위 1년만에 죽음을 맞이했다. 예종의 모후였던 정희왕후조차 "주상의 병이 이토록 심했는지 감히 짐작조차 못했다." 고 할 정도로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김인호 교수는 예종의 죽음에 대해 "결국 예종의 세력은 훈구 세력을 등에 업은 수빈(인수대비)의 세력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리하여 예종은 '암살' 이라는 여운을 남기며 요절하였고, 자신의 아들이 아닌 수빈의 둘째 아들에게 왕위를 넘길 수 밖에는 없었다." 고 평가했다.


어쨌든 예종의 죽음은 수빈의 부활이었고, 곧 '궁궐의 제왕' 인수대비의 등장을 알리는 서막에 불과했다. 훈구세력을 등에 업고 시동생 예종의 죽음을 재촉했으며, 암살이라는 여운까지 남기며 자신의 둘째 아들을 왕위에 올렸던 그녀의 정치적 결단은 이렇게 시어머니 정희왕후의 권력욕과 사돈 한명회의 정치적 야심과 결탁하여 최선의 선택으로 자리했다.


'충효' 가 강요되던 조선 왕조에서 시동생이자 한 나라의 임금인 예종의 죽음을 바라보며 어쩌면 인수대비는 그 누구보다도 기뻐하지 않았을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세상에서 가장 비정한 계모, 문정왕후 윤씨



조선 왕조 두번째로 수렴청정을 하면서 그 어떤 왕실 여인들보다 막강한 위세를 누렸던 문정왕후 윤씨의 그 대단한 '권력' 의 이면에는 아들을 죽이고 권력을 쟁취해야만 했던 어머니의 무서운 야욕이 숨겨져 있다. 물론 문정왕후에게 죽임을 당한 인종은 문정왕후의 '친아들' 은 아니었지만 법적 관계로만 따지자면 인종과 문정왕후 만큼 가까운 사이도 없었기에 문정왕후에 의한 '인종 독살' 은 더더욱 충격적인 사건으로 받아 들여진다.



중종의 죽음과 함께 인종이 즉위하고, 인종을 위시한 '대윤' 이 정치판을 장악하자 대비였던 문정왕후는 인종을 죽이는 것을 통해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대윤 세력을 일거에 제거했다. 인종이 세자에 있을 때부터 동궁전에 불을 지르는 등 예종 암살에 열을 올렸던 문정왕후는 끝끝내 윤리와 강상이 치도의 근본이었던 조선 왕실의 한 복판에서 임금에게 독이 든 떡을 먹이는 것으로 자신의 위치를 보장 받을 수 있었다.



'인종 독살' 은 아직까지 확인된 바 없는 '설' 정도로만 전해지고 있지만 정황 상 문정왕후가 인종을 독살할 이유는 충분하다고 보여진다. 인종의 죽음은 그녀에게 궐 안에서 대적할 수 없는 왕실 최고의 어른임을 확인시켜 주는 동시에 수렴청정이라는 막강한 권력까지 안겨다 줄 수 있는 최고의 시나리오였다. 그리고 결국 문정왕후는 무시무시한 독살 계획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스스로 거행함으로써 일종의 정치적 쿠데타를 내부적으로 확실하게 매듭지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여걸의 자질이라 할 만 했다.



그러나 그 담대한 자질이 조선 왕조를 위한 대승적 결단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과 친아들의 지위 보장을 향한 '그릇된 모정' 에서 시작 되었다는 것은 대단히 아쉬운 일이다. 천수를 누린 문정왕후의 죽음 뒤에 훗날 사관들은



"문정왕후는 천성이 엄의嚴毅(엄격하여 굳세고 사나움)하여 비록 상(명종)을 대하는 때라도 말과 얼굴을 부드럽게 하지 않았고 수렴청정한 이래로 무릇 설시設施(임금이 정사를 돌보는것)하는것도 모두 상이 마음대로 하지 못하였다. 불교에 마음이 고혹되고 환관을 신임하여 나라의 재정을 다 기울게 했고, 승도僧徒(스님들)들을 봉양하고 남의 전지와 노복을 빼앗아..... 게다가 권세가 외척으로 돌아가 정사가 사문私門 에서 나오고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지며 기강이 문난해지고 국세가 무너져서 장차 구언하지 못하게 되었다."



라고 혹평했으니 비정하고도 치열했던 권력에의 집착은 결국 이러한 비극만을 나았을 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인목대비가 지목한 '선조 독살' 의 주범, 김개시.



