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드라마 [대왕세종] 가 본격적인 세종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왕위 계승권이 충녕에게 넘어가면서 권력 구도가 재편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해지는 것이 있다. 셋째 아들이었던 충녕대군이 조선조 4대 임금으로 조선 최고의 '성군' 이 되었을 때, 아버지의 버림을 받고 왕위 계승권을 박탈 당했던 첫째 아들 '양녕대군' 은 어떻게 됐을까. 왕위 계승권을 빼앗긴 형과 본의 아니게 빼앗을 수 밖에 없었던 동생 사이에는 조금의 갈등도 없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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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사에서는 태종의 첫째 아들이었던 세자가 태종의 마음이 충녕 대군에 있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광증' 을 보여 왕위를 동생에게 양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그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세자에게 '광증' 이 있었던 것은 사실로 보이고, 태종 역시 그런 아들을 탐탁치 않아 한 것 또한 사실이었다. 태종에게 있어서 세자에게 왕위를 넘기는 것은 일종의 자살행위였고 결국 일종의 탄핵 처분을 통해 세자를 폐위하고 셋째 아들 충녕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익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양녕대군' 이고, '세종대왕' 이다.


양녕대군은 처음부터 원자이자 세자의 위치에 줄곧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양녕대군' 으로 불리지는 않았다. 그가 양녕대군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세자의 자리에서 내려왔을 때 부터인데 양녕의 뜻이 사양할 양 (讓), 편안할 녕(寧) 즉, "(세자의 자리를) 양보함으로써 편안하다." 는 뜻임을 살펴 볼 때 '양녕대군' 이라는 호칭은 그의 운명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칭호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그는 세종에게 왕위를 '양보' 했을지언정 '편안' 한 삶을 살지는 못했다. 권력의 정점에서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폐위' 된 세자의 앞날이 가시밭길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광증에 시달리면서 전국을 전전해야 했고, 아버지 태종의 시퍼런 서슬에 질려 왕실의 '맏어른' 으로서도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는 평생을 원하든, 원치 않든 주변의 감시와 관리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그것이 바로 '성군' 세종의 형이 걸을 수 밖에 없는 잿빛 운명이었다.


양녕대군의 운명은 성군으로서 찬란한 영광의 길을 걸었던 세종의 그것과는 정 반대의 길을 걸었다. 그는 철저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통해 동생의 '조선' 을 밝게 빛냈다. 세자에서 대군으로 강등 되며 모든 것이 부정되어 버린 상황에서 그에게는 어떠한 역할도 주어지지 않았다. 양녕대군에게는 왕실 종친으로서의 '권위' 도 '명예' 도 존재하지 않았고, 그토록 원하던 '자유' 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살아가는 것', 그 뿐이었다.


이렇듯 상왕인 아버지와 임금인 동생을 둔 '조선' 이라는 나라에서 양녕대군은 홀로 희대의 불운아로 전락했다. 누구보다 불행한 삶을 산 양녕대군이 불운의 원인 제공자인 세종에게 불만을 품지 않았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이다. 비록 그와 세종의 우애가 깊었다고는 하나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권력 구도' 재편 과정에서 파생된 희생자와 쟁취자로 구분 지어졌다. 그것이 우애 깊은 형제가 겪어버린 권력의 비정함이라면 비정함이었다.


세종은 양녕대군을 '형' 으로 각별하게 모셨지만 단 한번도 '왕실의 어른' 으로 우대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기행을 일삼았던 양녕에게도 원인이 있었지만 한 때 권력의 중심부였던 그를 견제하는 왕실, 조정 세력과 그것을 암묵적으로 인정했던 세종의 영향도 있었다. 세종에게 양녕대군은 언제나 보살펴 드려야 하는 형님이었지 왕실의 대표하는 종친은 아니었다. 이것이 또한 양녕대군의 불운이라면 불운이었다.


