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때였다. 어느 동네에나, 어느 학교에나 다 있는 '바보' 가 우리 학교에도 있었다. 하필이면 나랑 같은 반이 될게 뭐람, 그렇게 "푸~~" 해버리고 1년을 그 바보와 같이 학교를 다녔다. 운동회를 할 때도, 수학여행을 갈 때도, 졸업식 때도 그 아이와 나는 함께 했었다. 졸업식 사진에서 그 누구보다도 해맑게 웃고 있는 그 바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고등학교에 가고, 어느새 어른이 되어 버린 시간 속에서 잊혀져가던 그 바보녀석을 다시 기억해 낼 수 있었던 건 영화 [바보] 때문이었다. [바보] 는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듯 천진하게 웃어버리던 그 바보, 아니 초등학교 때 '친구' 의 웃음을 다시 나에게 되돌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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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을 배반하지 않는 정직한 '바보 영화'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영화 [바보] 는 강풀의 인기만화 [바보] 를 원작으로 한 영화다. [바보] 이전에 [아파트] 가 이미 영화화 된적이 있긴 하지만 [아파트] 가 만화의 설정만을 빌려온 것에 반해 [바보] 는 정말 '바보' 같을 정도로 원작에 충실하다. 그러나 '원작에 충실하다' 는 것이 결코 [바보] 의 결점이 되지는 않는다. [바보] 는 오히려 원작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영화 안에서 포용함으로써 원작과 '같지만 다른' 새로운 정서의 공간을 마련한다.


강풀의 만화 [바보] 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바보보다 더 바보 같은 세상에 대한 외침' 이었다. 강풀은 '승룡이' 라는 바보를 통해 외로움, 질투, 절망에 가득찬 세상을 마음껏 비웃었다. 아니, 비웃었다는 표현보다는 감싸안았다는 표현이 더 맞을까. 아무것도 모르는 듯 해맑게 웃어버리는 바보, 세상이 버리고 삶이 버린 사람들까지도 포근하게 감싸버리는 바보. [바보] 의 '바보' 는 그렇게 바보 같은 세상과 바보보다 더 바보같은 사람들을 위로하고자 태어났다.


사람들이 '승룡이' 를 사랑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승룡이의 해맑은 웃음과 천진한 낭만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너무 동떨어진 순수한 것이어서, 그리고 그 순수한 마음이 위장된 가식이나 과장된 해학없이 딱 승룡이만큼 진정한 것이어서였다. 영화 [바보] 는 바로 승룡이의 진정성을 해맑은 눈으로 바라본다. 영화는 가감없이 솔직하다. 영화랍시고 과장된 시선으로 바보를 그려내지도 않고, 일부러 재미를 주기위해 에피소드를 구겨넣지도 않는다. 그저 그렇게 [바보] 는 승룡이의 시선과 감정을 충실히 따라갈 뿐이다.


[바보] 의 감독 김정권은 <무비위크> 와의 인터뷰에서 "원작의 좋은 점은 최대한 살리자는 원칙이 있었다. 괜히 세련되게 고치고 잔재주 부리다 원작에서 느꼈던 정서들을 놓치지 말자고. 승룡과 지호, 친구 상수의 관계, 그리고 승룡의 동생을 사랑하는 마음을 중심에 뒀다. 작지만 좋은 에피소드도 참 많았는데 다 넣을 수가 없었던 점은 좀 아쉬웠던 것 같다." 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김정권의 세심한 배려 덕분이었을까. [바보] 는 그의 말처럼 세련되지 않지만 정직하고, 파격적이지 않지만 감동적이다. 원작의 강점을 훼손하지 않고 승계하는 영리함과 영화로만 표현할 수 있는 따뜻한 영상미는 그대로 [바보] 의 '영화적 강점' 이 됐고 관객들은 별 이의없이 영화에 동화된다. "원작과 다른 영화로 만들어졌다면 팬의 입장으로 화가났을 것 같다. 승룡에 대한 애정은 나도 강풀만큼 있으니까." 라던 감독 김정권의 진정성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우리 아빠가 목사님이잖아. 내가 처음 승룡을 그릴 때 어린 예수를 떠올렸거든. 모든 걸 다 주고 떠나는 예수와 같은 승룡....에피소드가 많이 편집되긴 했지만 정권이 형이 강력한 '한 방' 을 잘 잡아서 표현했더라고. 형은 사람들이 [바보] 의 어떤 점을 좋아했는지 정확하게 짚어낸 것 같았어." (강풀)





13년 내공 빛나는 차태현 연기



그러나 아무리 영화가 좋다고 하더라도  좋은 배우가 뒷받침 하지 못한다면 그건 반쪽짜리 영화에 불과하다. 이런면에서 영화 [바보] 가 가지고 있는 진정성은 차태현에 의해 완성됐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엽기적인 그녀] 로 주연급 스타로 거듭난 이래로 꾸준한 필모그래피를 쌓아왔던 차태현이었지만 사실 [엽기적인 그녀][연애소설] 이후로 눈에 띄는 대박작은 전무한 상태였다. 허나 [바보] 에서의 차태현은 기존 '차태현' 의 이미지에서 한 발자국 비켜선다. 장난끼 많고 능글맞던 차태현은 [바보] 에서 완벽한 승룡이로 거듭나며 배우 차태현의 '13년 내공' 을 유감없이 발휘해 버린다.