조선 왕조에서 임금의 '수라' 는 언제나 독살의 위험이 천만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많은 임금은 독살을 방지하기 위해 여러가지 대비를 하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살설에 대한 의문은 풀리지 않고 계속 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선조의 독살이다. 변덕 많고 의심 많았던 아버지 선조에게 끊임없이 시달림을 받았던 아들 광해군이 서둘러 왕위에 즉위하기 위해서 아버지를 독살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독살설의 한 가운데에는 선조와 광해의 총애를 동시에 받았던 상궁 김개시(김개똥) 이 존재한다.



조선 후기의 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에서는 "김개시가 어여쁜 외모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광해의 총애를 독차지 했던 것은 선조의 독살이라는 광해 최대의 약점을 움켜 쥐고 있었기 때문" 이라고 했는데, 그만큼 선조의 죽음에는 선조와 김개시, 그리고 광해군의 정치적 함수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던 셈이다. 훗날 광해군에게 폐모 되었다가 복권 되었던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는 광해군과 김개시를 싸잡아서 "부살(父殺)한 것이 과연 광해와 개똥이로다!" 라며 선조 독살을 강력하게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 편에서는 선조의 죽음을 지척에서 바라보았던 인목대비의 이러한 주장은 자신의 아들을 죽인 광해군에 대한 앙갚음의 차원에서 나온 '날조된 사실' 로 치부하기도 한다. 아무리 반정으로 쫒겨 난 왕일지라도 함부로 죽일 수 없었던 조선 왕조의 법도 상 인목대비가 광해를 사지로 몰아 넣기 위해서는 '선조 독살' 이라는 누명을 씌우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인목대비의 정치적 입장은 광해군을 궁지에 몰아넣기에 충분한 사안이었고, 김개시 역시 죽음으로 이끌고 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어쩌면 '선조 독살' 의 가장 큰 수혜자는 광해군과 김개시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한을 풀고자 했던 인목대비가 아니었을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장희빈의 아들을 '제거' 하라, 인원왕후 김씨.



조선 왕조의 500년 역사 중 가장 '치열한' 당쟁을 벌였던 숙종 조에 춘몽처럼 지나갔던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삶과 죽음은 그대로 훗날의 아픔이 됐다. 사약을 받고 쓰러지는 어머니 장희빈의 죽음을 눈 앞에서 똑똑하게 지켜봐야 했던 경종과 그런 경종에게서 '연산군' 의 악몽을 뒤늦게 발견한 노론 세력은 이미 화해할래야 화해할 수 없는 정치적 라이벌로 추락했다. 경종은 노론 세력의 강공을 끊임없이 방어해야 했고, 노론은 숙빈 최씨의 소생 연잉군을 내세워 경종을 압박하는 지루한 싸움을 계속할 수 밖에 없었다.



경종에게 불행했던 것은 자신의 법적인 '어머니' 인원왕후 김씨가 자신의 편이 아니라 훗날 영조가 되는 연잉군의 편이었다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소론 당파였으나 지아비 숙종을 따라 노론 당파로 자리를 옮긴 뒤 열렬한 '노론주의자' 로 변신했던 인원왕후 김씨는 연잉군과 노론 세력이 궁지에 몰릴 때마다 경종을 압박해 정치적 활로를 뚫어주는 '왕실의 호랑이' 였다. 장희빈이라는 굴레 속에서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었던 경종에게 인원왕후의 차가운 냉대는 감당할 수 없는 정치적 시련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종은 재위 2년이 지나면서 눈에 띄게 왕권을 회복해 가고 있었다. 노론 세력을 침몰시키고 소론을 등용했으며 조정에도 활기를 불어 넣고자 했다. 경종의 이러한 움직임은 연잉군에게나, 노론에게나, 인원왕후에게나 반가운 것이 아니었다. 결국 그들은 '독살' 이라는 최후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원래 몸이 안 좋았던 경종이 환후로 고생하던 때에 연잉군은 평소 경종이 좋아했던 '게장' 을 수라로 올려 기어코 먹게 한다. 경종은 게장을 먹으며 "역시 연잉군이야 말로 내 진정한 형제로다!" 라며 칭찬했다지만 문제는 게장이 그의 환후와는 상극인 '치명적 음식' 이었다는 것이었다.



당시 소론 세력은 연잉군의 '왕권 찬탈' 을 우려하여 연잉군의 대전 출입을 엄격히 감시할 때였지만 왕실의 큰어른이었던 인원왕후는 이러한 소론 세력의 견제 속에서도 연잉군이 올린 문제의 '게장' 을 무사히 경종 앞에 대령할 수 있도록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인원왕후가 게장과 경종의 환후가 상극의 성격을 띠고 있는지 눈치채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녀 역시 경종의 독살에 일조한 주범 중 한명인 것은 분명한 일이다. 각본, 연출이 인원왕후였다면 주연은 연잉군이었다.