양녕대군은 자신의 명예 회복과 복권을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세종의 죽음' 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간파하고 있었다. 세종의 뒤를 이어 임금의 자리에 올랐던 문종이 오래지 않아 승하하고 12살 어린 임금인 단종이 즉위했을 때, 양녕대군은 비로소 자신의 '복권' 을 희망할 수 있게 됐다. 태종도, 세종도, 대비도, 대왕대비도 없는 왕실에서 '왕실의 최고 어른' 이라는 상징적 지위를 쟁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간의 명예 회복을 위해 양녕대군의 움직임은 대단히 적극적이고 치열하게 전개됐다.


양녕대군은 자신의 명예를 회복시켜 줄 인물로 어린 임금 단종이 아닌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으로 점찍었다. 양녕대군은 수양에게서 젊은 시절 권력의 주변부로 밀려나 좌절하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는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수양대군을 임금의 자리로 밀기 시작했다. 계유정난으로 시작 된 수양대군의 권력 장악 과정 속에서 양녕대군은 언제나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했다.


양녕대군은 계유정난을 통해 '영의정' 의 자리에 오른 수양대군에게 '즉위' 할 것을 간접적으로 종용했다. 양녕대군은 수양대군을 제외한 나머지 종친들, 특히 수양대군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안평대군의 사살에 동조했고 더 나아가 세종의 유일한 직계 후손인 단종의 제거에도 앞장 섰다. 가깝기로 따지면 단종과 양녕만한 관계도 없었지만 '명예회복' 을 향한 복권의 한(恨)은 그렇게 세종의 손자에게 칼날을 겨누었다. 복수로 따지자면 한없이 잔인한 복수였다.


세종이 무릎에 올려 놓고 성삼문과 신숙주 등에게 친히 "내가 죽더라도 잘 부탁한다." 며 어여뻐 했던 단종은 불과 10여년의 세월 만에 '큰 할아버지' 양녕대군의 '공세' 속에 죽음의 문턱에 다다르게 된다. 물론 단종을 폐위시키고 영월에서 죽이고 만 것은 세조(수양대군)와 그의 장자방이었던 한명회, 그리고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던 신숙주였지만 뒷배경에는 그 모든 것에 침묵했던 왕실 종친과 그를 위시한 양녕대군이 존재했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발한 금성대군, 혜빈 양씨와 같은 왕실 사람들은 모두 조용히 역사 속으로 사라질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양녕대군은 세종의 세 아들과 손자의 죽음을 목도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명예를 회복했다.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세조에게 묵묵히 뒷배를 봐주며 아낌없는 후원을 해준 양녕대군은 큰아버지의 이상의 존재였고 비로소 양녕대군은 왕실 최고 어른으로서 권위와 존경을 회복했다. 세자였던 형의 자리를 대신해 왕위에 올랐던 동생과 그런 동생을 바라보며 울분을 토할 수 밖에 없었던 형의 운명은 40여년 만에 그 후손들의 '죽음' 을 제물로 제자리를 찾게됐다.


이것이 바로 조선 최고의 성군 '세종대왕' 과 그의 형 '양녕대군' 이 맞이할 수 밖에 없는 역사의 비극이었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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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홍균 2008.05.19 09: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단종폐위에 앞장섯던사람은 성삼문이 아니라 신숙주겠지요

  2. ㅡㅡ;; 2008.05.19 09: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알기로는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세종과 양녕대군은 지극히 우애가 깊어서 심지어 세종이 몰래 궁을 나가서 함께 술을 마실 정도였고 수십번의 양녕에 대한 탄핵이 있었지만 세종은 한번도 이를 수용하지 않았는데요... 제가 보기엔 님은 역사적 근거 보다는 상황을 보고 혼자 생각하시는 듯...