원작자 강풀은 "사실 처음엔 차태현이 바보 승룡이를 한다고 해서 좀 의구심이 들었다. 전주 현장까지 놀러 갔는데 저 멀리서 차태현이 걸어오면서 웃는데 진짜 바보 같더라(웃음) 웃는게 선해서 너무 마음에 들었고. 만화는 평면적이고, 또 만화니까 용납되는 부분이 있는데 차태현과 하지원이 어색하지 않게 연기를 정말 잘해줬다. 이제 승룡이 역에는 태현이 말고 다른 배우가 대입이 안 될 정도로." 라며 차태현의 연기에 만족감을 드러냈다.


강풀의 만족스러운 '감상' 은 차태현의 연기가 어느 정도의 수준에 올라왔는지 보여주는 일면이지만 실상 원작의 팬이자 관객의 입장으로 느끼는 차태현의 '승룡' 이는 만족 이상의 감동을 가져다 준다. 유머와 일상을 평범한 선에서 조절하는 섬세함, 절대로 과잉하지 않는 자의식, 승룡이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움은 딱 '차태현만큼' 그리고 딱 '승룡이만큼' 정직해서 기분이 좋아진다. 하지원, 박희순 같은 쟁쟁한 배우 속에서 '차태현' 이라는 이름이 빛나는 이유는 비단 그가 주연배우이기 때문만은 아닐터였다.


차태현은 승룡이를 연기하면서 "인위적으로 내가 뭘 만들기보다 만화책의 승룡이가 스크린에 바로 옮겨간 느낌이 들었으면 싶었다." 는 소감을 피력했다. 정말 아이처럼, 정말 승룡이처럼 차태현의 연기에는 예의 전작들에서 보여지던 의도된 친근함이나 계산적 유머러스함은 거세 되고 '승룡이' 의 순수함과 천진함만이 남았다. "연기를 연기 같지 않게 하는 사람이 바로 차태현이다." 라는 하지원의 평가는 사실상 그의 연기가 어느 정도의 경지까지 올라왔는지 가장 잘 표현하는 한 마디다.


"[바보] 의 명장면을 꼽는다면.....난 승룡이가 동생 지인이 때문에 정신없이 달려가는 장면. 처음엔 많이 웃었다. 태현 오빠 목소리도 워낙 크고 행동도 좀 황당해서. 하지만 영화 보니 정말 짠하더라. 그리고 지인이에게 준다고 부엌에서 혼자 꼼지락꼼지락 토스트 만들 때, 또 바보 오빠가 싫은 지인이가 자기 방에 들어오지 말라고 하니 문밖에서 살짝 문 열고 서 있는 장면. 그 때는 내가 가서 승룡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 일상적이고 소소한 행동들이 가슴을 찡하게 하는 영화다." (하지원)




바보 '승룡이' 의 웃음을 느껴보세요.



"여느 동네처럼 우리 동네에도 바보가 있었습니다. 그 바보의 웃음은 세상에서 가장 환한 것이어서 만나는 사람마다 웃음짓게 했습니다." 영화 [바보]의 마지막은 지호의 잔잔한 내레이션으로 마무리 된다. 지호의 그 말처럼 여느 동네에나 다 있는 '바보' 승룡이의 그 웃음은 2시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동안 관객에게 뭉클한 감동과 순수한 해맑음을 선사한다. 더할 것도 없고, 덜할 것도 없이 딱 그 만큼, '바보 승룡이' 만큼 말이다.


잔잔하고 애틋한 감성과 특별나지 않지만 따스한 이야기가 전달하는 오랜 여운, 원작을 애써 뛰어넘으려는 강박관념 없이 오로지 '승룡이' 만을 위하여 헌사된 이 영화 [바보]. '바보' 를 모르는 사람에겐 승룡이는 그저 '바보' 일 뿐 이지만 '바보' 를 아는 사람에겐 승룡이는 결코 바보가 아니다. 그러나 바보가 선사하는 따뜻한 웃음, 그리고 그 바보가 만들어가는 포근한 세상, 그 세상을 바라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뭉클해지는 가슴을 가진 우리는 어쩌면 모두 '바보 승룡이' 를 가슴 속에 담아두고 사는 건 아닐까.


잃어버린 줄 알았던 아니, 잊어버리고 살았던 해맑은 순수함을 되돌려 준 '바보' 승룡이에게 새삼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이런 말 하는 거 바보 같지만 승룡아...고맙다, 그리고 사랑한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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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atehead 2009.06.30 13: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거 만화보고 마지막에 울었는데...
    영화는 못봄 보려고 했는데 소리없이 사라졌다는 ...