결국 경종은 4년여의 재위 기간을 끝으로 연잉군과 어머니 인원왕후에게 '불의의 타격' 하나를 얻어 맞고 그대로 하늘로 떠나고 말았다. 경종의 죽음을 끝으로 연잉군은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왕좌를 얻게 됐고, 인원왕후는 자신이 지지한 당파를 보호할 수 있게 됐다. '조선의 르네상스' 라고 불리며 일대 부흥기를 열었던 조선의 영-정조 시대는 사실 법적인 아들을 버려야만 했던 어머니의 비정함을 거름으로 자라난 셈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가문을 위해 남편을 버리다, 혜경궁 홍씨.



영조 20년 1월 9일. 열살의 '세자빈' 을 앞에 두고 장차 임금의 장인이 되는 홍봉한이 입을 열었다. "궁중에 들어가면 3전 섬김을 삼가고 조심해 효성으로 힘쓰고 동궁 섬김을 반드시 옳을 일로 돕고, 말씀을 더욱 삼가해 집과 나라에 복을 닦으소서." 어린 세자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집과 나라에 복을 닦으라." 라는 아버지의 당부를 가슴 깊이 새기고 어린 세자빈은 구중궁궐 속으로 들어갔다. 바로 이 사람이 영조와 정조, 순조의 시대를 관통한 여인, 혜경궁 홍씨였다.


이렇게 '집의 복을 닦으라.' 는 아버지 홍봉한의 말 한마디는 혜경궁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백두의 처지였던 홍봉한이 하루 아침에 세자의 장인이 되고, 숙부인 홍인한이 세도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면서 혜경궁은 자신의 가문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노론 명가로 일어나기 시작한 풍산 홍씨 가문을 위해 혜경궁은 나라와 남편과 자신을 모두 갖다 바쳐야 했다. 그것이 아버지의 성공이자, 숙부의 성공이었고 곧 자신의 성공이기도 했다.


'삼종(효종-현종-숙종)의 혈맥' 을 잇는 단 하나의 혈육, 그리고 장차 왕통을 이어나가야 할 사도세자와 세자빈 홍씨는 겉으로 보기엔 '최고의 결합' 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결합은 조선 최고의 비극을 불러 일으킬 수 밖에 없는 모순된 결합이었다. '소론' 을 지지하는 세자와 '노론' 명가의 세자빈은 섞일래야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 같은 사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남편을 바라보며 혜경궁은 남편을 버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 에서 사도세자와 영조의 사이가 처음부터 좋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사도세자의 정신병이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불편한 몸을 치유하러 나간 온양 행궁에서조차 백성들의 찬사를 받을 정도로 '멀쩡한' 인물이었다. 사도세자가 혜경궁의 말처럼 그저 '미치광이' 에 불과한 정신병자였다면 영조가 10여년 동안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길 생각은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허나 혜경궁은 이상하게도 '일관되게' 사도세자 정신병자설을 고집했다.


혜경궁은 남편의 원대한 꿈을 가장 지척에서 지켜보았다. 사도세자의 꿈은 '노론정권' 을 뒤집어 엎고 새로운 '소론정권' 을 세우는 것이었다. 썩을대로 썩어버린 노론의 뿌리를 뽑아버리고 자신을 지지하는 소론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치 역학구도를 구상하는 사도세자의 꿈은 혜경궁에게 자신과 자신의 가문을 위협하는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결국 그녀는 사도세자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노론의 '스파이' 로 활약하기로 결심했다. 사도세자의 일거수 일투족은 혜경궁의 입을 통해 궐 밖으로 빠져나갔고 노론은 혜경궁의 도움에 힘입어 사도세자 제거라는 무시무시한 음모를 아무렇지도 않게 꾸밀 수 있었다.