  3. 강원희 2008.05.19 09: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성삼문은 아니죠 애들이 보면 어쩌시려구 ^^

  4. JEN 2008.05.19 09: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를 볼때는 누구나 상황-fact-를 보고 유추하는 것이겠지요,, 어떤 일이든 마찬가지구요. 단, 당사자에게 확인을 못할 뿐.. 저도 글쓴 분과 비슷한 견해이긴 합니다. 아무리 양녕과 충녕이 사이가 좋았기로서니,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폐위되었다면 울분이 컸겠지요. 물론 세종에게 복수를 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지만 윗글처럼 종친으로서의 대접이 없었다면 그럴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그렇지만 세조를 즉위시키는데 힘을 쓴 이유는 복수라기보다는 조선을 위하는 마음이 더 컸을거라 봅니다. ㅎㅎㅎ

  5. 강철 2008.05.19 09: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맞습니다. 왕이라고해서 모든걸 할수 있는 조선시대가 아니였기에 수십번의 탄핵을 거부한것만도 그당시엔 정적에게 베풀수있는 아량이 아니지요. 게다가 세조시대엔 단종이 너무어려 왕권약화를 염려한 양녕의 행보가 세종에 대한 반감이라고 해석되기엔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왕실 최고의 어른으로써 그만한 정치적 결정은 당연하다고 보는데요. 다른성씨가 왕이되는것 보다는 그당시 가장 정치적입지가 탄탄했던 세조를 선택해서 왕권을 강화시키는건이 시급했던 거겠죠.

  6. 수양대군이나 단종이나 2008.05.19 11: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깝기로치면 수양대군이 더 가까운데요
    수양대군도 '대군' 이듯이 세종의 아들인데...

  7. 그닥... 2008.05.19 13: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양녕대군이 계유정란때 영향력을 행사했다는건 사실이지만, 그건 힘없는 어린 단종을 앞세워 정권을 휘두르려는 김종서랑...음...생각이 안나네요...힘있는 대신들한테 정권이 휘둘려 왕권이 유명무실해져서 였다고 알고있습니다..동생에게 왕위를 양보해서라도 일으킨 조선왕조인데 그렇게서라도 지키고 싶었겠죠...후에 수양대군(세조)는 단종을 죽인 일때문에 많이 괴로워했다고 하네요..자꾸 꿈에 단종이 나타나고 해서...물론 이것도 야사겠죠^^...그래서 일시적으로 불교를 중흥시켰다 하기도 합니다...암튼 양녕대군은 무척 똑똑했던 사람인것 같아요

  8. 치우 2008.05.19 14: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충분히 가능한 가설입니다.



    단종을 사사시키라 강력하게 주장한사람이 양녕대군이라고 합니다.

    더불어 말하면 글쓰신분의 펙트가 야사에 나오는 미담보다 더 역사적인사실에 더 맞을수도 있습니다.

    양녕의 양위미담은는 실록에 나오지 않고 후대의 야사에 나오는 것입니다.


    역사는 승자가 기록하는것 이므로 승자에게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부풀려지기 마련입니다. 단종 폐위사건이 그렇고 여러번의 사화와 광해군 폐위사건이 그렇습니다. 집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실권자들이 잘못했다거나 도전하는 세력이 역도였다고 기술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들이 실권할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세종으로 세자가 바뀌는 과정에서 극적인 정통성 부풀리기는 없습니다.



    그리고 세종대는 아직 성리학이 제대로 정착되어진 시기가 아닙니다.

    이제서야 중국에서 성리학이 들어와 조선사회에 뿌리내리기 시작하려한 시기입니다. 신권에 의해서 왕권이 좌지우지한 시기가 아닙니다. 후대인 조광조가 중앙정계에 진출하는 중종때 비로소 성리학의 나라로서 시작일 뿐입니다. 사대부의 대표가 왕이다라는 의식은 조광조 이후 좀더 성리학이 뿌리를 확실하게 내린 후대였습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명종의 후사를 직계가 아닌 중종대왕의 방계(직계는 왕비소생의 왕자들, 방계는 후궁소생을 일컬음.)인 영양군의 셋째아들인 하성군을 왕위에 올리면서부터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 수 있었습니다. 말그대로 왕을 선택하여 옹립한 모양세이기 때문입니다.

    이시기는 4번의 사화를 거치면서 사림의 세력이 중앙정계까지 진출한 시기입니다. 슬슬 붕당이 생겨나기 위한 토대도 마련된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미 왕의 혈통이 직계가 한번 끊긴 상황이고 왕인 선조조차도 자신의 방계혈통에 대해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습니다. 그결과가 변덕스러운 정치적 결정으로 나타났고요.