사도세자의 가장 큰 비극은 바로 이것이었다. 자신이 가장 믿고 의지해야 할 부인이 자신이 아닌 가문을 택했다는 처참한 상황에 영조의 어린 부인인 정순왕후 김씨가 가세하면서 사도세자의 입지는 더더욱 궁색해졌다. 사도세자는 노론이라는 강적이 밖에서 둘러 싸고 있는 위급한 형국에서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의 아들까지 낳은 부인 혜경궁과 법적인 어머니 정순왕후, 생모인 영빈 이씨 모두 바깥에서 이뤄지는 '사도세자 제거 음모' 에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베겟머리 송사가 송사 중에 으뜸' 이라는 말처럼 그렇게 사도세자는 안에서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바깥과 안에서 함께 이루어지는 공격에 영조와 사도세자는 돌이킬 수 밖에 없는 강을 건넜다. 이것은 혜경궁 역시 마찬가지였다. 운명의 그날, 사도세자는 혜경궁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내 목숨이 그 날 마칠 것도 스스로 염려하여 세손을 경계 부탁하고 왔었는데 동궁(사도세자)께서는 생각과 다르게 나더러 하시는 말씀이 '아무래도 이상하니 자네는 잘 살게 하겠네. 그 뜻들이 무서워." 하시기에 내가 눈물이 드리워 말없이 허황해서 손을 비비고 앉았더니, 이 때 대조(영조)께서 휘령전으로 오셔서 동궁을 부르신다는 전갈이 왔더라.』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혜경궁을 향한 사도세자의 원망어린 발언이다. 지금의 말로 풀자면 "나는 죽는데 이상하게도 너는 살 것 같으니 너의 뜻이 참 무섭다." 는 한탄이었다. 이어서 사도세자는 혜경궁에게 이런 말까지 남긴다. "자네가 참으로 무섭고 흉한 사람일세. 자네는 세손 데리고 오래 살려 하기에 오늘 내가 나가서 죽겠기로 그것을 꺼려 휘향을 내게 안 씌우려는 그 심술을 알겠네."


'나는 죽는데 너는 안 죽으니 이상하다.' '참으로 무섭고 흉하다' '내 아들을 데리고 혼자 오래 사려고 한다' '심술이 가득하다' 는 폭언은 10여년 넘게 자신과 함께 살아 온 부인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서슴없이 혜경궁에게 그런말을 퍼부었다. 운명의 그 날, 사도세자도 혜경궁도 사도세자가 영조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이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편을 제거할 수 밖에 없는 혜경궁과 부인의 가문에 의해 죽임을 당해야만 하는 사도세자, 그들의 만남은 처음부터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는 비극적 결합이었던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정조의 죽음을 지켰던 단 한명의 여자, 정순왕후 김씨



'경종의 독살' 이라는 혐의와 함께 일어섰던 영조의 업보였을까. 그의 손자였던 정조는 즉위하는 그 순간부터 독살과 암살에 노이로제가 걸릴 정도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임금이었다. 정조 이전에도 여러 임금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의혹에 시달렸지만 정조만큼 생명을 걸고 왕좌를 지킨 임금도 드물었다. 게다가 정조는 그 어떤 임금도 겪지 못했던 '자객의 침입' 까지 받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정조가 더욱 두려워 했던 것은 보이는 '자객' 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독살' 이었다. 갑작스러운 정조의 죽음과 함께 "임금이 독살 당하였다." 는 말이 떠돌고 경상도 인동시 장시경, 장현경 부자가 정조 독살의 배후를 밝히겠다고 반란을 일으켰던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었다. 정조의 죽음 배후에는 거대 당파였던 노론 벽파 세력과 독살을 직접 진두 지휘했던 정순왕후가 존재했다.


놀라운 것은 1800년 정조 24년 6월 28일, 종기로 투병 중이던 정조를 둘러싸고 치료상의 난맥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정조 스스로 의학 지식이 뛰어난 군주였고 궁중 의원들이 즐비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조의 치료는 쉽사리 이뤄지지 못했다. 바로 정조의 최대 정적 중 한명이었던 정순왕후 김씨가 정조의 치료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기 대문이다. 궁중의 한낱 아녀자로서 임금의 치료에까지 간섭하는 것은 불경에 가까운 파격이었으나 노론 대신들은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정순왕후는 정조의 병세가 선조 병술년의 증세와 비슷하니 성향정기산이라는 탕약을 올려야 함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더욱 우스운 것은 정순왕후의 하달을 당시 도제조 이시수가 그대로 따랐다는 것이다. 의학 지식이 없는 아녀자의 말 한마디에 임금의 치료가 우왕좌왕 하는 우스운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여기에 더 나아가 정순왕후는 내시를 데리고 정조의 안색을 살피겠다며 직접 대전에 발을 들여 놓았다.


"내가 직접 받들어 올려드리고 싶으니 경들은 잠시 물러가시오." 라는 명과 함께 방 안에는 정조와 정순왕후, 단 둘이 자리잡았다. 투병 중인 임금과 그 임금을 죽여야만 사는 대비의 운명은 그렇게 결정지어졌다. 잠시 뒤 방안에서는 정순왕후의 곡소리가 들렸고 정조의 임종을 지켜본 것은 정조를 낳은 혜경궁도, 부인인 효의왕후도 아닌 정조의 최대 정적, 정순왕후였다. 이것으로 정조의 시대는 끝이났고 '수렴청정' 의 위세를 누리던 정순왕후의 시대가 열렸다.



조선 왕조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린 사건은 바로 이렇게 '허망하게' 시작됐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왕실 한복판에서 조선의 역사를 움직인 여성들



철저한 '남녀차별' 과 '남존여비' 의 사상으로 가득했던 조선 왕조는 누가 뭐래도 '남성들의 사회' 였다. 그러나 구중궁궐 한 복판에서 역사를 움직이고 창조한 것은 여성의 몫이기도 했다. 그들은 소리 없이 조용하게 한 나라의 군주이자 만인지상인 임금의 죽음을 목도하고, 재촉하고, 움직였다. 자신의 이해 관계에 따라, 정치적 함수 관계에 따라, 권력 투쟁의 일상 속에서 임금의 목숨줄을 가장 쉽게 움켜 쥘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임금 바로 옆에 앉아있는 왕실의 여성들이었던 것이다.



왕실 여성들이 존재하는 이상 조선 왕조는 일정부분 여성들의 치맛폭 속에서 끝끝내 벗어나지 못하는 운명이었다. 그 운명이 결국 조선의 역사를 움직였고, 왕실 여성들을 움직이게 했다. 임금의 죽음을 목도하는 것을 통해 인수대비나 인원왕후처럼 '역사적 성공' 을 거둔 인물도 있는 반면, 문정왕후나 정순왕후처럼 혹평을 받는 인물도 있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의 '정치적 선택' 은 어떻게 평가되어야 하는가?



어쩌면 그녀들의 '선택' 역시 역사가 강요했던 어쩔 수 없는 '선택' 은 아니었을까.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여성도, 남성도 아닌 그저 역사 그 자체일테니까.

Posted by 비회원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궁금@정말.ㅜㅅ BlogIcon 어디서 돈받고 해요? 2009.05.27 01: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가 오버하는지 정확히 집어낸건지... 확신은 못하겠다.
    노대통령의 서거 원인은 현정부의 망신주기에 있다는 것이 여론이다.(여기까지 팩트)
    그런데... 은근히 꼬면서..대통령을 죽음으로 몰고간 원인을 다른곳에서 찾아볼려는 꼼수같은 황당한 뉘앙스를 풍기고 잇는 블로그다.

  2. Favicon of http://궁금@정말.ㅜㅅ BlogIcon 그렇게 살고 싶은가? 2009.05.27 01: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얼마받으면.. 이런글도 써주고.. 얼마주면.. 댓글하나 없는데 대문에 표지로 나오죠?

  3. Favicon of http://궁금@정말.ㅜㅅ BlogIcon 연예가섹션님 2009.05.27 01: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히 가십시오.^^
    전 이만 ...

  4. 글쎄요... 2009.05.27 11: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 잘 읽었습니다.
    본문내용에서 보면 정사로 확실하게 인정받은 부분이 아니라
    하나의 가설에 불과한 부분이 많더군요.
    그런 부분을 그냥 역사적 사실인것처럼 인용하는 것은
    너무 앞서가는 것이 아닐지... 실하게 보자면 역사왜곡입니다.
    요사이 사극들처럼...

  5. 혜경궁 2009.05.27 14: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른 사람은 모르겠고 혜경궁은 좀 그렇네요. 남편이 멀쩡했다고 주장하면 그 멀쩡한 남편을 죽인 시아비를 욕보이는 셈이 됩니다. 시아비를 욕 안보이면서 남편을 멀쩡하게 만드려면 남편이 실로 모반을 꾀했다는 걸 인정할 수 밖에 없죠. 그럼 아들이 문제가 됩니다. 모반자의 아들이 왕이 될 수는 없는 거잖아요. 당연 남편이 정신이상이었다고 주장할 수 밖에 없는 거죠.

  6. 음... 2009.05.27 19: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수대비도 비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물인데... 성종 치세가 워낙 태평천하였다고 평을 받아 그런지 약하네...