    이처럼 후대상황에서야 신권이 강화된 시기 이지만 세종조시대는 왕권이 신권에 압선 시기입니다. 그리고 세자의 자리에서 물러난이후 양녕대군은 정치와, 권력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엇습니다. 태종의 사후전이기에 태종의 의도적인 상황연출일수도 있습니다.

    후대의 세조의 종친의 등용에서 보더라도 철저한 외면에 가까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성씨가 왕이 되려는 움직임은 세종의 업적에 의해서 시도차제가 불가능했습니다. 왕조가 성이 바뀌는가장 큰 이유가 민심을 잃고 실정을 해야 가능한 상황에서 세종이 죽은지 겨우 5년이 지났을 뿐입니다.
    문종이 세종의 치세말년 중 10년 가까이 대리청정을 했고 임금의 역활을 잘 수행했습니다. 또한 세종의 많은 업적중에 문종의 세자시절 이룩한것도 많았습니다. 단지 몸이 병약하여 세종의 근심이 있었을 뿐입니다. 게다가 단종도 어려서부터 영특하기 이를데 없어서 세종이 많이 아꼈다고 합니다. 이런상황에서 다른 성씨의 반란은 생각할수도 없었습니다. 그런 시도자체가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미친짓에 지나지 않을 사건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세종의 형제들에 대한 지극 정성은 단지 양녕대군뿐 아니라 경녕군에게 까지 미쳐있습니다. 경녕군에 대한 세종의 극진함은 양녕대군보다 더하면 더해지 모자르지 않앗습니다. 임종전에는 특별히 경녕군 사후 대한 장례를 언급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후에 경녕군이 사망하면 대군에 버금가는 후한 장례를 치러주라는 유지까지 내렸을 정도입니다. 단지 우애가 아니라 부왕의 즉위과정에서 숙부들의 죽음을 접해왔고 왕권강화를 위해 외척을 모두 쓸어버리는 독한 모습 또한 보였기에 그런 모습이 안타까웠을 수도 있었습니다. 세종의 외가인 민씨일가 외숙부들이 모두 귀양가거나 사사되어 죽었고 세종자신의 처가 또한 부왕에 의해 멸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습니다.

    굳이 병약한 맏아들을 세자로 앉힌거에 대해서는 자신이 겪었던 상황과 오버랩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자신이 왕위에 오르기 전 세자의 교체에 있어서 조정이 분열되는 모습과 나라의 기틀이 잡힌 이상 이것을 이어가야 한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엇을 겁니다.

    더욱이 세자의 능력의 출중함이 병약함을 덮어버릴 정도였기에 뒤어나기도 했고, 문종이 그렇게 세상을 빨리 떠날줄은 상상도 못했을거라 봅니다. 둘째아들이 첫째아들에 뒤지지 않게 가지고 있는 왕제로써의 자질까지 생각한다면 우려스러운 부분이지만 둘째아들의 기질이 부왕인 태종의 기질에 닮아 있어서 혼란스러운 나라상황에서는 나라의 혼란을 정리할수 있을지 언정 안정된 나라에서는 혼란을 부추길수 있다는 측면도 고려되었을 겁니다.


    게다가 손자인 단종이 어려서 영특함을 보였기에 문종이 단종이 정치를 직접할 수 있는 나이(18세정도의 연령대)까지는 무난하게 자리를 보존할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문치중심의 정치적 안정과 장자로 연결되는 왕의 정통성등으로 충분히 왕권의 강화로 연결되는 것은 눈감고도 알수있는 상황이니 말입니다. 부왕인 아버지가 장자에게 왕위계승을 하려던 목적과도 부합되는 일이기도 하구요.



    단지 문종의 병약함이 세종의 예상을 뛰어넘었고, 둘째아들의 권력에 대한 욕심이 자신의 예상보다는 훨씬 위였다는 점. 그리고 문종이 관과한 사실은 왕권강화를 위해서는 왕실의 근간인 종친들의 흔들림이 없어야 하는데 그것을 사전에 신경쓰고 조정하지 못한 결과가 세조의 왕위찬탈이 아닌가 합니다.