드라마 [이산] 을 보다보면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와 극 중 성송연으로 출연하는 '의빈 성씨' 와의 갈등을 심심치 않게 보게 된다. 견미리가 분하고 있는 혜경궁 홍씨는 사사건건 성송연을 궁지로 몰아 넣으며 정조의 총애를 빼앗아 가려하고 '지체 낮은 도화서 화원' 따위가 자신의 아들을 홀린 것에 대해 마땅치 않게 생각하고 있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자면 심각한 고부 갈등 중 하나로 보이는데 과연 실제로도 혜경궁은 의빈 성씨를 구박했던 것일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산] 속 혜경궁 홍씨는 정조와 성송연의 관계를 떼어 놓기 위해 '원빈 홍씨' 와 '화빈 윤씨' 를 궁궐에 들여 놓는다. 명문가의 여식들을 궐 안에 들여 놓음으로써 상대적으로 성송연의 입지를 약화 시키려는 혜경궁의 '전략' 은 [이산] 의 또 다른 갈등축으로 긴장감까지 자아내고 있다. 혜경궁의 계략에 맞서 정조의 총애를 받는 송연의 고군분투와 그 뒤에서 묵묵히 응원하고 있는 효의왕후의 모습 또한 드라마답게 아주 극적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드라마와는 달리 실제 혜경궁은 홍국영의 누이인 '원빈 홍씨' 의 입궐을 적극적으로 만류하던 사람 중 한명이었다. 혜경궁은 <한중록> 에서 "스스로 원빈이라고 칭하는 것부터 요사스럽더니...." 라는 글귀로 홍국영과 누이 원빈 홍씨를 싸잡아 비난한다. 홍국영이 자신의 아비와 숙부인 홍봉한과 홍인한의 제거에 앞장 섰던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혜경궁은 홍국영이 누이를 통해 권세를 누리려 하는 점을 대단히 마땅치 않게 생각했다.


그러니 정조와 성송연을 떼어 놓고 홍국영의 뒷배를 봐주기 위해 원빈 홍씨를 스스로 천거하는 [이산] 속 혜경궁의 모습은 '완벽한' 픽션으로 봐야만 한다. 원빈 홍씨의 이른 죽음과 그와 함께 몰락하는 홍국영의 처참한 최후를 보면서 가장 기뻐했던 것은 다름 아닌 혜경궁,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실제 혜경궁에게 마땅히 '제거' 해야 할 대상은 성송연이 아니라 오히려 원빈과 그의 오라비 홍국영이었던 것이다.


이번 주에 송연의 '라이벌' 로 등장한 '화빈 윤씨' 역시 혜경궁에 의해 궐 안으로 들어 온 후궁은 아니었다. 화빈 윤씨는 14년 동안 아들을 낳지 못한 효의왕후 김씨가 직접 천거해 올린 후궁이었다.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상상 임신까지 했었던 효의왕후는 '대통을 이어야 한다' 는 책임을 지기 위해 후궁을 들여야 겠다고 생각했고 여기서 간택 된 사람이 바로 화빈 윤씨였다. 숙종-영조-정조로 이어지는 '삼종의 혈맥' 은 효의왕후로서 반드시 사수해야만 하는 절대 반지였다. 즉, 화빈 윤씨의 입궐은 혜경궁이 아니라 효의왕후의 주도로 이뤄진 것이다.


재밌는 것은 실제 역사 속에서는 화빈 윤씨의 나인으로 들어간 것이 바로 '성송연' 이고, 정조는 화빈의 처소에 들락거리다 성씨와 사랑을 나누게 된다. [이산] 에서는 화빈과 송연이 정조를 사이에 둔 라이벌로 그려지고 있지만 사실은 송연이 화빈의 침방 나인이었다는 것이다. 어찌되었든간에 송연을 '제거' 하기 위해 화빈 윤씨를 일부러 소개하는 혜경궁의 모습 또한 작가가 만들어 낸 완전한 '허구' 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명문가 출신의 두 후궁과 달리 일개 나인 출신이었던 의빈 성씨에게 '출신 컴플렉스' 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확인된 바 없으나 혜경궁은 화빈 윤씨만큼이나 의빈 성씨를 사랑했다. 오히려 의빈 성씨의 미천한 신분은 '외척의 발호를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는 평가를 받아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했고 이것에 대해 혜경궁 역시 공감했다. 의빈 성씨가 아들을 낳았을 때, 혜경궁은 정조와 효의왕후 만큼이나 기뻐했다. "왕실의 흥복" 이라며 만면에 웃음꽃을 피웠던 혜경궁이 의빈 성씨를 구박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게다가 의빈 성씨는 '투기' 하지 않음으로 하여 효의왕후와 혜경궁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 나인 출신의 태생적 배경 때문인지 검소하고 겸손했던 의빈 성씨는 아들을 낳고서도 모든 공을 효의왕후에게 돌리는 미덕을 발휘했다. 혜경궁이 의빈 성씨의 온화한 성품에 감동한 것은 당연한 일이며, 이 후 의빈이 죽은 뒤에도 "하늘도 무심하시도다." 라고 한탄한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의빈 성씨의 자애로운 성품 덕에 혜경궁이 그녀를 '미워할 이유' 도 없었겠지만 더욱 깊숙이 들어가보면 효의왕후와 의빈성씨, 그리고 혜경궁은 지금의 시각처럼 '고부 관계' 로 바라볼 수 없는 관계이기도 했다. 혜경궁은 정조의 어머니이자 효의왕후의 시어머니인 것은 확실했으나 엄밀히 따지자면 '대비' 가 아니었다. 즉, 대비와 같은 대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애매모호한 위치에 처해 있었다는 이야기다.