    더불어 생각해보자면 세조가 단종의 완제로서의 능력의 표출을 기다리지 못하고 신하들에게 휘들리는 모습만을 보고 섣불리 양녕대군의 말만을 듣고 양위를 받은게 하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양녕대군이 복수하려고 한것은 아니겠지만 당시의 실권자들중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폐위때 젊은 관료들로 적극 찬동했던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에 자극을 받지 않았나 합니다.

  9. 작은인연 2008.05.19 15: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성삼문에 대한 코멘트가 자꾸 달리는데.. 내용을 제대로 읽어 보세요..
    단종을 무릎에 앉히고 부탁했던 신하가 성삼문, 신숙주고..
    배신했던게 신숙주죠..
    성삼문은 나중에 세조를 죽이려고 했던 사육신에 포함된 분이구요..

    글 쓰신분이 제대로 적으신거 맞습니다..

    성삼문..
    5살때인가 똑똑하다고 소문나서 세종이 불렀는데..
    상으로 무거운 비단을 주면서 어찌하나 보았는데..
    허리춤에 감고 끌고 갔다죠..
    엄청난 천재로 소문이 자자 했다는..
    삼문이라는 이름은..
    태어날때, 하늘이 낳았느냐, 낳았느냐, 낳았느냐 3번 물었다고 해서 삼문이랍니다...

    어릴때 읽었던 위인전이 생생하네요....

    • 나그네 2008.05.19 16:08  댓글주소  수정/삭제

      김시습이 어릴때 세종에게 불려가서 테스트 받았습니다. 성삼문은 아니예요,^^;;

  10. 지나가다 2008.05.19 16: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태종이 양녕대군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성격과 비슷하다는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과거에 했던 일을 또 일으킬까봐 걱정해서 물러나게 했다는 이야기인데요. 결국 같은 집안사람끼리 또 피를 불렀죠...
    뭐 양녕대군이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한 원인의 하나는 신하들에 대한 증오심 때문이란 이야기도 있습니다. 세종대왕이 즉위하고 양녕대군이 야인 생활을 할때 신하들이 양녕대군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여러번 건의 했다는 겁니다. 세종대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걸 안 양녕대군이 신하들을 무지 미워했고 너무 신하들에게 왕권이 흔들린다고 생각했다 합니다. 그래서 왕실을 강하게 만들 사람으로 수양대군을 생각해서 밀었다는 이야기인데 자신의 성격과도 비슷한데가 있어서 더 호감을 갖게 되었다 하죠.

  11. 글세요 2008.05.19 16: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깝기로 따지면 단종과 양녕만한 관계도 없었지만 '명예회복' 을 향한 복권의 한(恨)은 그렇게 세종의 손자에게 칼날을 겨누었다. 복수로 따지자면 한없이 잔인한 복수였다."
    는 표현에 동의하기 어렵군요

    가깝기로 따지면(촌수로 따져봐도) 수양이 더 가깝지, 결코 단종이 가까울수는 없구요
    왕실의 어른역할은 양녕보다 더 어른이 생존하지 않았기때문에 자연스럽게 왕실의 최고어른이 된 것이지, 의도적으로 복권을 노려 결국 왕실의 어른 역할을 하게되었다는 논리는 넘 비약인 것 같습니다.

  12. 2008.05.19 16: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느정도 신빙성이 있다고 봅니다. 계유정난 뒤에 양녕이있었다는 건 어느정도 사실이기도

    하구요.. 자기 명예회복이니 뭔지는 모르겠지만 양녕대군이 가장 사랑한 조카는 자기와

    거의 흡사한(다른게 말하자면 자기 아버지 태종과 흡사한) 수양대군이였다고 하죠. 단종

    즉위와 신권의 강성화로 인한 혼란을 보고 아마 수양대군을 뒤에서 밀었겠죠.... 복수라고

    하긴 뭐하지만 가장사랑한 조카에게 왕위를 주고 싶은 마음이였을지도 모르죠

  13. 멍멍 2011.08.12 05: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른 건 모르겠으나 우선 세조실록에 양녕이 단종을 처단하라고 세 번이나 건의한 항목이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