당시 내명부 수장은 누가 뭐래도 중궁인 효의왕후 김씨였다. 성품이 온화하고 강직하여 '내유외강' 의 기품을 품고 있던 효의왕후 김씨는 내명부의 수장으로 흔들리지 않는 '중심' 으로 자리했다. 원빈 홍씨, 화빈 윤씨, 의빈 성씨의 입궐 또한 '승인' 하고 '결제' 할 수 있었던 사람은 효의왕후 김씨, 단 한사람 뿐이었다. 대왕대비였던 정순왕후도, 정조의 모후인 혜경궁도 실질적 위계 권력 관계로 따지자면 효의왕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임금이 총애하고 중궁이 '승인' 한 후궁의 일에 대해서 궐 내에 반기를 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례를 따져봐도 대비가 임금의 후궁을 내치거나 벌하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숙종조에 명성대비 김씨가 장희빈을 궐 밖으로 내친 일이 있기는 하나 이것은 아주 예외적인 일이며 대부분은 중전의 손에서 '즉결 심판' 식으로 처결 되는 것이 '원칙' 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혜경궁은 '사도세자를 죽인' 풍산 홍씨 가문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여성이었다. 남편이 죽음으로 몰릴 때까지 침묵하고 암묵적으로 동조했던 것은 혜경궁 그 자신이었고 자신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한 그 날부터 그녀는 그 '원죄' 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처해 있었다. 이것은 바꿔 말하자면 혜경궁이 실질적인 발언권이나 영향력을 거세게 행사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정조에게나, 효의왕후에게나 혜경궁은 도의적으로 '섬겨야' 할 인물이었지 명을 받들고 따라야 할 인물은 아니었다. 그것은 내명부의 수장으로 모든 일을 관장하는 효의왕후에게 더더욱 중요시 되는 원칙이었다. 효의왕후는 혜경궁과 정순왕후 모두에게 성심을 다함으로써 '효부' 소리까지 들었으나 내명부의 일만큼은 자신이 관장하며 혜경궁과 정순왕후에게 실질적인 권한을 양보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효의왕후가 중궁으로 누려야 하는 당연한 권리였고 자존심이었다.


그러니 [이산] 에서 '성송연' 을 구박하는 혜경궁의 모습은 실제로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맞다. 혜경궁은 품성 고운 의빈 성씨를 미워할 정도로 모난 인물이 아니었고, 실제로 미웠다고 해도 며느리인 효의왕후의 강력한 비호가 있는 한 직접적인 제재를 가하기도 힘들었다. 만약 혜경궁이 다시 살아 돌아와 [이산] 속 자신의 모습을 보면 어떤 말을 할까.


"난 저럴 이유도 없었고, 저럴 수도 없었어요." 하며 억울해 하지 않을까.


Posted by 비회원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이래서... 2008.05.07 09: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극을 그닥 좋아하지않게되었음...다른건 몰라도 사극만큼은 실제역사에 최대한 근접시켜야하는 의무가 있다고 생각함. 요즘은 너무 자극적이고 충격적인소재에 목숨거는것같음....

  2. 2008.05.07 10: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라마보다 더 재밌게 읽었습니다.
    완전 정독.. 짝짝짝!!

  3. 하늘아래 2008.05.07 11: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두 너무 흥미있게 읽었어요..ㄳㄳ

  4. 이산 2008.05.07 12: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흥행에 눈이 멀어 역사를 왜곡하는 드라마 작가들은 각성하시오....

  5. 한심의 극치... 2008.05.07 12: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본과 중국보고 역사외곡 어쩌구 저쩌구 맨날 하지말고 본국부터 먼저 역사를 제대로 알리지. 드라마의 이야기를 역사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얼만데, 이런거 보고 애들교육은 어떻게 하구. 한심한 인간들. 지 멋대로 역사를 바꾸고 지랄이야.

  6. 쿠키 2008.05.07 13: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적극 공감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산을 보면서 말이 안된다고 여겼던 부분입니다. 이 글을 쓰신 분은 많이 연구하신 분이겠지만, 그렇지 않은 단편적인 지식만을 갖고 있던 제가 보기에도, 대비도 아니고 오랜 세월 쥐죽은 듯 죄인으로 살던 혜경궁 홍씨가 저렇게 당당하고 도도하게 말이 안되는 행위들을 하는게 정말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중록 첫부분에도 그런식으로 표현됐던 것 같은데...
    요즘 그런식으로 하는 혜경궁을 보면서, 드라마 초반에 견미리가 안어울리는데 왜 혜경궁으로 나올까 생각했었는데 이제야 저렇게, 저런 성격으로 풀어쓸려고 견미리를 등장시켰군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많이 억지스러워요.

  7. ㅇㅇ 2008.05.07 13: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런데 제가 알기론 정순왕후가 내명부의 수장일텐데요

    정조의 후궁 간택도 정순왕후가 '후사를 보는 것이 급하다'고 하여 간택하라는 명을 내렸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 세자르 2008.05.07 13:50  댓글주소  수정/삭제

      정순왕후가 아니라 효의왕후가 맞습니다. 다만 내명부의 가장 큰어른이라고 하면 정순왕후죠..실제적으로 내명부의 모든 일을 결정하는 것은 중전입니다. 조선조 역사상에서 대비가 큰 힘을 발휘한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그건 대부분 특수한 경우

  8. ^^ 2008.05.07 13: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라마 보다 더 드라마 같아.~

  9. 초위시 2008.05.07 13: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역사를 그닥좋아하지않아(이런-_- 죄지은 것 같아..) 사극드라마는 잘 보지 않습니다. 게다가 허구적인 요소가 너무 많아 싫어하는데 얼마전부터 이산을 보기 시작했는데 님이 아니었다면 전 또 드라마 그대로 믿어버렸겠지요...혜경궁이 효의왕후 의견을 여러번 무시하는데서 진짜 저럴 수 있나 싶기는 했지만..이제서야 답을 알아가네요_^^감사해요...잼있네요

  10. 너무 잘 봤어요.드라마보다 실제가 더 잼난다. 2008.05.07 14: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밋어요.

  11. ares97 2008.05.07 14: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원추~ 재미있는 역사의 진실이었습니다. 잘모르고 있던 허구에 대해 이렇게 속시원하게 풀어주시니... 드라마에서 속았다 생각하니까 혹시 이글도 허구?

  12. 옛날의 복잡한 상황을 알고있지 못한 상태에서는 2008.05.07 15: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금 드라마처럼 풀어가는 게 시청자 입장에서 쉽게 다가가기 때문에 이렇게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혜경궁의 그런 입지를 이해시키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하잖아요...중간에 티비를 시청한 사람들 입장에서도 이해안가는 부분이 많았을껍니다. 그래서 이렇게 내용을 바꾸지 않았을까요? 다 이해시키려면 너무나 긴 역사를 방영해야했을꺼예요.

  13. 구경꾼 2008.05.13 11: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홋..안그래도 이산 보면서 혜경궁홍씨 역할에 고개가 갸우뚱할때가 많았는데..
    이글 보니 이해가 되네요.. 역시 사극도 그냥 허구드라마일뿐이네요

  14. 발해 2008.08.20 15: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엄청난 글이군요.

  15. 호오라! 2008.11.21 21: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실제가 더 재미있아요... 그러니까 왜 픽션을 가해서는 혜경궁 홍씨 나쁜 사람 만들어...

  16. 저도 2009.03.27 17: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개인적으로 역사를 좋아하는지라 그 부분을 여러 책으로 미리 접했었는데
    드라마 이산이 풀어나가는 방식을 보고 뭥미..했지요 ㅎㅎ
    한중록을 보면 후반부의 절반 이상이 홍국영과 그 누이인 원빈을 까는 얘기 뿐인데 말입니다.
    게다가 정조와 효의왕후가 효심이 깊어서 혜경궁을 잘 챙겨준 거지
    실제로 혜경궁은 궁내의 지위로 보나 정치적인 위상으로 보나 큰소리를 칠 군번이 아니었고 말이죠.

  17. Favicon of http://liposuccion-du-ventre.com BlogIcon Ardis 2012.02.16 01: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가 사랑하는 내가 사랑 사용자 웹사이트 매우 으로 유명한 ! 공개

  18. Favicon of https://minihoppang.tistory.com BlogIcon 얄롱얄롱 2013.06.12 18: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즘 이산을 다시 보고 있는데 궁금증이 생겨 이렇게 찾아보게 되었네요. 혜경궁 홍씨가 의빈성씨를 예뻐했다는 말을 언뜻 본 적이 있어서요. 고부 갈등은 드라마의 빠질 수 없는 코드인가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